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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113)화 (113/123)

113화 삶과 죽음을 모두 그대와 함께하리라

“……으읏.”

갑작스레 지오프리는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두통은 늘 달고 살았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강하게 눌러 대는데, 낯설되 낯설지 않은 기억이 밀려들었다.

미오가 환하게 웃는 얼굴, 햇살 아래 저만치 폴짝폴짝 뛰어가는 모습, 봄바람보다 따뜻한 미소, 그를 향해 속삭이는 달콤한 음성…….

‘너를 기억할게.’

‘그러지 마. 지오프리.’

‘아니. 반드시 내가 너를 찾아가겠다.’

‘당신이 또다시 위험해지는 게 나는 싫어.’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네 손을 놓지 않겠다.’

이전에도 이렇게 죽어 가는 그녀를 본 적이 있다는 사실에 지오프리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 갔다.

“그랬구나.”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진 낯선 여인이 자꾸만 신경 쓰였던 것이 이런 이유였다. 어리석은 그가 미오를 잠시 잊었지만, 심장에 새겨진 사랑이란 쉬이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한가롭게 사랑 타령을 할 때가 아닐 텐데?”

벤의 야비한 음성에 지오프리는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상대는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앙겔라스, 그녀를 지켜라.”

크르르!

망토에 싼 미오를 앙겔라스에 맡긴 그가 검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투구를 벗어 던진 지오프리가 벤의 앞에 우뚝 섰다. 피범벅이 된 지오프리의 볼 위에 한 줄기의 새하얀 선이 그어져 있었다.

“진작부터 네가 불길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벤은 앙겔라스와 지오프리를 번갈아 보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그대 어머니도 이런 괴물을 낳다니 참 안타깝군.”

감히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를 입에 담다니…….

지오프리는 얼굴에 남은 눈물의 흔적을 쓱 지우면서 서늘하게 웃었다.

“우습군.”

누가 누구더러 괴물이란 건가.

모든 사람은 자기의 잣대에 맞춰서 괴물을 만들어 냈다.

그의 눈에는 벤이나 카트리나만큼 흉측한 괴물은 없었다.

“원래 이 전쟁에는 네 자리가 없었지만, 방금 생긴 것 같군. 내가 전력으로 벤, 너를 상대해 주지.”

미오의 죽음에 그는 절대로 침묵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괴물이 기꺼이 되어 주기로 했다.

“뭐? 벤? 이제 완전히 미친 건가?”

감히 황태자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벤의 눈에 노기가 잔뜩 서렸다. 하지만 그 노기도 살벌한 지오프리와 당당하게 맞붙을 만큼은 아니었다. 슬금슬금 뒷걸음치던 벤이 그의 수하에게 명령을 내렸다.

“뭣들 하느냐! 카스피언 공작을 죽여라!”

황태자의 명에 수십의 병사가 동시에 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들은 단말마의 비명도 남기지 못하고 모조리 죽었다.

“저런 쓸모없는 것들!”

벤은 그를 지켜 주던 호위병들의 죽음 앞에서 한바탕 성질을 냈다. 이렇게 되면 그의 손으로 직접 처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오프리, 이곳을 잘 봐 둬라. 네 무덤이 될 테니!”

검을 번쩍 쳐든 그가 기세 좋게 지오프리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그의 공격에 지오프리는 검을 아래로 떨어뜨린 채 가만 서 있기만 했다.

“무서워서 검을 들 생각도 못 하는군.”

최후의 일격 직전, 승리를 확신한 벤이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번쩍!

벤의 검이 허공을 가르고 지오프리의 목을 노렸다. 저 목만 치면 이제 진정한 황태자가 될 수 있었다. 지오프리의 그림자 뒤에 가려진 허울뿐인 이름에서 벗어날 것이다.

“……!”

잠깐 동안 벤은 그에게 일어난 일을 알아채지 못했다. 왜 몸을 움직일 수 없는지, 왜 이렇게 아픈지 깨달았을 때는 지오프리의 검이 그의 가슴에 박힌 뒤였다.

“이게 무슨 일…….”

짧게 입을 떼는데 벤의 입가로 피가 주르륵 흘렀다.

“형제의 칼날이 가장 깊이 박히는 법이지. 안 그래? 벤. 내 동생.”

한 번도 인정한 적 없던 동생이라는 단어를 내뱉는 지오프리의 얼굴에 메마른 미소가 떠올랐다. 벤은 피를 내뿜으면서도 손을 들어서 지오프리의 손을 잡으려 애썼다.

“카스피언 공……작, 제발 살려―.”

생명이 꺼져 가는 벤의 눈을 바라보면서 지오프리가 싱긋 웃었다.

“사냥이 끝난 뒤 개가 간혹 주인을 물고는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 봤나 모르겠군.”

그 말을 남긴 후 그가 박힌 검을 그대로 비틀었다. 그러자 벤의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주변에서 누군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사냥개의 역할은 이미 차고 넘치게 했다. 카스피언 제국이 당장 멸망한다고 해도 이제 그의 소관이 아닐 것이다.

“미오, 집으로 돌아가자.”

지오프리는 앙겔라스를 부려서 짐승의 위에 올라탔다. 미오를 꼭 안은 그가 여기저기 널브러진 시체 더미를 밟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경외심 어린 눈을 한 병사들이 길을 내어 주었고, 지오프리는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다.

* * *

카스피언 공작 성으로 돌아온 지오프리는 침실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아무도 이곳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

침실에는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갑옷과 검이 나뒹굴었다. 커튼도 걷지 않은 침침한 침실, 침대 한가운데 미오가 깊은 잠든 것처럼 누워 있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지오프리는 그녀의 손을 움켜쥔 채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

“내가 어리석었다.”

겨울 숲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던 일부터 오늘까지의 일이 전부 후회되었다. 그의 마음을 빨리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너는 줄곧 내게 사랑한다고 했는데…….”

한심해 빠진 그는 줄곧 그런 미오를 의심했고, 시험해 왔으니까.

지오프리는 처음 그녀가 감추고 있던 비밀을 확인한 밤을 떠올렸다.

‘나는 분명 너를 똑똑히 봤는데…….’

라비니아의 독에 당해서 숲을 헤매던 그녀를 구한 밤이었다.

사냥꾼의 쉼터에서 끙끙 앓던 미오가 은빛 털을 가진 여우로 변했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미열에 허덕이던 여우가 지오프리의 어깨를 꽉 물었다. 열을 내리려고 물을 먹이자, 그녀는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었다.

‘……각인 상대를 코앞에 두고 나는 뭘 했던 건가.’

끝도 없는 자책감에 지오프리는 자신을 비난하고 헐뜯었다.

미오는 그에게 하나뿐인 인연이었는데 지오프리는 이제 심장의 반쪽을, 아니 모든 것을 잃었다.

충혈된 그의 눈에 이채가 깃들기 시작했다.

“모두 죽여 버리겠어.”

하찮은 것들을 죄 쓸어 버리는 것은 하루면 충분할 것이다. 손목에서 꿈틀대는 기운이 그를 덮쳐 오기 시작했다.

“……으윽.”

알렉세이 우르체카가 네 개 제국의 중재자라면, 그는 네 개 제국을 다스리는 제왕이었다. 그의 검은 그 무엇이든 꿰뚫을 수 있었다.

세상은 그에게 많은 힘을 줬지만, 동시에 제약도 따랐다. 힘의 폭주를 막지 못하면 그것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막지 못했던 것도 하필이면 그때 힘을 제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코로니스가 준 약의 도움으로 그를 잡아먹으려 드는 어두운 기운에서 간신히 버텨 왔다.

“하지만 이제 상관없어.”

그는 원래 제국의 지배자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지오프리는 그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하는 조용하고 평범한 일상을 꿈꾸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늘 소중한 것을 잃고 나서야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다.

“Tecum vivere amem, tecum obeam libens.”

그의 입에서 이제는 사라진 고어가 흘러나왔다.

폭주의 조짐이 느껴졌으나 그는 억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때 그가 잡은 미오의 손이 꿈틀대는 것을 느끼지 못했더라면 분명 이성을 잃었을 것이다.

“지오프리, 아까 그거 무슨 말이에요.”

그의 손을 힘주어 잡은 미오가 그를 보고 있었다.

지오프리가 붉게 충혈된 눈을 세차게 비볐다.

“내가 진짜 미쳐 버린 건가.”

그가 힘없이 중얼대자 미오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지오프리! 나를 똑바로 봐요.”

손을 뗀 그녀가 걸치고 있던 검은 무복을 벗어 내렸다. 그리고 안에 입고 있던 얇은 갑옷의 끈을 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힘에 부치는지 하다 말고 잠시 숨을 골랐다.

“보고 있지만 말고 좀 도와줘요.”

“…….”

죽었다고 생각했던 미오의 음성에 그는 허둥지둥 끈 푸는 것을 도와주었다. 갑옷이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지자 지오프리의 눈에 조금의 생기가 돌아왔다.

“용의 비늘로 만든 갑옷이군.”

“알렉세이가 줬어요.”

미오가 위험한 곳에 가는 것에 내내 불안해하던 알렉세이는 아주 귀한 선물을 줬다.

‘이것은 어떤 공격에도 너를 지켜 줄 거야.’

입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는데, 이렇게 살아난 것을 보면 알렉세이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죽지 않았어.”

지오프리는 아까 축 늘어져 있던 그녀를 떠올리면서 힘없이 중얼댔다. 넋이 빠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미오가 손을 뻗어서 지오프리의 볼을 쓸었다.

“그래요. 나 안 죽었어요.”

그의 얼굴에 눈물이 스치고 지난 흔적이 너무 선명해서 가슴이 저릿했다.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한 지오프리가 울었나 보다. 그의 깊은 사랑에 미오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니까 왜 마음대로 굴어요.”

촉촉해진 그의 눈가를 더듬던 미오가 퉁명스레 입을 뗐다.

“내가 뭘…….”

“누구 마음대로 이렇게 다치래요. 그리고―.”

지오프리는 그의 얼굴에 닿는 온기에 어깨를 들썩거렸다. 부드럽고 따뜻한 이 감촉은 그가 전장에서 내내 그리워하던 그것이었다. 차갑게 식어 가던 그의 심장에 다시금 불이 지펴지기 시작했다.

지오프리의 입술 사이로 애절한 음성이 흘렀다.

“……내가 다 잘못했어.”

“그렇게 나오면―.”

죽음을 불사하고 전투에 참여했다는 말에 화가 났었다. 또 그녀 앞에서 그가 죽었다면 차마 그 슬픔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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