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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112)화 (112/123)

112화 그대를 위한 죽음이라면 (2)

코로니스가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게다가 카스피언 공작님은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습니다.”

“그래. 그것 역시 잘 알고 있지.”

미오는 뭔가 많이 생략된 그들의 대화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도무지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다 궁금한 것이 떠올랐다. 이들은 모두 과거의 기억을 잃지 않았고, 그녀는 방금 기억해 냈다.

“그러면 혹시 공작님이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 같은 이유일 겁니다.”

코로니스의 답에 그녀의 가슴이 다시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서로를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 너무 사랑해서라니.

하지만 지금 그런 감상에 젖어 있을 여유가 없었다.

당장 가서 그를 돕지 않으면 모든 일이 수포가 될 테니까.

“참, 저 카스피언 공작 성에 잠시 들를 수 있을까요.”

지오프리를 도울 방법을 고민하던 차에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밤새 달린 마차가 남단의 격전지에 도착한 것은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멀리서 들리는 기합 소리와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생생했다.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알렉세이가 건너편에 앉은 미오를 살폈다. 남자 옷을 입은 미오가 긴 은발을 하나로 묶어서 모자 안으로 밀어 넣었다. 체구가 호리호리한 미청년처럼 보이긴 했으나, 미오는 전사가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꾼다면…….”

알렉세이는 어떻게든 미오를 험한 곳에 보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녀는 지금까지 너무 고생했으니, 이제는 좀 꽃길을 걸었으면 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무런 근심 없이 웃고 떠들고 산책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 모두는 그의 욕심에 불과했다.

“알렉세이,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천천히 마차가 멈추었고, 미오가 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이제부터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서는 안 되었다.

이 전쟁은 그녀와 지오프리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말아요.”

곧 울 것 같은 알렉세이의 어깨를 두드려 준 미오가 비앙카와 코로니스와도 작별 인사를 했다.

“곧 다시 만나요.”

“……그래. 꼭.”

더 지체했다가는 그녀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서 곧장 등을 돌렸다.

“앙겔라스! 가자!”

떠나는 미오를 지켜보던 알렉세이가 조용히 중얼댔다.

“서로 기억도 못 하면서 좋아하니 그걸 무슨 수로 이겨.”

알렉세이가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두 사람은 다른 시간과 장소에 만나서도 늘 사랑에 빠졌다.

서로 몰래 뼈에다 새겨 둔 게 아니고서야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미오에게 고백하지 않은 것이 잘한 일일지, 후회로 남을지 알 수 없었다.

‘……현재로서는 말이야.’

하지만 삶은 그리 짧지도 길지도 않았다.

오래도록 기다리다 보면 그의 인생에도 봄이 올지 누가 알겠는가.

“비앙카, 우리는 우르체카로 돌아가서 미오가 좋아하는 고기파이나 한가득 만들어 두는 게 어때.”

곧 만인의 사랑을 받는 우르체카 대공의 얼굴로 돌아온 그가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마차는 다시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고, 잠시 후 길에는 먼지만 자욱했다.

전해 들었던 것과 달리 전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마구 뒤엉켜서 몸싸움하는 이들도 있었고, 화살이 곳곳에서 빗발쳤다.

“이게 전장이구나.”

익숙하지 않은 광경에 몸이 굳었지만, 그녀의 눈이 바삐 누군가를 찾았다.

“앙겔라스, 네 주인이 보여?”

공작가 후원에 있던 앙겔라스를 데려온 것이 그녀 나름의 묘수였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앙겔라스는 어찌나 든든한지 가까이에 오는 적이란 적은 모조리 물어서 집어 던졌다.

“괴, 괴물이다.”

앙겔라스의 등장에 그녀 주변에 길이 조금 나서 미오는 앞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저기 깃발이 있어.”

수십 명, 수백 명만 헤치고 가면 지오프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지오프리가 선물했던 단검을 빼 든 미오는 앙겔라스가 미처 처리하지 못한 적에게 검을 박아 넣었다.

“앙겔라스, 저기 그가 있어.”

얕은 산등성이를 오르자 그 아래 밀려드는 적을 해치우는 지오프리가 있었다.

“꼭 죽음의 천사 같아.”

검으로 적을 무참히 베어 버리는 모습은 오싹할 만큼 아름다웠다. 그리고 동시에 너무나 외로워 보였다.

그를 바라보는 미오의 눈에 뜨거운 기운이 스며들었다.

‘누구 마음대로 죽음을 각오한 거야.’

지오프리는 위기 상황에 무슨 일이 생길지 전부 알면서 이곳에 오는 것을 택했다.

“이번에는 내가 그렇게 되도록 두지 않을 거야.”

미오의 다짐에 앙겔라스가 머리를 그녀의 허리에 비볐다.

“서두르자!”

언덕을 힘차게 달리기 시작한 미오의 모자 아래로 기다란 은발이 삐져나왔고, 반짝이는 두 눈은 오직 한 사람만 꿈꾸었다.

* * *

기습에 당황했던 초반을 제외하고는 전투는 계속 카스피언에게 유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끊임없는 침략으로 카스피언의 병사들은 늘 전투 태세였으며 다른 제국은 상대적으로 군사력이 강하지 않았다. 수적으로 우세해 승리를 확신했던 제국 연합은 슬슬 패배를 인정할 때였다.

“디아나 여신에게 빛나는 승리를 바치자!”

적의 공격이 눈에 띄게 약해지는 시점이 되자, 휘황찬란한 갑옷을 입은 벤이 수십의 호위군을 달고 전장에 나섰다. 황태자의 등장으로 카스피언 병사들은 다시 흥분에 휩싸였다.

벤은 투구 사이로 그의 적을 노려보았다.

매서운 시선은 연합 제국의 깃발이 아니라, 그의 이복형에게 향해 있었다.

‘너만 없었으면…….’

그가 이런 고통에 시달릴 이유가 없었다.

지난 몇 년간 지오프리 공작 때문에 충분히 괴로웠던 그다. 황태자의 관을 쓰고도 항상 상대를 경계해야 해서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산이라면―.’

벤 카스피언은 그 산을 넘어설 수 없다면 그냥 통째로 부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야비하게 미소 지으며 어머니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꼭꼭 숨어 있었는데, 어느 날 황후가 그를 찾아냈다.

‘황후 폐하. 그만 돌아가시죠. 할 말도 없습니다.’

벤은 쥐고 있던 술병을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황태자! 지금 이럴 때가 아닙니다!’

역시 어머니는 그를 보자마자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하.’

서로 평범하게 대화를 나눴던 게 언제인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카스피언이라는 성을 가지기 전이었으려나…….’

두 사람은 금은보화를 가지게 되었지만, 그만큼 행복을 내주게 되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커튼도 걷지 않고 뭐 하는 겁니까. 지금 전쟁이 났습니다.’

술독에 빠져서 외출하지 않는 지 벌써 열흘, 아니 한 달이 넘었나.

시간을 헤아려 보지 않았던 터라 벤은 몽롱하기만 했다.

‘전쟁이고 뭐고 관심 없으니 가시죠.’

‘정신 차려요! 황태자!’

커튼을 열어젖힌 황후는 창까지 열고 나서 가까이 다가왔다.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벤은 그녀가 어쩐지 보석을 세공해 만든 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지면 뾰족한 끝에 찔려서 상처를 입을 것 같은…….

‘어미의 말을 듣고 있는 겁니까?’

‘그럼요. 황후 폐하. 아주 잘 들립니다.’

그때 카트리나 황후가 귓가에 속삭인 말에 벤은 몸을 고쳐 세웠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했어.”

전쟁이 끝나 갈 때쯤 전투에 나선 벤이 적을 소탕하는 척하면서 지오프리를 없앤다는 계획이었다.

‘그때쯤이면 상대는 이미 서 있을 기운도 없을 만큼 지쳐 있을 겁니다.’

투구 사이로 보이는 지오프리 카스피언의 모습은 확실히 위태위태해 보였다.

‘사냥개 주제에 왜 저리 열심인지 몰라.’

어차피 쓰임이 다하면 내다 버려질 주제에 말이다.

지오프리가 이제 사라진다고 생각하자 심장이 심하게 요동쳤다. 그는 천천히 상대의 등 뒤로 다가섰다. 그리고 지오프리가 선물해 준 마물의 꼬리뼈로 만든 검을 뽑아 들었다.

‘이 검에 저 새끼가 죽는다고 생각하니 몹시 짜릿하구나.’

수십의 호위군이 그들을 에워쌌기에 외부에서는 무슨 일이 있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완벽한 승리가 눈앞에 있다.’

검을 쥔 벤의 손끝이 흥분으로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지오프리의 등 뒤, 목과 갑옷 사이에 드러난 부분에 검을 박아 넣기 직전이었다.

누군가 경고라도 하듯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안 돼!”

무슨 일인가 싶어서 뒤를 돌아보자 보고도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웬 체구가 작은 남자 하나가 그를 향해 잽싸게 날아오고 있었다.

‘……날아와?’

짧은 순간 얼른 상황을 살피자 그 사내가 웬 마물의 등을 밟고 뛰어오른 게 아닌가. 놀라서 몸이 굳은 벤의 위로 번쩍이는 검이 보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벤이 마물의 꼬리뼈로 만든 검을 휘둘렀다.

“꺼져라!”

검은 정확하게 상대의 팔과 가슴을 스쳤고, 그를 기습하려던 자는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몸을 돌린 지오프리가 음산한 음성을 냈다.

사방을 에워싼 호위군과 벤, 그리고 앙겔라스.

“……설마.”

작은 단검을 쥐고 저기 누워 있는 형체가 어쩐지 눈에 익숙했다. 사무엘에게 뒤를 부탁한 지오프리가 앙겔라스의 곁으로 서둘러 다가섰다.

“앙겔라스. 비켜.”

앙겔라스는 알을 품는 어미 새처럼 누군가의 몸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명에 앙겔라스가 옆으로 비키자 주변에서 탄성이 터졌다.

“마물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인간에 대해 들어 본 일이 없다.”

“카스피언 공작은 소문처럼 괴물이었어.”

경악을 금치 못하는 이들의 시선이나 수군덕거리는 음성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지오프리는 천천히 엎어져 있는 상대의 몸을 바르게 돌렸다.

“……미오.”

그녀의 파리한 얼굴을 확인한 순간 지오프리는 잠시 숨 쉬는 것을 잊었다. 그가 생각했던 가장 최악의 결말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으읏.”

축 늘어진 그녀의 몸 위로 검은 망토를 벗어서 덮어 주었다. 그리고 미오를 안아 드는데, 투구 사이로 뜨겁고 축축한 것이 흘렀다. 그것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는 멍하니 미오를 품에 안았다.

“아직 못 해 준 게 더 많은데…….”

갑자기 몸의 기운이 죄다 빠졌다.

“나는 대체 여기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미오를 보호하겠노라고 맹세했는데, 그 약속 하나 지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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