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그대를 위한 죽음이라면 (1)
“그냥 두면 그는 정말 죽을지도 몰라요.”
“당신이 가게 되면 똑같은 일이 반복될 겁니다.”
“내가 가지 않으면요?”
“어차피 두 사람은 안 될 운명입니다.”
뭔가 아는 게 있는데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는 코로니스 때문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미오는 손을 뻗어서 그의 망토를 감싸쥔 채 애원했다.
“선택은 내가 할 테니 아는 것만 알려 줘요.”
그러자 코로니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번 전쟁은 인간인 그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을 만한 게 아니란다.
“결국, 그분은 폭주하시겠죠.”
“……폭주? 그게 뭐죠?”
“다시는 인간성을 찾을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코로니스의 침착한 설명에 미오는 다리가 비틀거렸다. 그는 죽지는 않겠지만, 다시는 인간이 될 수 없단다. 피에 굶주린 짐승으로 남은 생을 살아야 한단다.
“그냥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달아나면 안 되나요.”
힘없이 묻는 미오의 질문에 코로니스가 손을 뻗어서 미오의 정수리를 살살 두드렸다.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는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아.”
과거에도, 지금도 그를 해치는 것이 전부 그녀인 것만 같았다.
“나 때문에 지오프리가…….”
죽는 한이 있어도 검을 놓지 않을 기세로 덤벼드는 지오프리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지금도 붉은 비를 맞으면서 그는 싸우고 또 싸우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야 알았어.’
엉망이 된 얼굴의 미오가 눈에 힘을 주었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지오프리를 구하는 것이었다.
“코로니스, 나 지오프리에게 갈 거예요.”
그녀의 결의에 찬 눈을 본 코로니스가 혀를 찼다.
“간다고 하면 할 수 없죠.”
* * *
해가 뜨면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서 검을 휘두르고 피를 흘렸다. 때로는 새벽부터 밤늦도록 전투가 이어졌다.
전장에 쌓여 가는 시체는 늘어났지만, 무엇을 위한 죽음인지 누구도 알 길이 없었다.
“공작님. 지원 병력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송구하나 물자도 다 떨어져 갑니다.”
“황제 폐하께 서신이 제대로 도착하지 않은 건 아닐까요.”
카스피언 제국의 최남단 격전지에 차려진 막사 안에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전달은 되었을 겁니다.”
지오프리가 장갑을 벗어 던지면서 중얼댔다.
처음 겪는 일이 아니라서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다만 지금은 카스피언 제국이 함락될지도 모른다는 차이 정도랄까.
‘새어머니는 정말 대단한 분이야.’
혹 그녀도 카스피언 제국의 안위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제국의 이름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을 테니…….’
이대로 싹 쓸어 버리고 새로운 제국을 만들려는 게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상상도 아닌 것 같군.’
카트리나 황후라면 그런 일을 하고도 남을 것이다.
“일단 남은 병력과 물자를 확인해 보고 다시 모이도록 하죠.”
모두가 빠져나간 막사 안에 홀로 서 있던 지오프리가 휘장을 걷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지금쯤이면 미오가 우르체카에 도착했으려나.’
세상에서 가장 꼴 보기 싫은 것이 알렉세이였지만, 지금은 그의 곁만큼 안전한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으윽.”
왼쪽 손목을 타고 꿈틀대는 검은 기운에 지오프리가 얼른 막사 안으로 몸을 감추었다.
“정말 우스운 일이지.”
늑대보다 높은 운명을 지닌 사람만이 늑대를 잡을 수 있다더니 늑대가 세운 제국은 늑대의 손에 멸망한단다.
앞의 말은 카스피언의 선조가 남긴 말이고, 아마 뒤의 말은 늑대를 두려워하는 인간이 만들어 냈을 것이다.
“이렇게 불길한 존재가 있을 줄 알았던 거지.”
지오프리는 인간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존재가 그라는 사실에 몸을 가벼이 떨었다. 오싹한 한기가 전신을 뒤덮었고, 눈가에 기이한 빛이 번들댔다.
“살 이유 따위는 없었는데…….”
아들의 비밀이 들킬 위기에 처하자 병든 어머니는 목숨을 버리면서 지오프리를 지켰다. 아픈 이별 후 가슴에 독기만 품고 살았던 그는 다시 살고 싶어졌다.
‘죽지 마! 지오프리.’
처음으로 그에게 죽지 말라고 해 준 사람이 생겼으니까.
“이러다 혹 죽게 되면 그것은 두렵지 않지만…….”
미오에게 거짓말을 한 게 되는 것은 싫었다.
그를 생각하면서 펑펑 우는 미오를 보는 것은 가슴 아팠다.
갑옷 위 심장께를 움켜쥔 지오프리의 얼굴이 온통 슬픔으로 젖었다.
* * *
사흘 넘게 이어진 치열한 전투에 카스피언 병력이나 상대의 병력 모두 손실이 컸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틀 안에 카스피언 황제를 끌어내리는 것이었다.
‘이번에 힘을 모으면 카스피언 제국을 치는 건 식은 죽 먹기라고 하지 않았나?’
이 땅에 묻혀 있는 무수한 광물에 눈이 멀어 버린 자들이 씩씩거렸다. 이토록 거창한 명분도 없이 일어난 전쟁이었다.
‘이러다가 우리가 밀려나게 생겼잖아!’
‘하지만 저쪽도 병력 손실이 커서 쉽지 않을 거야.’
‘무조건 카스피언 공작부터 죽여야만 해.’
그들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은 전부 카스피언 공작 때문이었다.
전장의 선두에 서서 거침없이 사람을 베는 공작은 소문보다 더 끔찍한 존재였다. 쏟아지는 화살에 픽픽 병사들이 쓰러지는 와중에도 절대 물러섬이 없으니 보기만 해도 섬뜩했다.
그렇게 공작의 빼어난 활약에 승기를 잡으려는 찰나 아군의 지원도 적절하게 도착했다. 게다가 황제와 황후, 황태자가 직접 와서 공을 치하하고, 함께 싸울 것을 맹세했다. 이렇게 되자 카스피언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디아나 여신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 만세!”
황제가 가져온 무기와 식량으로 창고가 금방 가득해졌고, 부상병은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막사에 모여든 장군과 귀족이 황제와 황후 앞에 무릎을 꿇었다. 피와 땀에 전 장수들을 지켜보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카스피언 제국에 그대들처럼 용감한 전사가 있기에 절대 패배하지 않을 것이네.”
황제의 격려에 덩치가 큰 사내들마저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옆에 있던 황후가 지오프리를 향해서 활짝 웃었다.
“역시 카스피언 공작이 있어서 든든합니다.”
“이 모든 것이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덕분입니다.”
미처 닦지 못한 피가 진득하게 들러붙은 갑옷을 입은 그가 황후에게 예를 갖추었다. 공작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던 황후가 옆에 있는 황태자를 앞으로 내세웠다.
“황태자는 병중인데도 이리 힘을 보태려고 먼 길을 왔으니 모두 잘 보필하길 바랍니다.”
“말씀 따르겠습니다!”
잠시 후 황후가 마련한 조촐한 연회가 이어졌다. 황제와 황후는 가지고 온 귀한 선물을 장수에게 나누어 주었고, 격앙된 이들은 내일 전투의 승리를 다짐하였다. 막사 안의 분위기는 승전고를 울린 듯 화기애애했다.
잠시 어울리는 척하던 지오프리가 곧 그곳을 빠져나왔다. 온갖 귀한 먹거리와 음악이 있는 막사를 나오자 지옥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는 건너편 진영에서 타오르는 횃불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이런 연회를 즐기기에는 이른 때였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는 황후를 말릴 수 없었다.
‘하, 믿을 것은 나뿐이라…….’
누군가의 칭찬이 이리 섬뜩하게 느껴지다니…….
오늘따라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갑옷의 무게가 천근만근 무겁게 여겨졌다.
그때였다.
그의 뒤를 쫓아온 황태자의 음성이 들렸다.
“……공작.”
겨우 그곳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전장에서 사람 좀 죽였다고 그렇게 기고만장한 건가?”
“……?”
천천히 몸을 돌려서 헛소리를 늘어놓는 상대를 확인했다.
황태자는 흠집 하나 없이 반짝반짝 윤이 나는 갑옷을 걸쳤다. 피는커녕 땀도 한 방울 흘려 보지 않았을 것이다.
황태자의 푸른 눈에는 그를 향한 경멸이 짙게 배어 있었다.
지오프리는 가끔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사고방식이면 이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그의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몰고, 그 또한 수없이 죽이려고 들었던 이들이다.
‘양심이란 것이 없다는 것은 애초부터 알고 있었지만.’
과연 저들의 끝이 어디인지 알고 싶었다.
“그 고까운 눈빛은 뭐지?”
그의 적개심을 눈치챘는지 황태자는 금방 검이라도 뽑을 것처럼 굴었다. 지오프리에게는 지금 저런 애송이를 상대해 줄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조금 피곤해서 그럽니다. 따로 하실 말씀이 없으면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의 말에 황태자는 다소 엉뚱한 답을 꺼내 놓았다.
“내가 요즘 책을 많이 읽었네. 동방의 책 하나가 흥미로웠는데, 거기에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먹는다는 구절이 있더군.”
“이리 친히 책의 구절까지 들려주시니 영광입니다. 그럼 이만.”
“……그, 그러도록.”
당황하는 지오프리의 얼굴을 볼 거라고 예상했던 황태자가 오히려 허둥댔다.
‘얄팍한 속셈을 그리도 드러내지 못해서 안달이니 우습지도 않군.’
황후와 황태자는 절대 큰일을 도모할 인물이 되지 못했다.
지오프리는 새까만 밤하늘을 보면서 누군가의 안녕을 기도했다.
* * *
지오프리가 있는 전장을 찾아가는 마차 안은 조용했다. 비앙카는 내내 미오의 손을 꼭 잡은 채였고, 코로니스는 창밖만 응시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던 거리는 황량했고, 군데군데 누군가 버리고 간 것으로 보이는 짐 꾸러미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침묵을 깬 알렉세이가 미오에게 말을 걸었다.
“꼭 가야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대신 가서…….”
알렉세이의 말에 코로니스가 손톱으로 창을 두드렸다.
“내 역할을 잘 알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알렉세이는 네 개의 제국이 균형을 이루는 데 집중해 왔다. 그래서 함부로 어떤 제국의 손도 들어 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