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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110)화 (110/123)

110화 각성 그리고 그대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돌로레스가 몸을 피하자 사방에 있던 용병이 그녀를 둘러쌌다.

“공작 부인을 죽이는 자에게는 금화를 내릴 것이다.”

안전한 곳으로 대피한 돌로레스의 말에 복면을 쓴 사내들이 점점 포위망을 좁혔다.

‘……어쩌지?’

위기 때마다 구해 주던 지오프리는 여기에 없었다.

순전히 혼자의 힘으로 극복해야 했다.

그녀는 일단 침착하게 배운 것을 되짚어 보았다.

‘여러 명이 덤빌 때는 무조건 한 놈만 노리는 거야.’

“……한 놈만.”

미오는 기회를 엿보는 사내 중 하나를 정해서 단검을 푹 박아 넣었다.

“으악!”

“밟아 버려!”

그대로 미오를 넘어뜨린 자들은 그녀를 마구 짓밟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미오가 연신 비명을 질렀다.

‘이게 마지막일 줄이야…….’

이번에는 어떤 죽음을 맞이할지 궁금했는데, 참 허무했다.

“……지오프리.”

어딘가에서 검에 붉은 피를 묻히고 있을,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담는 입술이 서서히 다물어졌다. 미오가 그렇게 픽 쓰러지는 것을 본 코로니스가 대공과 눈을 맞추었다.

“빨리 끝내는 게 좋겠습니다.”

“……나도 그리하려고 했다.”

알렉세이 우르체카는 그대로 병사들에게 돌진해서 그들을 쓰러뜨렸다. 한 마리 코뿔소 같은 몸짓에 당황한 병사가 눈을 크게 떴다.

“창으로 찔러!”

창을 든 병사가 재빠르게 그의 몸을 꿰뚫으려 했으나, 창끝이 그의 몸에 닿기 전에 죄 부러졌다.

“내가 이런 야만적인 행태를 딱 싫어하는데 말이야.”

검을 휘두르며 다가오는 사내를 보면서 알렉세이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번쩍거리는 검에도 물러섬이 없던 그가 그대로 검을 맨손으로 잡았다. 피가 철철 흘렀지만, 알렉세이는 처음처럼 유쾌한 얼굴이었다.

“왜, 왜…….”

그대로 검을 쥔 사내를 멀리 던져 버린 알렉세이가 손에 묻은 피를 바지에 대충 닦았다.

“너희 같은 버러지는 동시에 덤벼도 날 못 이겨.”

이미 병사 대부분이 부상을 심하게 입어서 싸움 불능 상태가 되었다. 순식간에 정리된 상황을 지켜보던 돌로레스는 보고도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나만 건드렸으면 이만큼 화가 안 났을 건데.”

알렉세이는 어느새 코로니스가 안고 있는 작은 몸을 보면서 이를 으드득 갈았다.

“아무래도 제대로 셈을 치러야겠어.”

“이건 전부 당신들 잘못이야. 왜 공작인 척해서 날 기만했고, 왜 내 자리를 탐내는 거야.”

두려움에 뒷걸음질 치던 돌로레스가 그와 미오에게 삿대질했다. 그녀의 반응에 알렉세이는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혀를 찼다.

“지겨운 이야기야. 왜 인간은 몇백 년, 몇천 년이 지나도 항상 남 탓일까.”

알렉세이의 말에 코로니스가 날카롭게 응수했다.

“그거야 고결한 인간이라서 그러는 거 아닙니까.”

사실 이 땅에 순수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정도의 차이였으나 수인과의 결합으로 그들의 피는 하나로 섞이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어떻게든 수인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많은 것을 내어 주고, 도와주었던 수인은 인간의 날카로운 검과 세 치 혀에 희생되었다.

“좋은 생각이 났군. 이 여인을 내 성에 데려가야겠다.”

“차라리 죽이는 게 조금 더 자비를 베푸시는 게 아닐는지요.”

코로니스의 비아냥거리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알렉세이가 휘파람을 불었다.

“저, 저게 뭐야.”

들판을 가로지르고 나타난 것은 몸이 인간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종족이었다. 그들은 알렉세이의 지시를 듣더니 곧장 돌로레스의 몸에 줄을 감았다.

“이게 다 뭐 하는 짓이냐고!”

울부짖는 돌로레스가 줄에 끌려서 들판을 걷기 시작했다.

“저리 화려한 여인에게 딱 맞는 일이라 다행이다.”

이제 돌로레스 버드만은 볕이 들지 않는 지하에서 죽지도 못하고 영원히 광물을 캐야 할 것이다.

* * *

무자비하게 짓밟히면서 미오가 마지막까지 떠올렸던 것은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차가워 보이지만, 가끔 짓는 미소가 퍽 다정한 남자였다. 그는 미오에게 노래를 들려주면서 춤을 청했었다. 두 사람의 맞잡은 손은 한참 떨어질 줄 몰랐다.

〈티그리스의 푸른 물결〉.

곡의 이름이 정확하게 떠올랐다.

‘이건 패전 후 우울했던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 만든 곡이라고 해.’

‘너무 아름다워서 그런 배경이 숨어 있는 줄 몰랐는데…….’

지오프리가 그녀를 향해서 친밀한 눈빛을 건넸다.

‘내게는 바로 네가 이런 곡이야.’

‘그게 무슨…….’

‘너는 나를 살게 하니까.’

베일에 가려져 있던 얼굴은 바로 지오프리였다.

조각났던 기억의 주인공이 바로 그녀와 지오프리였다는 사실에 미오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한 번에 많은 기억이 흘러들어 와서 헛구역질이 일었다.

“……으읍.”

원작에서 어긋나기 시작한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지오프리를 짝사랑한 여우의 쓸쓸한 죽음이 아니라, 여우를 사랑한 지오프리가 처절하게 죽어 갔다.

마지막으로 죽음을 맞이했던 때 두 사람의 울음 섞인 음성이 귓가에 맴돌았다.

‘너를 기억할게.’

‘그러지 마. 지오프리.’

‘아니. 반드시 내가 너를 찾아가겠다.’

‘당신이 또다시 위험해지는 게 나는 싫어.’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네 손을 놓지 않겠다.’

은발을 손에 감은 채 그 위에 입을 맞추는 지오프리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마지막임을 직감한 미오는 울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사랑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지오프리를 향하는 그녀의 마음은 태양을 쫓는 꽃과 나무와 같았다.

‘그는 나의 전부야.’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그녀와 지오프리는 이 사랑을 기억하지 못한다. 매번 죽을 만큼 사랑했고, 두 사람은 아픈 이별을 했다. 눈을 뜨면 아픈 죽음만 기억할 것이다.

‘당신을 잃는 게 너무 두려워. 그러니 지오프리.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사랑하는 마음이 깊은 만큼.

지오프리를 아끼는 만큼.

이 사랑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를 살려야만 했다.

“……그랬어.”

어설프게 남은 원작의 기억에 무의식이 더해져서 지오프리를 밀어 내려고만 했었던 모양이다. 그를 사랑하지 않으면 모든 일이 괜찮아질 줄 알았다.

“미오! 정신이 들어?”

그때 들리는 음성에 그녀가 눈을 깜빡댔다.

“……으음.”

어느새 흘린 눈물로 축축해진 베개 위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익숙한 얼굴이 나란히 있었다.

“내가 또 죽은 건가.”

저들의 얼굴 위로 그리운 이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미오의 말에 코로니스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저리 둔해 빠진 녀석이 홀로 여기까지 살아남은 게 용하다니까.”

까마귀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그녀가 천천히 몸을 세웠다.

“어디 아픈 곳이 있으면 이야기해. 내가 봐 줄 테니까.”

다정한 비앙카의 얼굴 위로 그리운 친구가 겹쳐졌다. 미오가 손을 뻗어서 비앙카의 손을 매만졌다. 그때와 같은 따뜻하고 보드라운 감촉에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막연히 잘 살고 있으려니 생각했던 친구가 바로 그녀 옆에 있었단다.

“……사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미오의 눈을 응시하는 남자가 있었다.

“기억을 찾았나 봅니다. 미오.”

“대공 각하.”

“저런, 아직도 대공입니까?”

그녀를 향해서 희미하게 웃는 대공의 얼굴이 왠지 슬퍼 보였다. 미오는 죽어 가는 그녀를 구해 주었던 대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사슴에게 부탁해 그녀를 돌봐 주었고, 내내 먹을 것을 챙겨 준 고마운 이였다.

“……알렉세이.”

내내 부탁했지만, 한 번도 불러 주지 않은 그 이름이었다.

미오가 그의 이름을 읊조리자 대공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침대 매트리스를 짚고 일어난 미오가 곧장 그의 품에 달려들었다.

“……알렉세이. 알렉세이.”

그의 셔츠를 붙잡고 울음을 터뜨리자 알렉세이의 커다란 손이 미오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기억을 영영 되찾지 못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냥 이대로 카스피언 공작 부인으로 사랑을 듬뿍 받고 지내기를 소원했다. 과거의 기억은 하나같이 슬프고 아픈 것이라서 지우기를 원했다. 그것이 비록 오랜 친구인 그를 잊게 되는 길이라고 해도.

‘진정으로 그리 원했습니다. 미오.’

미오의 기억은 스스로 봉인한 것이라 되찾는 일은 누구도 도와줄 수 없었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죽기 전 그녀의 부탁이 있었다.

‘다음번에는 나 혼자 해 볼게요.’

숲에서 눈을 뜨더라도 아무도 도와주지 말아 달라 요청했다. 매번 반복되는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했다. 알렉세이는 감히 그녀의 청을 거부할 수 없었고, 그리하려 했다.

‘하지만 인생은 늘 제 마음대로 달려가는 법이더군요.’

알렉세이의 품에서 고개를 뗀 미오가 활짝 웃었다.

“내가 도와주지 말라고 했잖아요.”

“저는 결백합니다. 진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공작이 찾아온 겁니다.”

알렉세이의 말에 비앙카와 코로니스 역시 고개를 끄덕댔다. 그러고 보면 그들이 먼저 미오의 앞에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 우리, 남은 이야기는 우르체카의 고풍스러운 성에서 나누는 게 어떨까요.”

챙겨 온 두툼한 망토를 미오의 어깨에 걸쳐 주면서 알렉세이가 자연스레 그녀를 밖으로 이끌려고 했다.

“……지오프리, 그를 홀로 두고 갈 수는 없어요.”

“그러면 뭐 어쩌시려고요?”

삐딱한 음성이 창가에서 날아들었고, 미오가 코로니스를 쏘아봤다.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게 운명이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게―.”

“당신, 지오프리의 수하가 아닌가요?”

긴 한숨을 내쉰 코로니스가 창을 등지더니 우울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비앙카와 알렉세이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 줄 것을 청했다.

“코로니스, 당신이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은 알지만…….”

모든 것을 떠올린 지금 이대로 떠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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