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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109)화 (109/123)

109화 모두가 죽는다

이제 죽겠구나 싶었던 그때 한 줄기 빛이 하늘에서 내려오는가 싶더니 누군가 그를 구해 주었다. 투구 위 문양으로 그는 상대가 카스피언 공작임을 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손이 벌벌 떨리는데 그것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소문의 그 공작을 만나서인지 알 수 없었다. 카스피언 공작은 답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를 떠났고, 사무엘은 전투를 거듭하는 동안 공작을 쫓아다녔다. 처음에는 호기심 반, 감사하는 마음 반이었다.

자비 없는 공작의 검에 숱한 적이 죽어 갔다.

카스피언 공작은 소문처럼 피에 굶주린 미치광이가 아니었다. 그는 아군을 보호했고,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성가시니까 저리 가라.’

공작은 처음에 그를 무척 귀찮아했지만, 사무엘은 포기하지 않았다.

‘존경할 만한 주군을 모시는 것이야말로 멋진 일이지.’

삶의 목표를 정한 사무엘은 그렇게 지오프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사무엘 베일, 어설픈 검술에서 좀 벗어났다고 지금 내게 도전하는 건가.”

투구에 튄 피를 손수 닦던 공작의 말에 사무엘이 얼른 가서 그의 투구를 받아 들었다.

“감히 제가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다른 자들에게도 기회를 한번 주면 어떨까 하는 말입니다. 예전에 못나고 쓸모없는 제게 그러셨던 것처럼요.”

입김을 불어 가면서 투구를 닦는 사무엘을 보던 지오프리가 간이침대에 벌렁 누웠다.

“어딜 봐서 네가 쓸모가 없지?”

주군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사무엘이 헛기침했다.

“칭찬을 자주 해 주시니 좋긴 한데, 기분이 이상합니다.”

자꾸 그의 주군이 아닌 것만 같았다.

‘결혼이란 것이 이리도 사람을 바꿀 수 있는 건가?’

사무엘이 고개를 갸웃대는데 지오프리가 눈을 감으면서 중얼댔다.

“헛소리는 그 정도만 하고 나가서 따뜻한 물이나 좀 구해 오도록.”

“네. 다녀오겠습니다.”

모두가 나간 막사가 조용해지자 그제야 지오프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격전지로 나를 보내다니…….’

황제의 서신에는 지오프리를 가장 신임하기에 제국의 미래를 그에게 맡긴다고 적혀 있었다.

“……개소리.”

아버지를 향한 원망은 이미 흘러넘쳐서 더는 원망할 수도 없었다. 황후와 황태자에 대한 증오도 마찬가지였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밤 그를 버티게 해 주는 것은 단 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제국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고, 황제의 명에 따르는 것도 아니다.”

그가 휘두르는 검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보고 싶다.”

피가 잔뜩 밴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는 지오프리의 얼굴에 그리움과 긴장이 교차했다. 사상자의 신음과 풀벌레 소리가 뒤섞인 혼란의 밤이었다.

* * *

카스피언 공작 성을 뒤로하고 마차에 오른 미오의 얼굴이 잔뜩 굳었다.

“공작 부인,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옆에 앉은 비앙카가 그녀를 살뜰히 챙겨 주었다. 하지만 비앙카의 노력에도 미오의 마음은 좀처럼 편해지지 않았다. 사방에서 카스피언 제국을 노리는 적이 쳐들어왔고, 지오프리는 다시 검을 들었다.

‘저희는 이곳을 지키고 있을 테니 다녀오세요.’

로렌과 집사에게도 함께 갈 것을 청해 봤지만, 그들의 뜻은 완강했다.

‘이곳은 저희가 하루라도 쓸고 닦지 않으면 당장 녹슨 검처럼 될 겁니다.’

‘여행을 다녀온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인님은 분명히 무사하게 돌아오실 테고, 마님도 그러실 거니까요.’

로렌과 집사의 인사를 곱씹던 미오가 창밖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지오프리와 보냈던 달콤한 시간이 턱없이 짧았다. 언젠가부터 그녀를 좀먹어 왔던 불안증은 점점 심해져서 심장이 너무 느리게도 빠르게도 뛰었다.

“안색이 창백하세요. 맥도 느리고…….”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비앙카.”

“그런 말 말아요. 지금은 누구나 다 비슷한 감정일 테니까.”

하지만 건너편에 나란히 앉은 우르체카 대공과 코로니스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코로니스, 내년에 내 운수가 좀 어떤가.”

“저는 그런 시답잖은 것을 보는 점성술사가 아닙니다만.”

“가만 보면 자네는 공작과 퍽 닮은 구석이 많아.”

“그런 이야기는 생전 처음 듣습니다.”

뛰어난 사교성으로 누구에게나 환영받는 대공도 코로니스만큼은 극복하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냉랭하면서도 묘하게 꼬인 코로니스는 상대가 대공이든 공작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대공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고, 마차 안에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때 미오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코로니스, 이 전쟁의 끝도 알 수 있나요.”

사실 그녀가 알고 싶은 것은 이것 하나였다.

카스피언이 승리를 쟁취하는가.

아니, 지오프리가 무사히 그녀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는가.

“글쎄요. 그건 뭐라고 단정을 지어서 말하기가 어려운 부분이라…….”

그녀의 질문에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매만지기 시작한 코로니스가 잠시 눈을 감았다.

‘뭐야. 저 불길한 느낌은!’

오색찬란한 반지를 바라보던 미오가 다시 깨질 듯한 두통을 느끼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찰나, 갑자기 마차 앞에서 소란이 일었다. 미오는 일전에 도르프로 향하던 길에 마차에 치일 뻔했던 짐승의 일을 떠올리고는 그런 일이려니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호위 무사의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공 각하! 기습입니다!”

“……!”

놀란 미오가 창밖을 내다보려고 하자 대공이 먼저 그녀를 막았다.

“창에서 떨어지는 게 좋아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을 친친 감은 돌이 마차의 창을 깨고 안으로 날아들었다.

“우르체카 대공의 마차를 기습할 만큼 대범한 자가 있었던가.”

갑작스러운 일에도 전혀 동요함 없이 대공이 중얼대자 코로니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누가 들으면 뭐, 네 개의 제국이라도 쥐락펴락하는 줄 알겠습니다.”

“코로니스! 지금 그런 말싸움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게다가 비앙카는 아직 요양 중이었다.

“비앙카, 괜찮아요?”

“저는 괜찮아요. 그냥 조금 어지러워서 그래요.”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이제 마차를 에워싸고는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비앙카를 감싸 안은 미오가 마차 안 손잡이를 꽉 붙들었다.

“정말 누가 이런 짓을…….”

가뜩이나 마음이 어수선한데 불행은 정말 홀로 오는 법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만하고 다들 끌어내!”

누군가의 지시에 마차의 문이 뜯겼고, 네 사람은 곧장 바닥에 나뒹굴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우르체카 대공은 구겨진 옷을 펴면서 우아함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자, 이제 주인공의 얼굴을 한번 보여 주시겠습니까?”

대공의 말에 그들의 마차를 습격한 수십 명도 넘는 용병이 비켜섰다. 그리고 그들 사이를 가르고 나타난 얼굴은 전혀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돌로레스 버드만?”

미오는 도무지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서 눈만 뛰룩댔다. 돌로레스는 후작가의 영애이고, 여기에는 우르체카 대공과 그녀가 있었다.

“어째서 이런 일을…….”

미오의 혼잣말을 들은 돌로레스가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활짝 웃었다.

“이렇게 내가 마련한 조촐한 연회에 참석해 줘서 고마워요.”

“버드만 후작 영애, 내가 지금 연회를 즐길 기분이 아닙니다만.”

싱글벙글 웃던 대공이 돌로레스에게 말을 건넸다.

그 모습에 미오는 그제야 대공과 지오프리가 친구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두 사람 모두 일반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할 눈치라는 게 전혀 없는 게 확실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웃는 게 말이 되냐고.’

황당한 일이기는 했지만, 저렇게 무시무시한 사내들을 거느리고 나타났을 때는 필시 좋은 일이 아니리라.

“……하.”

의자에서 일어나 대공 앞에 선 돌로레스가 가죽 장갑을 쥐더니 그의 뺨에 세게 쳤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대공이 한쪽 뺨을 움켜쥐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감히 나를 능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돌로레스는 지금 카스피언의 전쟁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히려 이 혼란을 틈타서 복수를 도모하고자 했다. 목표는 그녀를 속인 우르체카 대공과 카스피언 공작 부인이었다.

“카스피언 공작은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갔는데, 대공과 눈이 맞아서 달아나는 꼴이 정말 혼자 보기 아깝군요.”

“아무래도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비앙카는 이 사태를 수습해 보려고 중간에 나서서 고개를 조아렸다.

“당신은 또 뭔가요?”

돌로레스가 날카로운 구두 뒷굽으로 비앙카의 배를 찼다.

“내가 말 시키지 않았으니까 저리로 꺼져 있어요.”

“……비앙카!”

놀란 미오는 흙 묻은 드레스를 털 생각도 못 하고 몸을 벌벌 떨었다. 풀썩 쓰러진 비앙카를 일으키고 싶었지만, 창을 겨눈 병사가 그녀를 노리고 있어서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한낱 수도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죠.”

코로니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혼자 살려고 그들을 모른 척하고 있었다. 미오는 뺨을 부여잡고 넋이 나가 버린 대공과 쓰러진 비앙카, 고개를 돌린 코로니스를 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돌로레스의 말이 전부 틀린 것은 아니야.’

마음이 내내 불편했던 것은 험한 곳에 그를 홀로 두고 왔기 때문이다.

‘도움이 될지 안 될지를 따져 보는 것부터가 정말 이기적이지 뭐야.’

뭐라도 해서 그를 도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미오를 바라보던 돌로레스가 소맷단에 묻은 흙을 툭툭 떨었다.

“그렇게 노려보면 당신이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나요?”

“지금 당신을 이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죠?”

“말은 참 쉽죠. 하지만 지금 상황을 봐요.”

“잘 모르는 건 그쪽인 것 같은데, 저분은 우르체카 대공이시고, 나는 카스피언 공작 부인이에요.”

그녀의 소개에 무기를 쥔 용병이 낄낄거렸고, 돌로레스는 부채를 꺼내 부쳤다.

“누가 당신 같은 사람을 공작 부인으로 인정해 준다고 했어요?”

“당신의 인정 따위 내 쪽에서 사양이야.”

미오는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빼 들고 곧장 돌로레스를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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