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108)화 (108/123)

108화 전장의 피바람이 불고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적의 침입에 황제는 지오프리에게 출정을 명했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자 지오프리는 공국으로 돌아가는 우르체카 대공에게 미오를 부탁하기로 했다.

“여기에 있으면 위험할지도 모르니 잠시 가 있어.”

“……하지만.”

“마님께서 무사하셔야 나리께서도 힘을 내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집사의 조용한 설득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절대로 카스피언 공작 성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출정 채비를 마친 지오프리가 갑옷을 입고 나타났다.

“대공 각하, 제 아내를 잘 부탁합니다.”

“그대의 아내이기 전에 나의 소중한 동생이니 염려할 것은 없네만.”

방금까지 사랑을 속삭이던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공작님.”

갑옷을 입고 투구를 든 지오프리의 모습이 낯설어서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저 번쩍이는 투구 위로 다시 붉은 피가 흘러내릴 것이다.

“그대를 위해서라도 나는 다치지 않을 거야.”

미오와 눈을 맞춘 지오프리의 말에 곁에 서 있던 알렉세이가 캑캑댔다.

“맙소사, 내가 알던 공작은 어디 갔기에 이런 낭만적인 대사를 읊는 건가.”

“모두 곧 만나지.”

지오프리가 몸을 돌렸다. 그를 수행할 사무엘이 비장한 표정을 한 채 성의 식구들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미오, 괜찮을 겁니다. 공작은 무시무시한 소문을 몰고 다니는 만큼 실력도 굉장하니까…….”

미오는 그가 사람을 죽이던 때를 떠올리면서 울음을 참았다. 그는 밤하늘을 노니는 새처럼, 한 줄기 바람처럼 그렇게 검을 썼다.

‘분명 지지 않고 내 곁으로 돌아올 거야.’

그것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지금 헤어지는 것이 싫었다.

“……지오프리.”

이제 말에 올라타려는 그를 향해서 있는 힘을 다해서 달렸다. 미오가 뒤에서 그의 허리를 세게 부둥켜안았다.

“다녀와요.”

“그래.”

투구 속에 감추어진 그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 * *

갑작스러운 적의 침입 소식에 카스피언 곳곳에서 절망의 신음이 흘렀다. 천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전쟁은 수없이 있었지만, 이렇게 동시에 쳐들어오는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침입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탓에 제국 전체는 혼란 그 자체였다.

“척박한 땅에 뭘 뺏을 게 있다고 저 난리들인지…….”

남쪽으로 피난 가려고 짐을 꾸리는 여인의 말에 남편이 핀잔을 주었다.

“세상 물정에 그리 어두워서야. 네 개의 제국 중에 가장 많은 광물이 있는 곳이 카스피언 제국이지.”

무역과 농사를 백날 해 봐야 번쩍이는 금덩이를 이길 수는 없을 터.

“그것들이 점잖은 척하더니 이제야 본색을 드러낸 것이지.”

“도르프로 가는 게 맞는지 모르겠네요.”

부인의 말에 남편은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서쪽 에카라오는 무법천지라고 했고, 키에프는 이곳보다 춥다고 해서 그저 따뜻한 곳이 낫지 않나 해서 결정한 피난처였다. 도르프에 간다고 해도 친척이나 친구 하나 없기에 고생길이 훤했다.

“애들 데리고 얼른 출발해. 나는 여기 남아서 힘을 보태야 하니까.”

“아빠랑 헤어지기 싫어!”

어린아이가 아비의 다리에 매달려서 울음을 터뜨렸다. 전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집 안의 무거운 분위기만으로도 그게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우는 아이를 번쩍 안아 들고 눈을 마주쳤다.

“아비는 맞서 싸울 거란다.”

집을 버리고 달아나는 이도 있었고, 귀족이 이끄는 부대에 자원하는 이도 있었다.

“당신이 뭘 어쩐다고 그래요.”

광부인 남자는 평생 싸우는 일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그는 아이를 아내에게 건네면서 씩씩하게 대꾸했다.

“카스피언 공작님이 이끄는 부대에 합류할 거야.”

“……아.”

“분명 우리가 이길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피해.”

연기가 나지 않는 작은 굴뚝이 달린 집 대부분의 사정이 이러하였다.

카트리나 황후와 베일 백작의 은밀한 만남이 이루어졌다. 갑작스러운 전쟁과 사업 문제로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요.”

“그게, 일이 죄다 꼬여 버렸습니다.”

난처한 표정의 백작이 도르프에서 하던 노예 사업에 커다란 지장이 생겼다는 것을 알렸다.

카스피언에서 노예를 금지하자, 도르프인을 고용해서 그곳에서 사업을 크게 벌였다. 외부에서는 단순한 무역 사업처럼 보일 수 있게 삼엄한 경계를 지시했다.

“아실 겁니다. 얼마나 실력 좋은 용병을 고용했는지.”

용병에게 내어 주는 비용과 그곳 시설을 관리하고, 새로운 노예를 사들이는 데는 막대한 자금이 들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웬 사내가 침입해서 그들의 노예와 수인을 죄다 풀어 주고, 그들이 고용한 용병을 모두 죽였단다.

“손해가 말도 못 합니다.”

사업으로 급성장한 부였기에 큰일을 겪자 타격이 엄청났다.

“그게 전쟁하고 무슨 상관인가요.”

황제 몰래 베일 백작과 손을 잡고 벌인 일이라서 카트리나의 음성이 초조하기만 했다.

“그쪽에 남은 이들이 우리 쪽을 의심하면서 일이 어그러졌습니다. 저도 아직 정보를 취합하는 중이라…….”

며칠 만에 눈 밑이 푹 꺼진 베일 백작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뛰어난 사업 수단과는 달리 대범함은 없는 사내였다. 갑작스레 밀려드는 일이 도무지 감당되지 않았다.

“에카라오의 무법자와 도르프의 해적이 손을 잡은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광산은 어찌 되는 겁니까.”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죠.”

어떻게 모은 재산이며 얼마나 많은 피를 손에 묻히고 올라선 자리인데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많은 피를 흘리더라도 지켜 내야겠지요.”

카트리나 황후는 지오프리를 증오하지만, 그의 실력만큼은 높이 샀다.

“격전지에 카스피언 공작을 세웠으니 이길 수 있을 겁니다. 백작은 가서 광산의 경비나 똑바로 살피도록 해요.”

“소신은 황후 폐하만 믿겠습니다.”

베일 백작이 사라진 마차 안, 카트리나가 손가락을 강하게 꺾었다.

“저런 모자란 것을 믿고 돈을 불리겠다고 했으니…….”

재산도 재산이지만, 사방에서 밀려드는 적부터 막아 내야 했다.

“이런 때에 벤은 또 어디에 처박혀 있는 거야.”

군사를 이끌고 위기를 돌파하고 평정해야 황제로 즉위했을 때 자연스레 민심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일단 지오프리가 있으니까.”

지오프리가 선두에 서서 적과 상대하고 있는 동안 때를 기다릴 것이다. 그가 지쳐서 쓰러질 때쯤 벤이 나타나서 남은 적을 소탕한다. 그리하면 적과 지오프리를 한 번에 보내 버릴 수 있다. 다르게 생각하면 전쟁도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거든.”

카트리나는 위기 속에서도 침착을 잊지 않으려고 애썼다.

“궁으로 돌아간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몹시도 일그러졌다.

* * *

카스피언 제국 남단의 격전지 상황은 심각했다.

언뜻 보면 금방이라도 카스피언군이 밀릴 것 같았다.

“사무엘! 당장 합류한다!”

지오프리는 보고를 받기도 전에 일단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함께 섞일 것 같지 않은 타 제국의 병사가 같은 깃발 아래 서서 카스피언 제국을 짓밟고 있었다.

“디아나 여신의 가호를!”

카스피언 공작의 합류로 사기가 높아진 병사들의 기합 소리가 사방에 쩌렁쩌렁 울렸다.

몇 시간이나 검을 휘둘렀을까.

주변에 어둠이 내렸고, 싸움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급하게 마련된 막사에 들어가자 다른 귀족과 장군이 그를 향해서 고개를 숙였다. 그들 대부분은 지오프리 카스피언이 전장에서 직접 싸우는 것을 오늘 처음 보았다. 그들은 열세로 밀리던 병사들이 공작의 등장으로 힘을 얻는 것을 목격했다.

“알펜시아 가문은 오늘 공작님과 함께 싸울 수 있어서 큰 영광입니다.”

몸집이 커다란 사내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자, 다른 귀족이 차례대로 존경을 표했다. 지오프리 카스피언은 뛰어난 무사라고 표현하기도 부족했다. 그의 검은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겨울바람처럼 매서웠다.

“아까 공작님의 기세에 밀려 적들이 후퇴하는데 어찌나 통쾌하던지.”

누군가 가벼운 농담을 건넸으나, 지오프리는 그들의 존경이나 농담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탁자에 펼쳐진 지도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핀으로 몇 곳을 표시했다.

“동이 트기 전 이곳들을 먼저 칩니다.”

전쟁은 오래 끌수록 피해자만 늘어났다.

게다가 지금은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때라서 더욱더 빨리 끝내야만 했다.

“아, 역시…….”

그들이 오늘 전투의 승리에 취해 있을 때 지오프리는 내일 작전에 대해서 고민 중이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존경의 눈빛이 오갔다.

“공작님. 조금만 덜 딱딱하게 대해 주시면 어떨까요.”

모두가 물러간 막사 안, 간이 난로를 지피던 사무엘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그는 몇 년간 주군의 곁을 지키면서 공작이 속은 따뜻한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나 같은 이를 참아 주시지 못했을 거야.’

사무엘 베일은 가난한 자작가의 차남으로 부친에게 뭔가 받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학문이 뛰어나서 학자가 될 수도 없었고, 믿음도 고만고만해서 수도사가 되기에도 무리였다. 어릴 때부터 배운 검술 하나만 믿고 기사가 되기로 했는데, 그것 역시 녹록잖았다.

‘저도 귀족이라고 꼴값을 떠네.’

가난한 귀족은 부유한 상인보다 취급받지 못하는 시대였다. 주변의 동료들은 사무엘을 놀려 대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작은 전투에 투입된 사무엘은 죽기 살기로 싸웠다.

‘나도 인정받을 거야.’

쓸모없는 자작가의 차남이 아니라, 한 명의 전사로서 말이다. 하지만 넘치는 의욕과는 달리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잠시 틈을 보이는 사이 적이 그의 등에다 검을 꽂으려고 했다.

‘……앗.’

그것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