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불행은 결코 홀로 오는 법이 없다
코로니스와 헤어진 후 침실로 돌아와서 씻는데 미오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뭔가 놓치고 있는 기분이야.’
지오프리와 결혼했고, 이제 더는 언제 여우로 변할지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한참 더운물에 물을 담그고 있던 미오는 생각을 정리하려고 서재를 찾았다. 그녀를 괴롭히던 고민 대부분이 사라졌는데, 이렇게 불안한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코로니스, 비앙카.”
수인은 그녀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아는 수인이 많이 생겼다. 게다가 코로니스는 예전에 알던 사이였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대기 시작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까마귀, 사슴, 곰…….”
홀로 중얼대는데 서재의 문이 삐걱 소리를 냈다.
“집사?”
탁자 위에 불만 밝히고 있어서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이제 내가 집사한테까지 밀리는 건가. 영 실망인데.”
“아, 당신이군요.”
젖은 머리를 한 채 나타난 것은 지오프리였다. 검은 비로드 가운을 걸친 그가 그녀를 보자 인상을 썼다.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 않으면 감기에 걸린다고 했는데…….”
그는 의자 뒤에 서서 천천히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닦아 주었다.
“나는 괜찮은데…….”
물기를 하나도 닦지 않은 건 그녀가 아니었다.
“자, 이제 날 닦아 주겠어?”
그녀의 옆에 앉은 지오프리가 수건을 쓱 내밀었다. 일어난 미오가 이미 젖은 수건으로 그의 머리를 닦아 주었다. 그녀에게 완전히 몸을 맡긴 지오프리는 눈을 꼭 감은 채였다.
“대공 각하랑 이야기는 잘 끝났나요?”
“그는 곧 돌아가기로 했어.”
지오프리의 말에 미오가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아쉽게 되었네요.”
“뭐가 아쉽지?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우르체카 공국인데? 설마 그와 헤어지는 게 싫은 건가?”
“그게, 대공 각하가 제게 잘해 주셨거든요. 편하기도 하고, 재미도 있고―.”
미오는 말하다 말고 잔뜩 굳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 입을 다물었다.
“나는 질투라는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는데…….”
미오를 알게 된 후부터 그는 종종 강한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그녀에게 춤을 가르쳐 주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젊은 남자에게 그러했다. 사무엘이나 우르체카 대공에게도 그런 감정을 느껴야 했다.
고개를 홱 젖힌 지오프리가 서늘한 눈빛으로 중얼댔다.
“이러다가 내가 대공을 죽여 버릴지도 모르겠군.”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지오프리를 보면서 미오가 펄쩍 뛰었다.
“카스피언 공작님. 분명 살인귀 같은 건 아니라고 했잖아요.”
정원과 온실에 시체를 남몰래 파묻는다고 오해했던 때가 있었다. 그의 손에 묻은 붉은 것이 피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웬걸, 지오프리는 손수 꽃을 심고 가꾸는 것에 불과했다.
그녀의 말에 지오프리가 희미하게 웃었다.
“내 소문이 전부 거짓말은 아닐 텐데?”
“나를 자꾸 놀리지 말아요.”
장난을 치는 게 얄미워서 그의 귀를 조금 잡아당겼다. 그러자 서로의 얼굴이 곧 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입가를 스치는 달뜬 숨이 그녀의 가슴을 간지럽혔다.
“우리 재미있는 책을 좀 찾아보는 건 어때요. 여기에 책이 무척 많아요.”
뒤로 물러선 미오가 횡설수설하자 지오프리가 손을 뻗어서 그녀의 볼을 감쌌다.
“달아나지 마.”
그의 달콤한 속삭임에 미오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고, 지오프리의 붉은 입술이 곧 그녀의 것을 뒤덮었다. 의자가 삐걱대더니 탁자 위에 켜 둔 촛불이 거친 몸짓에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흔들렸다.
* * *
사흘 전부터 변방에서 심상찮은 소식이 들려왔다. 고용인들은 눈만 마주치면 전부 그 이야기를 해 댔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그게 사실이래?”
“벌써 국경선 근처까지 온 것 같던데, 그게 도르프 해적이라는 소문도 있고…….”
“해적이 여기까지 무슨 수로 와. 내가 듣기로는 에카라오의 무법자들이라고 하던데.”
“아니, 저번에 공작님이 소탕했던 잔당이 다시 쳐들어왔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출몰한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카스피언 제국에 퍼졌다.
“전쟁은 도대체 왜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옆에서 자수를 놓던 로렌이 버럭 성질을 부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야 카스피언가에 평화가 찾아왔다 싶었기에 이런 소식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쳐들어온 놈이나 맞서 싸우는 놈이나 어차피 다 피를 흘리지 않습니까.”
“……그러게요.”
불안한 마음은 미오도 마찬가지라서 애꿎은 손가락 끝만 튕기고 있었다.
‘어쩐지 너무 행복했어.’
아침에 눈을 뜨면 지금의 행복이 모두 꿈일까 봐 겁이 났다. 그래서 눈을 뜨는 게 두려웠는데, 그녀를 꼭 안은 채 잠든 지오프리를 보면 안심할 수 있었다. 서로 마음을 확인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전쟁이란 말인가.
“또 우리 공작님을 불러 대지는 않겠죠. 그건 정말 인간이 할 짓이 아닌데 말입니다.”
로렌은 한숨을 내쉬더니 손에 쥐고 있던 것을 팽개쳤다.
“이럴 게 아니라 나가서 무슨 소식은 없는지 알아봐야겠습니다.”
무서운 얼굴을 한 로렌이 나가자 미오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깍깍.
하늘을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시꺼먼 까마귀 떼까지 미오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괜찮겠지?”
혼잣말하는데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지오프리가 미오의 몸을 안았다.
“이제 까마귀까지 죄다 죽여 버리고 싶어지는군.”
창밖의 까마귀를 응시하는 미오가 퍽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이거 놔줘요. 로렌이 언제 들어올지도 모르는데…….”
등 뒤에서 팔을 두른 지오프리에게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역시나 헛수고였다.
“늘 달아날 기회만 노리고 있는 것 같군.”
그는 뒤끝이 굉장히 긴 남자였다.
한번 달아났던 것을 평생 잊지 않을 작정인지 걸핏하면 언급했다.
“그게 아니라, 공작님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지켜 드리려고―.”
“변명처럼 들린다고 하면 화를 낼 건가? 나는 그대만 있으면 되는데…….”
미오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그가 달콤하게 중얼댔다. 그녀는 허리에 감긴 지오프리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 소문이 진짜일까요.”
“……아마도.”
지오프리는 작은 손이 주는 온기를 느끼면서 눈을 살포시 감았다.
그는 어머니의 복수를 할 작정이었다.
황제와 황후, 황태자에 대한 증오심으로 지난 몇 년을 보냈다.
하지만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가 카스피언 제국에 붉은 비를 뿌리려던 마음을 접자, 전쟁이 터졌다. 인생은 뜻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다지만 이만큼 기막힌 일이 또 있을까 싶었다.
‘나, 지오프리 카스피언은 운명 따위를 넘어서겠다.’
다시 눈을 뜬 그의 얼굴에 결연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아무 걱정 할 필요 없어. 누가 오든 내가 그대를 지켜 줄 테니까.”
복수를 위한 검이 아니라 누군가를 지키는 검을 쥘 때였다.
“전쟁에 나갈 건 아니죠?”
덜컥 두려워진 미오가 몸을 돌려서 그를 올려다봤다.
그녀가 숲에서 지오프리를 처음 만났을 때, 그때 그는 변방에서 몇 년을 싸우다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나간다는 거예요. 게다가 몸도 아직 낫지 않았고…….”
우르체카 대공이 했던 불길한 말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어서 미오가 말꼬리를 흐렸다.
“나는 안 죽어. 미오.”
“하지만 대공 각하가―.”
“그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나는…….”
아팠던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란 말을 하기도 전에 미오가 서둘러 그의 셔츠를 헤집었다.
“어디 한번 봐요.”
벽까지 밀린 지오프리의 셔츠 한쪽 어깨가 벗겨졌고, 까치발을 한 미오가 그의 상처를 살폈다. 지오프리는 그의 가슴과 어깨에 닿은 작은 손의 감촉에 몸을 움찔거렸다.
“……이러면 좀 곤란해지는데.”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미오는 막무가내였다.
“상처는 잘 아물고 있지만, 그래도 안심하기는 이르잖아요.”
그는 아직 기침할 때면 피를 쏟았고, 예전에는 약도 자주 먹었다.
“허리가 조금 아픈 것도 같고…….”
“허리가요?”
놀란 그녀가 얼른 셔츠의 반을 벗겨 낸 후 그의 허리를 더듬댔다.
“괜찮아 보이는데요?”
“끙.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처가 진짜 심각하다더군.”
“그럼 이럴 게 아니라 당장 의원을 불러야죠.”
가뜩이나 전쟁이니 뭐니 해서 불안한데, 지오프리가 아프다고 하자 그녀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급하게 나가려고 하는데 그가 미오의 손목을 붙들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의원이 아니야.”
깊이 잠긴 음성에 그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마음을 밝힌 이후 지오프리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렇게 고백을 했다.
“로렌이 금방 올 거예요.”
그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미오가 더듬더듬 입을 뗐다.
“로렌만 안 오면 괜찮다는 거지?”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나 어젯밤에도 제대로 못 자서 지금 너무 피곤해요.”
짐승 같은, 아니 짐승 남편 지오프리는 해만 지면 그녀를 품고서 놔주지 않았다. 예전엔 힘든 사랑 때문에 숱하게 불면의 밤을 보냈다고 하면, 지금은 격렬한 사랑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 로렌이 문제야?’
지금 상황이 이렇게 뒤숭숭한데 이 남자는 왜 이렇게 짐승처럼 구는 건지.
“그러니까 날 놔줘요.”
“괜찮아. 내가 아까 2층에 아무도 올라오지 말라고 했어.”
“……네?”
그러니까 이 환한 낮에 ‘2층 출입 금지’를 명했다는 건가. 지오프리의 말에 목까지 달아올라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그게 뭐가 중요하지?”
손목을 확 잡아당기자 미오는 순식간에 그의 품에 안겼다. 셔츠를 반쯤 벗고 있어서 그녀의 볼이 지오프리의 맨가슴에 닿았다. 그의 전신에 열기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난 고열에 시달리는 환자니까, 얼른 치료해 줘.”
“……진짜.”
입술을 짓이기던 그녀가 고개를 쳐들자 붉은 기운이 넘실대는 지오프리의 눈에 빠져들었다. 피부를 타고 전해지는 그의 심장 박동에 아까까지 불안했던 기분이 조금씩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함께 있으면 뭐든 다 괜찮아.”
가벼운 입맞춤을 퍼붓던 지오프리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으음.”
살포시 눈을 감은 미오가 손을 뻗어서 그의 단단한 목을 감싸 안았다. 그의 말처럼 지금만큼은 어떤 것도 그들을 방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