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봉인된 기억의 조각
공작 부부가 돌아온 후 저녁 식탁이 풍성했다. 케이는 온갖 솜씨를 발휘해서 예술적인 요리를 선보였다.
“이제야 성에 온기도 좀 느껴지고 그렇네요. 사람 사는 곳 같아서 너무 좋아요. 안 그래요. 집사 양반?”
로렌은 연신 싱글벙글하였고, 알프레드는 내내 흐뭇한 미소만 띠고 있었다.
“사무엘, 정리해 둔 서류는 잘 봤다. 고생했다.”
“지금 칭찬해 주신 겁니까?”
지오프리의 짧은 칭찬에 곁에 서 있던 사무엘의 입이 귀에 걸렸다.
“사무엘, 자리에 가서 식사를 들도록.”
“네. 감사합니다.”
미오의 왼쪽에는 지오프리가, 오른편에는 대공이 앉아 있었다. 듣기로는 지오프리의 일을 대공이 대부분 처리해 줬단다. 그런데 지오프리와 대공은 시선을 나누기는커녕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이 사람들은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알렉세이를 돌아본 미오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대공 각하, 저희가 없는 동안 고생 많이 하셨다면서요.”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던 미오가 감사를 전하자 대공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일은 힘들었지만, 저의 빼어난 능력으로 잘 처리할 수 있었답니다.”
“역시 멋지세요. 각하.”
“이런 대화, 너무 그리웠습니다. 미오.”
“……아.”
여행 중에도 그녀를 따라다니면서 산책하러 가자고 노래해 대던 대공 생각이 가끔 났다. 그를 생각하면 웃음이 났고, 마음이 편해졌으니까.
“……흠흠. 부인.”
“……네?”
지오프리가 그녀를 불러서 고개를 돌리자, 타오를 듯한 시선이 대공이 잡은 그녀의 손에 닿았다.
“아무래도 특약으로 몇 가지 더 추가해야 할 것 같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미오가 의아한 눈을 하자, 대공이 더욱더 세차게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아! 낭만을 모르는 사내가 무슨 사랑을 알겠습니까? 안 그래요? 사랑에 무슨 조건이 필요합니까? 언제라도 힘든 일이 생기면 이 알렉세이에게 이야기해요. 내가 명색이 그대의 오빠니까.”
‘오빠’라는 단어에 특히 힘을 준 알렉세이의 말에 지오프리가 콧방귀를 뀌었다.
“속이 거북해지는군요. 대공 각하.”
“그렇다면 먼저 자리 뜨는 것을 허락해 주겠습니다. 나와 미오는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말입니다.”
성의 주인인 지오프리에게 꺼지라는 식으로 얘기하자,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더욱더 험악해졌다.
그때였다.
“손님이 드셨습니다.”
코로니스와 비앙카가 나란히 식당에 모습을 드러내자 알렉세이 우르체카는 미오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공작님과 대공 각하를 뵙습니다.”
사무엘이 놀란 얼굴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자, 공작이 오랜 친구라고 그들을 소개했다.
“아, 그렇군요. 어서 오십시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저를 불러 주시면 됩니다.”
식탁의 끄트머리에 자리한 두 사람은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미오는 이 묘한 조합을 둘러보면서 긴 한숨을 쉬었다.
‘이 식탁에는 전부 여덟 명이 있는데, 절반은 수인이야.’
로렌이 알게 되면 그대로 기절할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자꾸만 누군가에게 닿았다.
‘……코로니스는 저런 모습이었구나.’
숲에서 지낼 때는 사람으로 변할 줄 몰라서 내내 여우의 모습으로 지냈다. 그리고 다른 수인도 사람으로 변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그들의 얼굴은 몰랐다. 흘끗대는 시선을 눈치챘는지 코로니스가 미오 쪽을 쳐다봤다.
‘뭐야. 저 기분 나쁜 웃음은!’
코로니스가 그녀를 향해서 씩 웃고 있었다. 얼른 고개를 돌렸지만, 미오의 기분은 좀처럼 편안해지지 않았다.
* * *
카트리나 황후의 고운 얼굴에 무시무시한 기운이 서렸다. 들고 있던 서류를 쫙쫙 찢어서 집어 던지는데, 주변의 하녀들이 벌벌 떨었다. 어떻게든 노여움을 좀 달래지 않으면 모진 매가 날아들 것이다. 눈치를 살피던 하녀 하나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황후 폐하, 차를 올리겠습니다.”
“……차?”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황후가 고운 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이 답답한 속은 차로는 해결이 되지 않을 성싶구나. 베일 백작가에 사람을 보내서 내가 급히 보자고 전하라.”
“분부 받잡겠습니다.”
하녀들은 혹여 불똥이라도 튈까 봐 연신 굽실댔다.
이런 상황은 꿈도 꾸지 않았었다.
아가타 황후를 밀어내고 이 자리에 앉았을 때만 해도 세상을 모두 가졌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도 그리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데다, 재산은 날로 증식했다.
모르기는 해도 이 카스피언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여인이 바로 그녀일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이 모양이 된 거지.”
차기 황제가 될 아들은 날이 갈수록 삐뚤어지더니 급기야 얼마 전부터 연락이 끊어졌다.
게다가 그녀와 동업 관계에 있는 베일 백작가의 사업에 차질이 생겼다는 서신을 받았다.
‘라비니아의 일로 신망을 잃은 때에 이런 일까지 겹치다니.’
라비니아에게 지오프리와의 결혼을 약속했지만, 그것을 지킬 수 없었다. 눈치 없는 황제가 버드만 후작에게 지오프리를 내줘 버렸다.
“그 악귀 같은 것을 데리고 가서 뭐에 쓰려고 다들 목을 매는 건지.”
들고 있던 찻잔을 탁자에다 집어 던지자 파열음과 함께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조금도 분이 풀리지 않은 카트리나가 손에 잡히는 것을 전부 잡아서 집어 던졌다.
“지오프리, 지오프리!”
이 모든 일의 원흉인 그 이름만 들어도 진저리가 났다.
악한 존재에게 비호를 받는 게 아니라면 그렇게 생명이 질길 수가 없었다. 숱하게 보낸 자객이나 함정에도 죽지 않았으니까.
잔뜩 성질을 부린 후 방을 돌아보니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그러다 카트리나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지오프리를 원하던 몇 안 되는 이들조차 적으로 돌아선 지금이 그녀에게는 기회였다.
“뭣들 하느냐! 당장 치우지 않고!”
황후의 명에 구석구석 숨어 있던 하녀가 나와서 얼른 깨지고 부서진 것을 치우기 시작했다.
“황후 폐하, 베일 백작에게서 답이 왔습니다.”
“당장 그쪽으로 간다.”
“모시겠습니다.”
검은 망토로 얼굴까지 뒤덮은 황후가 심각한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 * *
식사가 끝나자 드디어 대화할 기분이 들었는지 공작과 대공이 집무실로 사라졌다. 쭈뼛대던 미오는 슬쩍 코로니스의 곁에 다가가서 아는 척을 했다.
“괜찮으면 시간을 좀 내주겠어요?”
“잠시라면―.”
코로니스와 함께 조용한 응접실을 찾은 미오는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내가 아는 그 까마귀가 맞는데…….’
여기에서 섣불리 그녀의 정체를 밝혀도 되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혹여 지오프리에게 나쁜 영향이라도 줄까 봐.
드레스만 만지작대는 미오를 지켜보던 코로니스가 뒤집어쓰고 있던 망토를 내렸다.
‘……신기하다.’
이렇게 정면에서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창백하고 음산한 기운이 느껴지긴 했지만, 분명히 미소년 같은 얼굴이었다.
‘뭐야. 전혀 어울리지 않잖아.’
코로니스라면 심술궂은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딱 맞을 것이다. 홀로 입술을 뿌루퉁하게 내미는데, 그가 휘파람을 불었다.
“바쁜 사람을 불러 놓고 왜 말씀이 없으십니까. 공작 부인.”
격식을 따지고 있긴 했지만 묘하게 그녀를 놀리는 투였다. 미오가 몸을 숙여서 그를 향해서 속삭였다.
“저기 나를 알아보겠어요?”
“공작 부인이 아니십니까?”
미오는 코로니스가 그녀의 인간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떠올린 후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저기 숲에서 말이에요.”
“……아.”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코로니스가 우아하게 물을 들이켰다.
“혹시 제 굴도 못 파고, 짐승인 주제에 날고기도 못 먹고, 걸핏하면 길을 잃던 그런 짐승을 말하는 겁니까?”
그가 설명하는 것은 분명 미오였다.
하지만 지금 그렇다고 인정해 버리기에는 너무 수치스러웠다.
“좋은 점도 꽤 많았던 거로 기억하는데…….”
“오래된 기억이라 그런지 왜 그 부분은 전혀 기억나지 않을까요.”
“사교성이 뛰어난 데다 인정도 많아서…….”
이런 말을 그녀의 입으로 하자니 좀 부끄러웠지만, 코로니스가 하는 말을 그대로 인정할 수는 없었다.
“아, 그래서 식량들과 친구를 맺고 그 친구가 죽으면 사흘 밤낮을 펑펑 우셨습니까.”
코로니스의 비꼬는 말에 그녀는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가 식량이라고 부르는 이는 토끼와 다람쥐였다. 날고기를 먹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서 맛있는 과일을 구하는 법을 알려 준 고마운 녀석들이었다.
“나야 아무래도 좋지만, 이미 죽고 없는 애들은 욕하지는 마.”
간신히 울음을 참은 미오의 얼굴을 확인한 코로니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숱한 시간이 흘렀고, 많은 일을 겪었는데 하나도 변한 게 없는 걸까요?”
미오를 비난하는 음성은 아니었다.
“그러면 당신은 내가 아는 그 까마귀인 거지?”
“그래요. 네 개의 제국에 나 같은 존재는 나 하나뿐이거든요.”
코로니스가 열 손가락에 낀 보석 반지를 어루만지면서 오만하게 중얼댔다.
“그나저나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난 거야. 그렇게 잔소리를 해 대더니 필요할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고.”
처음부터 코로니스라도 곁에 있었다면 이만큼 힘들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저야 몹시 바빴습니다. 게다가 혼자 헤쳐 나가야 하는 일이 있는 법이죠.”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힘들기는 했지만, 혼자서 여기까지 버텨서 지금의 그녀가 될 수 있었다. 여전히 부족한 것은 많지만, 조금 달라졌다고 자신했다.
말없이 미오가 고개를 끄덕대자 코로니스가 긴 한숨을 쉬었다.
“혼자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오직 두 사람만 알 수 있었다.
어리바리한 작은 여우 하나가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말이다.
그뿐인가.
사랑까지 쟁취해 냈으니 이보다 더 성공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의 말에 미오는 괜히 눈가가 뜨거워졌다. 한 달을 떠들어도 부족한 그녀의 고생담이 눈앞에 스쳤기 때문이다.
“혹시…….”
카스피언 공작이 수인인 것을 아냐고 물어보려다 입을 닫았다. 미오의 얼굴을 살피던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모르는 일은 존재할 수가 없답니다.”
다행히 그는 더 캐묻지 않았고, 두 사람은 그간의 안부를 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