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더운 열기로 가득한 밤
“네 개의 제국을 죄다 멸망시킨 다음에 날 좋아하라고 협박이라도 할 셈이었지.”
“……아.”
어쩐지 전혀 과장이라고는 없는 그의 고백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내내 원작과 전혀 다른 남자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틀렸다.
‘이 남자는 더 미쳤어.’
이런 사람에게 아직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다고 생각하자 다리가 덜덜 떨렸다.
“……왜 이래요.”
지오프리의 손이 어느새 그녀의 목을 더듬더니, 망토의 끈을 풀고 있었다. 놀란 그녀가 그를 말려 보려 했으나, 이미 망토는 바닥에 떨어진 뒤였다.
“오늘 약속했잖아.”
뜨거운 입김이 그녀의 목 주변으로 흩어졌고, 곧 그의 입술이 훤히 드러난 빗장뼈 주변을 훑었다. 한 번의 입맞춤에 잔뜩 달뜨기 시작한 미오가 이상한 탄식을 뱉었다.
“하지만, 우리는 안―.”
드레스가 흘러내려서 어깨가 달빛 아래 드러났고, 그의 입술이 아래로 자꾸 미끄러졌다.
“지오프리, 으읏. 잠깐만―.”
그를 간신히 밀어 낸 미오가 침대 뒤로 몸을 물렸다. 그녀가 멀어진 만큼 다가온 지오프리는 말없이 미오를 응시했다. 붉은 열기를 띤 그의 눈 안에 미오의 흐트러진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의 입맞춤에 붉게 물든 하얀 피부가 달빛에 반짝댔다.
“내가 말하지 못한 게 있어요.”
심판을 기다리는 죄인이 된 심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서 고백하기로 했다.
“나는, 나는 당신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수인이라고 말하려는 건가. 그래서 우리는 안 된다고?”
“……헉.”
아무렇지도 않게 묻는 지오프리 때문에 놀란 것은 오히려 미오였다. 사랑한다고 고백한 상대가 수인이라는데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분명 일반적이지 않았다.
“사실 그대가 인간이든 아니든 상관은 없지만, 그대는 우리가 맺어지려면 내가 인간이 아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게 무슨 말…….”
게다가 그녀가 수인인 것을 도대체 언제 들킨 걸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알 수 없었다.
그를 제대로 속여 왔다고 생각했던 것이 전부 착각이라니.
‘게다가 지오프리가…….’
“날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약속했지.”
느릿하게 기어 와서 그녀의 몸 위에 자리한 지오프리가 천천히 입술을 포갰다.
“입, 입맞춤하자는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내가 당신을 속였고, 우리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요.”
어쩌면 처음부터 이런 엔딩이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미오는 그에게 반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슬픈 사랑을 했을 것이다.
자꾸 눈물이 나서 미오는 손을 들어서 눈을 훔쳤다.
“울지 말라고 했잖아.”
혀로 그녀의 눈물을 핥던 지오프리가 난데없이 미오의 목과 어깨선 사이를 콱 깨물었다. 순식간의 일에 비명도 지르지도 못한 미오가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 냈다.
“……흐읏.”
그때 만월이 창을 타고 두 사람을 비추었고, 벽으로 기이한 그림자가 어른댔다.
“……저게 뭐지.”
고통에 신음하던 미오가 그림자의 형태를 보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에게 이를 박아 넣은 존재는 사람이 아니었다. 거대하고 거대한 그림자는 어둠 속에서도 흉포한 기세가 역력했다.
“……늑대.”
“이제야 내가 제대로 보이나 보군.”
“……당신이.”
“사랑해.”
땀으로 촉촉이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던 지오프리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지오프리는 그녀가 뭐라고 물으려고 할 때마다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이 상황이 너무 믿기지 않아서 미오는 다시 입술을 세차게 물어뜯었다.
“……흐읏.”
아릿한 통증이 생생한 것을 보면 이건 분명 꿈이 아니다. 그녀의 입술을 타고 흐르는 피를 보던 지오프리가 무서운 눈을 했다.
“한 번만 더 상처를 내면 그때는 정말―.”
“내가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방금 그림자로 지오프리의 본래 모습을 확인한 터라 목소리가 한없이 기어들어 갔다.
“그대 입술이 그대 거라고 누가 그래.”
“내 몸이 내 거지. 그러면…….”
미오는 양어깨가 훌렁 드러나 드레스를 추스르면서 뒷걸음질 쳤다. 이제 침대 헤드까지 밀려와서 더는 달아날 데도 없었다.
“카스피언가의 손님이었을 때부터 그대는 내 것이었다.”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지오프리를 사랑하지만, 사실은 정확하게 가려야 했다. 게다가 그의 모습을 확인하자 묘하게 화가 났다. 지금껏 그를 속인다는 죄책감에 얼마나 미안했는데, 그녀 역시 속고 있었다.
“이런 중요한 일은 결혼 서약서를 쓰기 전에 이야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서 팔짱을 낀 미오가 제법 깐깐하게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사기 결혼이니까 무르고 싶다는 건가?”
걸치고 있던 망토를 집어 던진 지오프리가 그녀를 향해서 느릿하게 다가왔다. 셔츠의 끈을 느릿하게 풀어 내린 채 상체를 세웠다. 지오프리가 움직일 때마다 그의 탄탄한 팔 근육이 꿈틀댔고, 침대도 요동쳤다. 숨 막히는 아찔한 분위기 속에서 미오는 이성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보름달 그리고 마음을 준 발가벗은 남자의 조합은 무척 위험했다.
아까부터 그의 어깨를 손으로 만지고 싶어서 심장이 두근댔다. 미오가 그녀의 허벅지를 꾹 누르면서 입을 열었다.
“날 속인 거니까…….”
그녀도 속였으니 큰소리칠 입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억울했다. 지오프리가 숨기고 있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렇게 마음 졸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혼이라도 하고 싶다는 건가?”
“……네?”
항상 차분하고 진중하다고 생각했던 남자는 지금 여기 없었다. 지오프리는 그녀의 말 한마디에 과민 반응했고 쉽게 흥분했다. 미오는 서로가 숨겼던 비밀에 대해서 뭔가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지오프리는 주먹으로 가슴께를 두드리면서 울먹였다.
“내가 이런 괴물이라서 그대도 날 버릴 참인가?”
그때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그의 셔츠가 툭 떨어졌고, 미오는 지오프리의 몸에 새겨진 숱한 상흔을 볼 수 있었다. 가장 최근에 생긴 어깨와 옆구리 쪽 상처가 기다랗게 남아 있었다.
“……누가 괴물이래요!”
그대로 지오프리의 목을 끌어안은 미오가 울음을 터뜨렸다. 불안한 그의 마음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아는 그녀였다. 인간이 대부분인 이 세상에서 수인으로 산다는 것은 철저히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나를 떠날 건가.”
“지오프리 카스피언! 정신 차려요.”
그의 목에 얼굴을 묻고 울던 미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분명 흉한 얼굴이겠지만 그런 것을 따질 여유 따윈 없었다. 그는 시린 바람이 가득한 카스피언 숲처럼 오만한 얼굴이 가장 잘 어울린다.
‘이런 약한 모습은 지오프리답지 않아.’
“……아. 이건.”
그러다 손끝에 잡힌 목걸이를 볼 수 있다. 기다란 줄 끝에는 반지가 달려서 대롱댔다. 미오는 천천히 목걸이에서 반지를 풀어낸 다음에 그의 왼손 약지에 그것을 끼워 주었다. 그녀가 하던 것을 가만 지켜보던 지오프리가 긴 숨을 내쉬었다. 충혈된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미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지오프리 카스피언의 팬이에요.”
익숙한 그녀의 말에 지오프리는 반지 낀 손에 입술을 댄 채 속삭였다.
“그때도 그대는 날 단숨에 제압했었지.”
“실은 그 전에도 당신을 본 적이 있어요.”
“……숲에서 말인가.”
“당신이 알 거라고 생각은 못 했어요.”
“내가 뭉치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데…….”
서로 묻고 싶은 이야기가 끝도 없이 많았다. 미오가 궁금한 것을 물으려고 입술을 떼자, 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야기는 차차 하고, 이제 고기 없는 고기파이 문제를 좀 해결해야 할 것 같은데…….”
그제야 발가벗은 지오프리를 꼭 껴안고 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
좁고 아늑한 방, 작은 침대, 두 사람을 비추는 만월과 더운 열기가 한꺼번에 미오에게 밀려들었다.
“……그게.”
분명 몇 번이나 지오프리의 품에 안기고 싶었는데, 지금도 그런 마음이 있긴 하지만.
‘너무 떨려서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입 안이 바짝 말라서 목이 따가웠다.
“설마 약속을 저버리겠다는 건가? 매번 힘없고 순진한 나를 먼저 덮쳤던 것은 그대인데.”
“말은 바로 해야죠. 덮치긴 누가 덮쳐요. 그냥 조금 깨물었겠지.”
“……아? 그럼 입맞춤은 없던 일인가?”
“그래요. 입맞춤은 인정해요.”
인간으로 변하려고 탐했던 그와의 입맞춤은 차츰 이상한 쪽으로 변했다. 가볍게 입만 붙였다 떼면 그만이었는데, 기분이 좋아져서 자꾸 오래 맞대고 싶었다.
“지금 우리는 합법적으로 결혼한 데다, 서로 좋아하고 있잖아. 그러니 우리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거야.”
술도 한 모금 마시지 않았는데, 저런 낯 뜨거운 이야기를 늘어놓는 지오프리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얼른.”
보채기까지 하는 지오프리가 귀여워서 견딜 수 없었다. 무릎을 꿇은 채 미오가 두 손으로 그의 허벅지를 꽉 눌렀다. 그리고 목을 길게 빼서 상처투성이 입술을 내밀었다. 눈을 사뿐히 감자 그녀의 목 주변으로 거친 숨결이 느껴졌다.
“사랑해.”
고백 후 거친 입맞춤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그녀의 상처를 핥아 대는 지오프리의 더운 열기에 미오는 그를 붙든 팔에 힘을 꽉 줘야 했다. 잠옷을 스르륵 벗겨 내는 손길에 그녀가 볼을 붉혔다.
“나도 벗을 테니 부끄러워하지 마.”
“그런 말이 더 이상하거든요.”
“미오, 눈을 좀 떠 봐.”
“싫어요.”
그녀의 팔에 닿는 지오프리의 탄탄한 근육의 감각에 이미 심장은 폭주 중이었다. 그런데 눈을 떠서 실제로 보게 되면 자극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언제는 날 산 채로 삼킬 것처럼 봐 놓고는…….”
“내, 내가 무슨 구렁이예요?”
억울한 생각에 번쩍 눈을 뜬 미오는 말을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