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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103)화 (103/123)

103화 나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어두워지기도 전에 미오는 목욕을 두 번이나 했다. 딱히 이유는 없었지만, 그러고 싶었다.

“잠옷이 다 이 모양이라서…….”

외출용 옷과 구두나 모자는 주문했다지만, 잠옷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진짜 로렌 때문에 못 살겠어.”

챙겨 준 게 죄다 그런 난해한 것들뿐이었다.

결국, 괜찮은 잠옷 찾는 데 실패한 미오는 베이지색 가벼운 외출복을 입기로 했다.

‘……오늘 밤 그대를 찾아가겠다.’

지오프리의 말을 떠올리자 온몸에 개미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물을 좀 마셔야겠어.”

싫은 건 아닌데 너무 신경이 쓰여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싫기는커녕 퍽 오래 기다려 온 일이지.’

그사이에 어둠이 내렸고, 밝은 둥근 달이 떠올랐다. 달을 멍하니 바라보던 미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환한 빛이 그녀의 양심을 두드렸다.

“내가 지금 이러면 안 되잖아.”

지오프리를 진짜로 위한다면 이런 욕심을 내서는 안 되었다.

“내가 정말 미쳤었나 봐.”

그녀는 지오프리에게 전혀 걸맞지 않은 상대였다.

상처가 많은 그에게는 다정하고 평범한 사람이 어울렸다. 그를 따뜻하게 품어 줄 수 있을 테고, 웃게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딴 여우 수인이 아니라…….”

로렌이 늘 입에 달고 사는 공작님을 닮은 아이도 생각났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그녀와 지오프리 사이에는 괴물이 태어날 것이다. 새장에 갇혀서 고통받던 비앙카를 떠올리자 눈에 뜨거운 기운이 차올랐다.

“그런 일은 싫어.”

있지도 않은 아이가 겪을 고통을 상상하는 것도 괴로웠지만, 그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할 지오프리를 보는 것도 자신 없었다. 그리고 제일 싫은 것은 끝을 뻔히 알면서 이기적으로 구는 그녀였다.

“내가 그를 너무 좋아해서 잠시 미쳤던 거야.”

무릎을 꿇고 반지를 끼워 주던 지오프리의 진지한 얼굴을 떠올린 미오가 눈물을 터뜨렸다.

“나를 진짜 좋아하면 어쩌냐고.”

차라리 처음처럼 그녀를 무시했다면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 같은 거한테 진심을 줘 버리면―.”

손에 끼워진 반지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너무 슬퍼서 그의 너른 품에 기대서 펑펑 울고 싶어졌다. 지오프리 때문에 힘든 순간에도 오직 그만 떠올리는 게 우습지도 않았다.

“이럴 때가 아니야.”

지오프리를 더 망쳐 버리기 전에 그녀가 먼저 이 모든 걸 멈춰야 했다. 현명한 방법 따위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게 존재하는지도 의문이었다.

“일단 이곳에서 나가야겠어.”

망토를 걸친 미오가 창가로 다가섰다. 창틀을 넘어서면서 그녀는 잠시 머물렀던 방을 눈에 담아 보았다.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나도 평범한 사람 같아서 참 좋았어.”

마지막으로 가져가는 기억이 이렇게 따뜻한 것이라서 다행이다 싶었다. 덩굴을 타고 내려오는데 눈물이 너무 나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마구간에 가서 말을 타고 성을 빠져나오는 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지.”

온통 낯선 거리를 앞에 둔 그녀는 일단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북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좋았는데,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사방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미오는 달리다가 보이는 작은 여관에 들렀다. 지오프리와 함께 갔던 그런 곳처럼 규모가 큰 곳이 아니라 손님이 거의 없었다.

꾸벅꾸벅 졸면서 계산대를 지키던 여관 주인이 미오를 맞았다.

“혼자유?”

“네. 하루만 묵을게요.”

망토를 푹 뒤집어쓴 미오는 퉁퉁 부은 눈을 감추면서 작게 속삭였다.

“아침 식사는 무료니까 7시까지 나와요.”

인상 좋은 할머니는 여관 뒤에 있는 작은 집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방에 있는 줄을 당겨요. 그러면 우리 영감이 갈 거유.”

“바로 잘 거라서 필요한 건 없을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여관비를 치른 미오는 머무를 방을 안내받았다.

방은 작았지만, 아까 봤던 단정한 주인처럼 깨끗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지금 미오에게 방의 상태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창을 열어서 환기하거나 불을 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곧장 침대에 몸을 던진 그녀의 손가락 끝에 주머니의 끝이 걸렸다.

“이 돈도 지오프리가 챙겨 준 건데.”

비상시에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돈이 든 주머니를 그녀에게 줬었다.

“카르티아 성도, 돈도, 반지도 죄다 줘 버리면 어쩌려고.”

시도해 보지는 않았지만, 카스피언 공작 성도 달라고 하면 줄지도 모른다.

“이건 다 내가 잘못한 거야.”

불순한 의도로 그에게 접근해서 모든 것을 그르쳤다. 중간에 몇 번이고 그만둘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내가, 내가 지오프리를 좋아해서.”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겠지만, 그녀라면 경우가 달랐다.

“내가 그를 속인 거야.”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지오프리는 그녀를 경멸할지도 모른다.

‘여우 수인이란 것을 속였다고? 처음부터 나를 이용할 생각밖에 없었군.’

그렇게 따져 물어도 아니라고 반박할 수도 없었다.

전부 사실이었으니까.

그녀는 처음부터 여우 수인이었고, 인간의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오프리와의 입맞춤이 필요했다.

“진짜 엉망이야.”

처음 숲에서 그가 풀숲에 숨어 있던 그녀를 발견했던 순간이 생생했다. 그때만 해도 이런 일은 상상도 못 했는데,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되어 버린 걸까.

“어쩌다 이렇게 진심이 된 걸까.”

몇 번이고 그를 그냥 이용하는 것뿐이라고 자신을 속여 왔다.

“하지만 지오프리도 속이는 거라는 것은 몰랐어.”

밖으로 울음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입술을 꽉 물었다. 연한 살이 금방 터졌고, 비릿한 피 냄새에 속이 뒤틀렸다. 우습게도 이 역한 냄새에도 지오프리가 떠올랐다. 피를 뒤집어쓴 채 그녀에게 다가서던 그 밤의 지오프리가 눈앞에 생생했다.

“잊을 수 없을 거야.”

다시 여우로 눈을 뜰지 모르겠지만, 이번만큼은 그에 대한 기억이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심장이 죄 뜯겨 나가는 듯하고 몸에 자잘한 경련이 일었다. 머리는 뜨거웠고, 속은 울렁거렸다.

“사랑해서 떠난다는 거 전부 엉터리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정말 그런 사랑도 있을지 모른다.

흑흑.

그때 창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상한 소리가 났다.

‘……뭐야.’

이렇게 낡고 허름한 여관에 도둑이 든 건가.

희미해지는 정신을 억지로 부여잡은 미오가 몸을 고쳐 앉는데, 열린 창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불을 켜지 않은 터라 낯선 침입자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었다.

“……누구.”

그녀의 푹 잠긴 음성을 들은 상대가 잠시 뜸을 들인 후 입을 뗐다.

“……내가.”

음성을 확인한 미오는 절망적인 얼굴을 했다.

사실은 묻기 전에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밤바람에 섞인 지오프리의 체향을 맡을 수 있었으니까.

그때 방에 희미한 불이 켜졌고, 침대 옆에 선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오프리는 이제까지 봤던 것 중에 가장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봤다.

“여긴 어떻게…….”

소매로 눈물을 닦아 낼 생각도 못 하고 미오가 중얼대자, 그가 비릿하게 웃었다.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갑자기 나타난 지오프리 때문에 그녀의 머리가 생각하기를 멈췄다. 이렇게 곧장 그에게 잡힐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게 불찰이었다.

“내가 그냥 보내줄 줄 알았나? 내가 여러 번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지오프리의 말에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는 음성이 있었다.

‘어디 달아날 생각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설마 달아나려던 건가?’

하지만 처음에는 그녀가 여우였을 때고, 다음은 지오프리가 그녀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을 때인데.

혼란스러워진 미오가 아무 대꾸를 못 하는데 지오프리가 그녀를 침대 아래로 끌어 내렸다. 그 바람에 그의 앞에 서게 된 미오가 울먹였다.

“이런 말 진짜 미안한데…….”

“미안한 말은 하지 않으면 되지.”

“내 말 좀 들어 줘요.”

“너는 날 벗어날 수 없어.”

그녀의 손목을 꽉 잡은 손에 힘을 준 지오프리가 음산하게 속삭였다.

광기 어린 눈매가 소설 속 묘사, 그대로였다. 드디어 원작처럼 그가 제대로 미쳐 버렸나 싶어서 눈물이 터졌다. 이런 것을 원한 게 절대 아니었다.

‘나 같은 사람 말고 진짜 괜찮은 사람을 좋아하라고!’

늦었지만 이제라도 진심을 전달해야 할 때였다.

몸을 조금 비틀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냥 나를 보내 주고, 각자 갈 길 가요.”

그게 서로를 위해서 최선이니까.

“내가 그 말을 들을 것 같아?”

“지오프리! 지금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흥분한 미오가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지오프리에게 화를 냈다.

“하나만 묻지. 나를 사랑하나?”

“……아.”

한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붙든 그가 속삭였다.

“그대가 나를 사랑하는 동안 곁에 있겠다고 한 건 진심이다.”

“그러니까 왜 그런 게 진심인데요.”

사랑해서 떠난 건데, 이렇게 곧장 찾아오면 어쩌냐고.

“대답해.”

몹시 흥분한 지오프리는 당장 대답하지 않으면 이 작은 여관을 때려 부술 기세였다.

“사랑, 사랑하는데…….”

“……하.”

그녀의 대답을 들은 지오프리가 그대로 미오의 몸 위로 무너져 내렸다. 그 바람에 미오는 침대 위로 쓰러졌고, 그녀를 안은 지오프리 역시 함께였다. 그녀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움켜쥔 그가 파르르 떨었다.

“그대가 나를 미워하는 줄 알고…….”

울먹대는 그의 음성에 미오는 입만 벙긋댔다. 피부를 타고 전해지는 그의 무거운 진심에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워한다고 하면…….”

머리가 어지러워서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손가락 사이에 엉킨 머리카락에 코를 묻고 있던 지오프리가 작게 중얼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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