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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102)화 (102/123)

102화 사슴 수인 비앙카

누가 한 말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귀한 짐승을 잡으면 이렇게 가둬서 키우고 싶다고 했었다.

저렇게 가둬 두면 아마…….

아무도 그녀를 볼 수 없을 것이다.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을지 모른다.

“뭐예요? 왜 그렇게 이상한 표정이에요?”

그제야 지오프리는 잠시 품었던 음험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다시 수로를 지나는 길에 그의 뒤를 쫓던 미오가 물었다.

“보는 그대로야. 미오. 억울하게 갇힌 한 여인을 구해 주었지.”

“하지만 왜요?”

“그들을 가엽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지오프리와 미오는 그곳에 갇혀 있던 사람을 죄다 풀어 주고 오는 길이었다. 그의 질문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시장에 있는 사람들을 동정했던 것은 사실이니까.

“좋은 일을 했는데, 칭찬해 주지 않을 건가.”

“……그건.”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야.”

“……아.”

시장에 함께 왔을 때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지오프리가 떠올랐다.

‘나를 위해서…….’

다시 수로의 반대편에 도착하기 직전, 내부에는 침침한 불빛만이 존재했다. 멈춰 서서 그녀의 답을 기다리는 지오프리의 눈이 반짝댔다. 성큼 다가선 미오가 그의 허리부터 꼭 안았다.

“잘했어요.”

“이게 전부인가?”

“다치지 말아요.”

누군가를 돕는 것도 좋지만, 그녀는 지오프리가 다치는 게 싫었다.

“정말 이게 다라고?”

웃음 섞인 지오프리의 음성에 미오가 허리를 안은 손을 풀었다. 살짝 발돋움한 그녀는 곧장 그의 입술에 가벼이 입맞춤했다.

“이제 서둘러요. 들키면 괜히 곤란해지니까.”

이런 상황이 불편해진 미오가 그의 가슴을 살짝 밀었다. 그렇게 바깥으로 나온 두 사람은 그녀가 숨겨 둔 말을 타고 어둠 속을 달렸다.

“내가 따라오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이 길을 걸어와야 했을 거라고요.”

지오프리의 앞에 앉은 미오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다면 나는 그대의 볼기짝을 때려 줄지도 몰라.”

“맙소사! 당신, 지금 그거 나한테 하는 말인가요?”

아까 가둘 때도 그렇고 지오프리는 그녀를 어린아이를 대하듯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때 미오의 허리를 감은 그의 손에 힘이 잔뜩 실리더니, 지오프리가 몸을 숙였다.

“그대가 위험해지는 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끝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묵직한 진심이 묻어났다.

화를 내는 것도 잊은 미오는 일부러 대답 없이 정면만 응시했다. 점멸하는 가로등 아래 미오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 * *

카르티아 성에 온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처음에는 답답하다고 느꼈던 공기도 어느새 익숙해지는 기분이었다. 이곳 사람들처럼 반소매 드레스를 입은 미오가 호수 근처에서 물장난을 쳤다. 구두를 벗고 호수 근처에서 걸으면 기분이 아주 근사했다.

“수영할 줄 알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러면 물에 빠져도 혼자 힘으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두 손으로 물을 위로 튀기자 빛이 반사되어서 보석이 흩어지는 것 같았다.

“……예쁘다.”

다시 눈을 뜬 이후 언제 여우로 변할지 몰라서 전전긍긍하며 살았다. 그리고 지오프리의 곁에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숱한 밤을 고민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바람은 좋고, 햇살은 따사로웠고, 발목에 감기는 물은 부드러웠으니까.

그때였다.

풀 밟는 소리가 나더니 그녀의 뒤에 낯선 여인이 나타났다.

“아, 당신은.”

지오프리와 코로니스가 구해 준 그 사람이었다.

카르티아 성으로 데려왔고,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했었다.

‘……아름다워.’

기다란 갈색 머리를 하나로 묶어서 앞으로 내린 여인은 청초한 인상을 주었다. 아직 손과 얼굴에 상처가 남아 있었지만, 며칠 전 처음 봤을 때보다 많이 좋아 보였다.

“제가 당신을 놀라게 했나요?”

“아니에요. 몸은 좀 어때요?”

물에서 걸어 나온 미오가 상대의 곁에 성큼 다가섰다. 낯선 여인이었지만 이상하게 눈길을 끌었다. 수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더욱더 반가운 기분이었다. 그녀가 묘한 표정을 짓는데, 상대가 방긋 웃었다.

“저는 비앙카라고 해요. 반가워요.”

“……비앙카.”

가만 이름을 발음해 보는데, 비앙카가 미오의 손을 꼭 잡았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저는 한 것도 없는걸요.”

이런 인사를 받을 일은 하지 않았기에 미오는 조금 부끄러웠다.

‘저는 새장에 갇혀 있었고, 지오프리가 전부 해치웠는걸요.’

속으로 중얼대는데 비앙카가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당신이 나를 찾아 줬잖아요.”

맞잡은 손이 따뜻해서 기분이 좋았다.

그녀의 사정만 아니라면 비밀을 죄다 털어놓고 싶었다.

‘사실은 나도 수인이에요.’

“제가 수인이라서 신기하죠?”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비앙카를 너무 빤히 바라봤던 게 미안해서 미오가 손사래를 쳤다.

“저는 사슴 수인이랍니다.”

비앙카의 그 말에 미오는 강한 기시감을 느꼈다. 머리가 순식간에 깨질 듯이 아파 신음을 흘리자 비앙카가 손을 뻗었다. 놀란 미오가 어깨를 움츠리자 그녀가 따뜻한 음성을 냈다.

“저는 회복을 돕는 힘이 있답니다.”

비앙카의 손을 타고 부드러운 기운이 미오의 몸에 번졌고, 그러자 두통이 조금 가셨다.

“머리가 자주 아프죠?”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아무래도 눈앞의 수인은 의원보다 더 용한 것 같았다.

“사실 잠도 거의 못 자고, 눈만 감으면 악몽을 꾸고 있어요.”

미오의 말에 비앙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분하게 대꾸했다.

“잃어버린 기억이 곧 돌아올 거랍니다. 하지만 겁먹을 거 없어요.”

“……네?”

순간 미오는 비앙카가 의원이 아니라 용한 집시나 마녀 쪽에 가까운 게 아닌가 생각했다.

‘내게 잃어버린 기억이 있다는 건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데…….’

그때 비앙카가 인상을 살짝 구기더니 작게 입을 뗐다.

“저는 들어가서 쉬어야겠어요.”

낫지도 않은 비앙카에게 힘을 쓰게 해서 미안한 마음이었다.

“아, 제가 부축해 드릴게요.”

비앙카가 머무르고 있는 별채에 데려다주고 나오는데, 정원 한복판에 코로니스가 서 있었다.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려는데, 그가 미오에게 발을 걸었다.

“왜 내게는 인사도 안 합니까?”

“아? 거기 계셨네요?”

미오는 그의 발을 가벼이 넘어선 다음에 어색하게 웃었다.

“어디 가서 거짓말은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너무 티 나거든요.”

“……하.”

첫인상부터 별로더니, 미오는 딱 신경을 긁어 대는 말만 하는 게 과거의 누군가를 연상시킨다고 생각했다.

‘왜 다 잊었는데, 그 녀석만 생생하게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야.’

함께 놀던 사슴이나 곰의 생김새는 제대로 기억도 못 하는데 재수 없는 까마귀의 깃털과 눈은 또렷하게 기억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코로니스를 바라본 미오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코로니스의 눈이 그때 그녀를 비웃던 까마귀와 똑같았다.

‘기분 탓이겠지.’

요즘 계속 과거에 대한 악몽에 시달리는 데다 저 사람의 첫인상도 그다지 좋지 않았으니까.

“……멍청하긴.”

“지금 나한테 하는 말이에요?”

“분명히 이야기하는데,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혼잣말이니까 그렇게 알도록 해.”

멍청하다는 말도 어이가 없었는데, 사과는커녕 더 이상한 말만 늘어놓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기억해 내는 게 좋아. 다시 그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완전히 미쳤군요.”

미오는 상대할 가치도 없는 코로니스의 말에 콧방귀만 뀌었다.

* * *

매번 시비를 거는 코로니스만 빼면 이곳의 생활은 퍽 만족스러웠다. 비앙카는 미인에 성격까지 좋아서 그녀의 좋은 말벗이 되어 주었다. 사실 빙의 후 또래 여자 친구를 사귀어 본 게 처음이라 가슴이 두근댔다.

‘주변에 또래라고는 라비니아나 돌로레스 같은 사람뿐이었으니까 말이야.’

지오프리는 여전히 제멋대로 굴기는 했지만, 더는 그가 무섭지 않았다. 아무리 잔인하고 냉혹한 구석이 있다고 해도 그녀에게는 퍽 다정했으니까.

정원 한가운데 마련된 작은 정자에서 화관을 만들던 미오가 입을 뗐다.

“그런데 말이에요.”

“뭐가 말이지?”

미오의 건너편에서 책을 읽던 지오프리가 그녀를 응시했다.

“신혼여행이란 게 이게 전부일까요.”

미오의 물음에 당황한 그가 허둥지둥 책을 덮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아니, 나도 처음이라서 잘 모르겠지만, 뭔가 중요한 게 빠진 기분이에요. 고기가 없는 고기파이 같은?”

그 말을 마친 미오가 다시 화관 만드는 데 집중하자 지오프리가 연신 헛기침을 해 댔다.

‘이 성도, 반지도 주면 뭐 해.’

정작 제일 중요한 것을 받지 못했다.

입술을 뿌루퉁하게 내민 미오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우습지.’

가져서는 안 되는 남자였지만, 자꾸 욕심이 났다.

‘어쩌자고 진심이 되는 거냐고.’

두 사람의 미래만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한숨을 폭 내쉬는데 지오프리가 입을 뗐다.

“……오늘 밤 그대를 찾아가겠다.”

“왜, 왜 나를 찾아와요?”

너무 놀란 나머지 말을 더듬던 그녀가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드레스에 떨어져 있던 꽃잎이 사방으로 날렸다.

“고기 없는 고기파이는 안 될 말이니까.”

지오프리의 답에 미오가 들고 있던 화관을 그의 머리 위에 푹 씌웠다.

“이, 이거 선물이에요.”

“……아.”

그리고 드레스 자락을 쥔 미오가 성을 향해서 전속력으로 달렸다. 어찌나 빠른지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정원에 덩그러니 남겨진 지오프리의 얼굴이 쓰고 있는 화관만큼이나 알록달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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