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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99)화 (99/123)

99화 도르프 제국 (2)

도르프 제국 카르티아 지방은 가장 남단에 위치한 곳으로 바다를 끼고 있었다. 그리고 예로부터 교역이 활발해서 타지인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설마 겁을 먹은 건가.”

느긋하게 거리를 쏘다니던 지오프리가 자꾸 그의 팔에 매달려 오는 미오를 보면서 물었다.

“시장에 와서 겁먹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닌 척했지만, 사실 미오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새로워서 눈이 닿는 곳마다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국적인 꽃과 장신구, 옷을 파는 곳을 지나자, 바닥에 무기를 늘어놓은 상인이 있었다.

“저기로 가 보지.”

미오가 관심을 보이자 지오프리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제법 괜찮은 물건이군.”

한참 무기를 들여다보던 지오프리가 중얼대자 상인이 가슴을 활짝 폈다.

“손님,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이게 전부 도르프 바다를 누비는 해적들이 직접 쓰는 것입니다.”

지오프리는 하나둘 들어 보고 살펴보더니 작은 단검 하나를 골랐다.

“이게 적당한 것 같은데…….”

“나한테 이걸요?”

지오프리는 일전에 여관에서의 일 이후 그녀에게 간단한 호신술을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항상 함께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단검을 받아 든 미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작지만 날이 예리한 검은 손잡이에 호박색과 검은색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내가 틈틈이 쓰는 법을 알려 줄 테니까.”

“좋아요!”

그렇게 셈을 치르고 다시 시장 구경을 하는데, 막 지나가는 수레에 갇힌 늑대를 볼 수 있었다. 잡힌 늑대는 쉬지 않고 탈출을 감행했는지 주둥이와 발 주변에 피가 흥건했다. 쇠창살에도 피와 이물질이 말라붙어 있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인상을 팍 구겼다.

“야생 짐승도 사고파는 곳인가 봐요.”

“이곳 시장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취급한다더군.”

카스피언에서 이 말을 들었다면 믿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여기 와서 직접 보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래도 어쨌거나 산 짐승을 저리 가두는 것은 보기가 힘들었다.

“좀 비키시오!”

미오와 지오프리 뒤로 다른 수레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촘촘한 철망 안에 토끼가 빼곡하게 갇혀 있었다. 이미 죽은 것도 있었고, 탈수 증상으로 축 늘어진 토끼도 있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토끼는 바깥을 구경하는 게 신기한지 발을 굴렀다.

“……아.”

저 토끼의 끝은 분명 좋지 않을 것이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이곳은 여우 사냥을 하던 숲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생각에 시장 구경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저기 가서 뭘 좀 마시는 게 좋겠군.”

미오의 창백한 얼굴을 확인한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거리에 놓인 탁자에 앉은 두 사람은 시원한 차를 마셨다. 갈증이 가시자 불편했던 기분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듯했다.

‘그래. 이런 일은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그녀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새끼 토끼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떠올리자, 다시 어깨가 축 처졌다. 그리고 다른 걱정도 있었다.

“저기, 나한테 이렇게 선물 많이 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느닷없는 말에 지오프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미오는 카스피언 공작저의 재정 상황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영지에서 거둬들이는 돈은 터무니없이 적었고, 나가는 돈은 훨씬 더 많았다.

“……아.”

대답을 주저하는 미오의 얼굴을 살피던 지오프리가 싱긋 웃었다.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당신의 남편은 네 개의 제국을 통틀어서 가장 부유할지도 모르니까.”

“……네?”

카스피언 공작저의 사정이 궁핍한 것이지, 지오프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알렉세이 우르체카보다 재산이 더 많았지만, 그는 불필요한 사치를 하지 않을 뿐이었다.

미오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말이 안 되는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무도회용으로 지었던 드레스의 비용은 카스피언 공작가의 재정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다 마셨으면 항구 근처로 가 볼까.”

“……항구요?”

미오는 저 멀리 보이는 바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강한 바람에 드레스가 몸에 달라붙어서 걸음이 느려졌다.

“바다 냄새가 이렇구나.”

항상 누군가의 입으로 묘사되는 바다를 직접 눈으로 보자 미오는 묘한 기분에 빠졌다. 그때 세찬 바람이 불었고, 헐거워진 끈 탓에 그녀의 모자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앗!”

그러자 지오프리가 재빨리 옆에 쌓여 있던 나무 상자를 밟고 뛰어올라서 모자를 잡았다. 얼마나 민첩한지 한 마리 새를 보는 것 같았다.

“이리 와.”

그는 모자를 다시 씌워 준 후 끈을 단단히 고정해 줬다. 미오는 별것도 아닌 일에 괜히 입 안이 바짝 말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의 지오프리는 카스피언 공작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사람 같았다. 날카로운 눈매는 물론, 입 근처가 특히 많이 누그러졌다.

지오프리가 소리 내어서 웃는 바람에 미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또 나를 보고 있나?”

“……누가 그래요? 저기 뒤에 있는 갈매기를 봤어요.”

항구에는 갈매기가 어지럽게 날아 다니고 있었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려고 두리번대던 미오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는 뭐 하는 곳이죠? 뭔가 파는 것 같은데…….”

음침하고 은밀해 보이는 곳에서 연신 소란스러운 고성이 들려왔다. 그곳을 슬쩍 보던 지오프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별로 좋은 곳이 아닌 것 같군.”

“하지만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제대로 구경하고 싶은걸요.”

미오가 팔을 잡아끌었고, 두 사람은 숨겨진 시장으로 접어들었다.

“……음.”

사실 이곳을 지키고 서 있던 문지기를 보는 순간 미오는 그의 말을 듣는 편이 나았다고 후회했다. 허리에 칼을 두 개나 차고, 손에는 날카로운 도끼를 든 사내들은 살기등등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여기를 한번 봐 주십시오. 이국에서 건너온 튼튼한 노예가 많이 있습니다.”

없는 게 없다고 하더니 사람까지 사고파는 곳이었다. 질척한 바닥을 따라 걷던 미오가 그의 팔을 잡아끌 때였다.

“……저건.”

볕도 들지 않는 구석, 기다란 새장에 갇힌 것은 분명 사람이었다. 그 앞 팻말에는 ‘수인, 가격 흥정 가능’이라고 적혀 있었다.

‘진짜가 아닐 거야.’

하지만 무도회장과 사냥터에서 누군가 언급했었다. 수인이 남아 있어서 잡아서 전시한다고.

‘그러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도 했지.’

“아무래도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공작님.”

그의 팔을 힘주어 잡은 미오가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새장을 올려다볼 때였다. 갈색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인이 족쇄를 달고 있었다.

“…….”

분명 낯선 얼굴이었는데, 미오를 바라보는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나를 보고 왜 우는 거지.”

“미오, 이리 와.”

지오프리는 이상한 말을 중얼대는 미오를 데리고 재빨리 그곳을 벗어났다.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피곤해서 좀 쉴게요.”

그녀는 곧장 방으로 와서 구석에 기대앉았다. 굴이 있다면 그곳을 파고들었을 것이다. 극심한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뭔가를 놓치고 있어.”

뭉텅뭉텅 잘려 나간 기억과 관련이 있을까.

왈츠를 췄을 때 느꼈던 감정과 비슷했다.

분명 언젠가 한 적이 있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까 그 사람이―.”

만약 정말 수인이라면 귀족이나 상인에게 팔려서 지하실에 갇히게 될 것이다.

“머리가 너무 아파.”

옷을 대충 갈아입은 그녀가 끙끙대면서 침대에 올랐다. 몸이 어찌나 무거운지 물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미오는 눈을 감은 지 몇 분도 채 되지 않아서 깊은 잠에 빠졌다.

* * *

다음 날 식당에 내려가는데 미오는 머리가 멍했다. 분명 오랜만에 오래 잤는데도 전혀 개운하지 않았다.

‘밤새도록 무슨 꿈을 꾼 것 같은데…….’

뒤숭숭한 꿈이었던지 아침에 눈을 뜨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꿈의 내용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

식당에는 지오프리 혼자 있는 게 아니었다. 검은 머리에 옷까지 검은색 일색인 남자가 함께였다. 그녀의 등장에 그 남자가 일어나더니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창백한 낯과 지나치게 마른 몸을 한 남자는 묘한 기운을 풍겼다. 소년이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퍽 성숙한 느낌도 있었으니까.

“안녕하세요.”

“저는―.”

그가 자기소개하기도 전에 미오가 먼저 질문했다. 아무래도 만나 본 적 있는 사람 같았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특유의 기운이 누군가와 헷갈릴 만한 게 아니었다.

“우리 어디서 본 적이 있나요?”

“……글쎄요.”

기묘하게 웃던 남자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가 최근에 만난 이는 작은 여우와 여기 공작님뿐이랍니다.”

“……제가 착각했나 보네요.”

그 이후로 시간이 어찌 흘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작은 여우와 공작님.’

포크로 당근을 쿡쿡 찌르면서 그녀는 컴컴한 숲을 떠올렸다. 거기에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유령의 집이 있었고, 거기에는 진짜 유령 같은 이가 있었다.

‘비슷하기는 하지만, 그 유령의 손가락은 나뭇가지 같았는데…….’

식사하면서 몰래 살폈는데 저 남자는 분명 사람이기는 했다. 의심을 거두지 못한 채 그를 훔쳐보다 눈이 마주쳐 버렸다.

“저는 코로니스라고 합니다. 공작님의 오랜 자문가입니다.”

이제 20대 정도의 나이로밖에 보이지 않아서 오래라는 말은 좀 맞지 않았다.

“중요한 일이 생겨서 오늘은 여기 코로니스가 그대와 함께 있어 줄 거야.”

식사 후 지오프리의 말에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그의 팔을 붙들었다.

“나도 데려가면 안 되는 일이에요? 여기는 낯선 데다 저 사람은 더 낯설고―.”

유령의 집에서 그에게 매달렸던 것처럼 미오는 지오프리를 붙잡았다.

“금방 돌아올 거야. 그리고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괜찮아.”

뭐가 급한지 지오프리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코로니스와 함께 남겨진 미오는 불편해서 멀뚱멀뚱 주변만 살폈다. 그때 상대가 먼저 입을 뗐다.

“공작 부인이라고 불러 드려야 하나요?”

“편하신 대로 부르세요. 그리고 저는 머리가 아파서 방에 쉬러 갈 거니까 저 때문에 공연히 시간을 내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참 여전하다 싶기도 하고.”

“……에?”

미오는 다른 사람이 있나 싶어서 고개를 빼서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이곳에는 그녀와 코로니스 둘뿐이었다.

“아닙니다. 혼잣말했습니다. 올라가시죠. 제가 숙면에 좋은 향을 찾아 드리겠습니다.”

미오는 그렇게 낮부터 다시 침대에 들었다.

코로니스가 준 향초 덕분에 어제부터 찌뿌둥했던 몸이 한결 풀리는 기분이었다.

‘진짜 숲에서 봤던 그 마법사는 아니겠지.’

괜히 불안한 기분이 들어서 팔을 가만 쓸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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