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도르프 제국 (1)
알렉세이 우르체카는 의식이란 게 생긴 이래로 가장 많은 업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비실비실한 애송이, 술 몇 병에 그렇게 사흘을 뻗어 버릴 줄이야.”
그와 술을 마신 사무엘이 그대로 기절하는 바람에 팔자에도 없는 일을 떠맡게 되었다. 카스피언 황제는 사랑에 눈이 멀어서 부인과 아들을 버린 비열한 작자였다.
“그리고 아주 양심도 없는 놈이 분명해.”
지오프리 카스피언 소유의 재산을 몰수해서 남은 것도 별로 없는데, 황족이라는 이유로 엄청난 서류를 보내고 있었다.
“이건 관료들이 처리해야 하는 것들 아닌가?”
봐도 봐도 짜증이 나는 서류를 보면서 그대로 불쏘시개로 만들고 싶다는 충동이 매초 일었다.
“그래. 지오프리의 마음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야.”
그라도 이딴 대접을 받으면 손바닥만 한 카스피언 제국 정도는 초토화해 버렸을지 모른다.
“도저히 못 참겠군.”
밀린 일이 많아서 사흘을 꼬박 책상 앞에 앉아 있었더니 죽을 것 같았다. 그는 집무실 어딘가에 숨겨 둔 술병을 꺼내서 홀짝였다.
“이제야 숨을 좀 쉴 것 같군.”
창을 열어젖힌 그가 한숨을 쉬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카스피언 공작님, 돌로레스가 왔습니다.”
누가 들으면 마치 카스피언 공작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고 오해하기에 충분한 말일 것이다.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던 알렉세이는 몸을 절반 정도 돌렸다. 거기에는 검은 벨벳 망토를 걸친 돌로레스가 서 있었다.
‘심심한데 장난이나 좀 쳐 볼까.’
그는 손으로 얼굴을 조금 매만진 후 헛기침했다.
“그대가 무슨 일이지?”
“말도 안 되는 소식을 들어서 황급히 달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렉세이는 약간 광기가 느껴지는 돌로레스의 음성에 이 장난을 곧장 후회했다. 아무래도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았다.
‘차라리 서류를 보는 게 낫지.’
저런 여인들이 하는 말은 늘 비슷했다.
사랑에 미친 여인들은 약혼자를 배신하고 고국을 버렸다. 간혹 부모와 자식을 버리는 이도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의 가슴에 기다란 못을 박아 넣고 뻔뻔하게 사랑을 구걸했다.
‘그런 사랑은 역겨워.’
홀로 고개를 젓는데 어느새 성큼 다가온 돌로레스가 그의 등을 꼭 안았다.
“…….”
“옷을 다시 입으시죠.”
등에 맞닿는 생생한 피부의 감촉에 알렉세이가 인상을 썼다. 아마도 망토 안에 옷을 입고 있지 않은 게 분명했다.
“싫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공작님.”
“……하.”
이런 일은 언제나 그의 예상을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 벗은 몸으로 사내에게 달려들면 모든 일이 해결될 거라고 믿는 게 한심했다.
게다가 이건 사랑이 아니었다.
그저 갖지 못한 것을 탐하는 욕심에 불과했다.
“거짓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어요. 당신도 내게 첫눈에 반했다는 것을 부인하지 말아요. 우리는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 그것도 황제 폐하가 이어 준 인연인걸요. 안 그래요?”
점점 그의 허리를 강하게 옥죄어 오는 돌로레스가 큰 소리를 냈다. 그녀는 카스피언 공작이 벌써 결혼했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오프리 카스피언을 그녀의 남자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나는 한 번도 지는 게임을 해 본 적이 없거든.’
“불쾌하니까 떨어져!”
자꾸 몸을 밀착해 오는 게 징그러워서 알렉세이는 힘을 주어서 그녀의 품에서 벗어났다. 성질 같아서는 그녀를 그대로 저 멀리 숲까지 집어 던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퍽 아쉬웠다.
“나를 좀 봐 줘요.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눈이 썩어 버릴 것 같군!”
얼른 망토를 집어 든 알렉세이는 그녀의 몸을 가린 후에 목에 리본을 친친 묶었다.
“이러지 말아요! 제발!”
고래고래 악을 쓰던 돌로레스가 그대로 혼절했다.
본래의 얼굴로 돌아온 알렉세이는 문을 벌컥 열고 병사들에게 돌로레스를 떠넘겼다.
“당장 데리고 가!”
카스피언 공작의 집무실에서 나온 정체불명의 붉은 머리 사내의 기세에 놀란 병사들은 일단 그들의 아가씨부터 챙겼다.
* * *
아침에 눈을 떠서 식당으로 내려가자 지오프리가 먼저 서류를 검토 중이었다. 평소보다 가벼운 차림을 한 그의 모습은 색달랐다. 통이 넉넉한 검은 바지에 가슴에 엑스 자로 끈이 달린 풍성한 셔츠를 걸친 채였다.
‘아침부터 후광이 장난이 아니야.’
지오프리의 미모에 흠뻑 빠진 미오가 가만 서 있는데, 그가 고개를 들었다.
“늦잠을 잤군.”
“네. 침대가 푹신해서―.”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일찍 눈을 떴지만, 낯선 방에서 한참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심장이 진정되지 않아서, 시간이 제법 걸렸다. 이렇게 공기부터 낭만적인 카르티아 성에서 반지까지 받은 터라, 어제 미오는 솔직히 기대했었다.
‘이런 곳에서 그대를 안고 싶지는 않아.’
그녀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충분히 끌렸고, 합법적인 부부였다. 지오프리가 그녀에게 방을 안내해 주고 사라졌을 때, 하마터면 그의 옷을 붙잡을 뻔했다.
‘조금 있다가 다시 볼 수 있을까.’
씻고 로렌이 준비해 준 붉은 잠옷을 입은 미오는 침대 중간에 앉아서 문만 쳐다봤다. 결국, 너무 피곤해서 중간에 잠들었고 다시 그를 만난 것이 지금이었다.
‘진짜 사람 들었다 놨다 하는 데 소질이 있어.’
미오는 간밤에 그를 기다렸다는 것을 알려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턱을 쳐들고 자리에 앉은 그녀는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빵은 부드러웠고, 과일은 싱싱했다. 이런 단순한 것들이 삶을 얼마나 윤택하게 만들어 주는지 이번에 충분히 배웠다.
“피곤할 테니 오늘은 성에서 쉬는 게 어떨까.”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지오프리가 입을 뗐다.
‘일 중독인 거 누가 몰라?’
피곤한 것은 사실이었고, 이곳이 몹시 궁금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유 없이 오기가 생겼다. 그가 저 지긋지긋한 서류를 그만 보게 만들고 싶었다.
‘기필코 말이야.’
“전혀 안 피곤한걸요. 저 이곳을 구경하고 싶어요. 가능하면 시장 같은 곳 말이에요.”
마차를 지날 때 봤는데 처음 보는 간식이 거리에 많았다.
“시장 구경이라…….”
뜻밖의 말에 놀랐는지 지오프리가 손으로 이마를 살짝 문질렀다. 그는 안경을 벗어서 내려 둔 후 하인을 불러서 뭐라고 지시했다.
“그 차림으로는 더울 테니 드레스를 갈아입고 잠시 후에 만나지.”
“……어.”
분명 뭐라고 타박을 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쉽게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마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약간 독특한 억양을 가진 하녀가 어디선가 불쑥 나타났다. 미오를 드레스 룸으로 데리고 간 하녀는 옷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얼떨결에 고른 드레스를 입고 나오자, 하녀가 허리 뒤로 리본의 매듭을 지어 주었다.
“마님. 어떠세요?”
“……!”
면으로 만든 베이지색 드레스는 입지 않은 것처럼 가벼웠다. 사각으로 파인 목 주변에는 레이스로 데이지꽃이 자수 놓여 있었고, 소매와 드레스 끝단도 같은 형식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허리가 잘록하게 처리되었고 풍성한 소매와 좁은 치마폭이 카스피언에서는 본 적 없는 형식이었다.
“이 보닛을 쓰시면 될 것 같습니다.”
베이지색에 레이스가 달린 보닛을 건네받은 미오는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이런 곳에 그녀의 몸에 꼭 맞는 드레스가 있는 거지.
“혹시 이 드레스는 누구의 것인가요?”
“옷장의 모든 드레스는 공작님 분부에 따라서 마님 치수에 맞춰서 주문한 것들이랍니다.”
하녀의 답에 미오는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도대체 언제 이런 것을 준비한 거지.’
결혼하겠다고 한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도르프까지 오는 데만 사흘이 걸리지 않았나.
‘진짜 보기보다 음흉한 구석이 있다니까.’
그녀가 결혼하자고 제안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음흉한 게 아니라, 오만한 건가.’
혼자서 지오프리의 흉을 잔뜩 보다 보니 1층에 내려오게 되었다.
“여기는 빛이 강하니까 이거 말고 챙이 더 넓은 모자를 가져오도록.”
미오가 쓴 작은 보닛을 본 지오프리의 지시에 하녀가 재빨리 사라졌다.
‘오늘 지오프리는…….’
그림에서나 본 해적 선장 느낌이었다. 품 넓은 셔츠에 걸친 가죽 조끼, 무릎까지 오는 부츠에 검은 바지. 게다가 사나운 눈빛을 반쯤 가린 챙 넓은 검은 모자가 묘하게 어울렸다.
‘도대체 안 어울리는 게 뭐야.’
“마님. 이걸로 바꿔 쓰시는 것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챙이 엄청나게 넓은 라탄 모자는 목 아래에 넓은 끈으로 고정하게 되어 있었다.
“여기는 마차에 지붕도 없네요.”
바람에 모자가 날아갈 것 같아서, 모자를 꼭 붙든 미오가 혼잣말했다.
“카스피언과 많이 다른 곳이지.”
성에서 시장은 그리 멀지 않은지, 금방 마차가 속도를 줄였다.
“여기는 순진한 사람의 코도 베어 가는 악당이 있다고 하는데 괜찮겠어?”
먼저 마차에서 뛰어내린 지오프리가 짓궂은 농담을 건넸다.
“……코를요?”
손으로 더듬더듬 코를 매만지던 미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시장 초입인데도 벌써 사람들의 차림이 남달랐다. 목에 금목걸이를 주렁주렁 달고 맨발로 다니는 사내. 반바지만 걸쳤는데 허리에 반월처럼 생긴 검을 찬 사내도 있었다.
“내 아내가 용감한 줄 알았는데 말이야.”
“누가 안 내린다고 했어요?”
지오프리의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한 미오가 턱을 쳐들었다.
“내 팔을 잡아.”
그가 그녀를 향해서 팔을 내밀었고, 미오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붙들었다. 그리고 가슴을 쫙 편 채 그를 향해서 씩씩하게 외쳤다.
“출발하죠!”
설렘과 두려움이 가득한 미오의 눈이 낯선 거리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