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카타니아 성에서의 청혼
바퀴를 수리한 마차에 올라탄 미오는 달리는 내내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일 중독자답게 지오프리는 마차에서도 서류를 뒤적대고 있었다.
‘지금 일이 손에 잡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허름한 여관에서의 하룻밤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자 입술이 따끔거릴 정도였다.
‘진짜 미친 거 아냐?’
앙겔라스가 아니라 지오프리가 덩치가 큰 개가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밤새 지치지도 않고 입을 맞춰 오는데 그녀는 언제 잠들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숨이 막혀서 기절했던 것 같기도 하고…….’
술을 두 잔 마셔서 약간 어지럽기는 했지만, 불행히도 기억력은 멀쩡했다.
‘각인열이 아니었다는 건데, 그러면 왜 그렇게 열이 올랐던 거지?’
게다가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진짜 결혼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것도 그녀가 지오프리를 좋아하는 동안 유지된다는 단서를 특약으로 넣어 뒀단다. 누군가와 사귀어 보거나 진지하게 마음에 품어 본 경험은 없어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그건 지오프리는 나를―.’
예전 같았으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면서 고개만 저으면 그만이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밤새 그녀의 어깨에 코를 파묻던 그의 격렬한 몸짓과 가쁜 숨이 귓가에 생생했다.
‘미오, 그대로 있어.’
잠시 떨어질라치면 입술을 포개 오던 다정한 몸놀림과 끝도 없이 불러 대던 이름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뭐야. 나 목표를 이룬 거잖아.’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미오의 눈이 커다래졌다.
오만한 지오프리를 유혹해서 보기 좋게 차 버리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어째서 기분이 하나도 좋지 않을까.
‘그럼 나는 이제 어쩌면 좋은 거지.’
어쩌자고 결혼을 덜컥 해 버렸을까.
어쩌자고 그를 이토록 사랑하게 된 걸까.
어쩌자고 어제 그의 입맞춤을 받아 준 걸까.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들었지만, 미오는 제대로 알고 있었다. 다시 시간을 돌릴 수 있어도 지오프리를 사랑하지 않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수천 번이라도 저 사람에게 마음을 뺏길 거야.’
게다가 입맞춤을 받아만 줬다고 보기에는 그녀가 지나치게 적극적이었다는 기억도 선명했다.
‘복잡한 생각은 그만하자.’
지금은 그의 옆에서 이 여행을 오로지 즐기는 것이다.
이제까지 그만큼 고생했는데, 이 정도의 추억은 욕심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다 머리가 다 빠지겠는데―.”
“……네?”
어느새 서류를 내려 두고 그녀를 응시하던 지오프리가 턱으로 미오의 손가락을 가리켰다. 몰랐는데 손가락으로 머리를 감아서 계속 잡아당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왜 그렇게 피곤해 보이지?”
“하.”
어쩜 뻔뻔하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지?
기가 막혀 미오가 입만 크게 벌리자, 그가 창문 밖을 응시하면서 쓸쓸한 음성을 냈다.
“날 두고 일찍 잠들지 않았나?”
“절대 일찍 잠든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시간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입맞춤만 두어 시간은 했던 것 같다.
“남은 사람이 어땠을지 생각해 보면 그런 말 못 할 텐데.”
“뭐라고요?”
그녀를 쳐다보고 있지는 않지만, 왠지 투덜대는 느낌이었다.
‘더 함께 있고 싶었는데, 서운했다는 거야?’
지오프리가 그녀를 정원의 잡초만큼도 생각하지 않았을 때는 그것대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도무지 그를 유혹할 수 없을 것 같았고, 두 사람의 접점을 평생 찾을 수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그가 그녀를 향한 애정을 드러내자 이건 이것대로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진심은 아닐 거야.’
그렇게 애써 지오프리의 말을 그녀 편한 대로 해석했다. 그러지 않으면 너무 머리가 복잡해질 것 같았으니까.
* * *
사무엘이 침대에서 눈을 뜨자 천장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아이고, 어쩌자고 그리 술을 마신 거예요?”
옆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던 로렌이 얼른 마실 것을 건네주었다.
“고맙습니다. 우욱.”
상체를 일으키는데 다시 머리가 빙그르르 돌아서 사무엘은 침대 헤드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사흘이나 잠든 거 알고나 있어요?”
“……네?”
사무엘은 카스피언 공작가에 들어와서 단 하루도 게으름을 부린 적이 없었다. 빼어난 재능은 없었지만 성실함 하나만큼은 자부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믿을 수 없어서 그가 눈을 끔뻑대자 로렌이 혀를 찼다.
“대공 각하는 다음 날 멀쩡히 일어나셔서 일을 처리하고 계신다우.”
“……아.”
그러고 보니 대공이 술을 권할 때 책임지겠다고 큰소리를 치기는 했다.
“지금 그 꼴을 해서는 침대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겠구려. 조금 더 누워 있어요. 어차피 일이야 대공 각하가 잘 처리해 주고 계시니까.”
“아, 떠나신 지 사흘이 지났으니 공작님이 도르프 제국에 도착하셨겠네요.”
사무엘의 말에 로렌이 활짝 웃었다.
“두 분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몰라요. 우리 아가타 님이 살아 계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카스피언 공작이 자리를 비웠으나, 공작가의 일상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마사의 소년은 말의 배설물을 수레에 실은 후에 바닥에 잘 마른 볏짚을 깔아 주었다. 정원사는 장미의 웃자란 가지를 쳐 내고 있었고, 주방에서 케이가 부르는 콧노래가 간간이 들렸다.
그때 작은 소란이 일었다.
“버드만 아가씨, 송구하나 지금은 공작님을 만나실 수 없습니다.”
예고도 없이 카스피언가를 찾은 돌로레스는 그녀를 막아서는 노 집사의 어깨를 그대로 쳐 냈다.
“건방지게 어디서 감히 내 앞길을 막는 거야?”
건장한 호위 기사 둘과 하녀를 거느린 돌로레스는 그대로 층계로 올랐다. 공작의 집무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너희는 여기에서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지키도록 해.”
그녀는 오늘 지오프리 카스피언을 함락할 필사의 각오를 한 채였다.
* * *
쉼 없이 달린 마차가 곧 도르프 제국을 상징하는 관문을 지나쳤다. 도르프 제국은 네 개의 제국 중 가장 남쪽에 있는 터라 공기가 따뜻했다.
“신기해요. 전부 반소매를 입었어요.”
심지어 무릎 정도 길이의 바지를 입은 사내도 있었고, 여인들의 드레스도 소재가 하늘하늘하고 가벼운 것이었다. 시장을 지나치는데 노점에서 파는 과일도 이국적인 것뿐이었다.
“진짜 도르프 제국에 왔구나.”
카스피언 제국을 떠난 것이 드디어 실감 나기 시작했다.
“여기서도 여관에 묵게 되나요?”
지오프리는 첫날 이후로 여관에서 두 개의 방을 잡아서 머물렀다. 입맞춤을 더 못 해서 안달하는 사람처럼 굴 때는 언제고 갑자기 거리를 두자, 미오는 당황스러웠다. 아쉬운 기분이 없다면 거짓말이었지만, 그게 두 사람을 위해서 낫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곳에 내 성이 있다.”
“……아.”
귀족이나 황족은 성이 이곳저곳에 있다고 들긴 했지만, 도르프 제국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차는 빠르게 달려서 번화가를 지나 조금 한적한 곳으로 접어들었다.
“관리가 거의 되지 않아서 조금 어수선할 거야.”
도착하기 직전 지오프리가 착잡한 얼굴로 입을 뗐다. 마차에서 내린 미오는 어떤 말도 하기가 힘들었다.
“그림 같아요.”
뾰족한 첨탑의 성은 커다란 호수를 끼고 있었고 햇살이 잘 드는 고즈넉한 느낌이었다. 성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가 한쪽을 메웠고, 정원에는 다채로운 색상의 꽃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정말 근사해.”
감탄을 멈추지 못한 미오가 천천히 성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렇게 아름다운 성의 주인은 누구일까.
‘우르체카 대공 각하 같은 친구분이 사는 곳일까.’
친척은 거의 카스피언에 있는데, 지오프리와 교류하는 이는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공작님. 여기에는 누가 살아요?”
“지금은 누구도 살지 않지.”
그의 것이라는 고성을 바라보던 미오는 문득 궁금한 게 떠올랐다.
“그럼 원래는 누구의 것이었어요?”
그녀의 물음에 멈춰 선 지오프리가 몸을 돌렸다. 그림 같은 성을 뒤로한 지오프리의 얼굴 위로 햇살이 비추었다.
‘그림의 완성은 역시 미남이구나.’
어디에 서 있어도 잘 어우러지는 지오프리가 그녀를 향해 웃었다.
“왜 이상하게 웃어요?”
잘 안 웃던 사람이 요즘 시도 때도 없이 웃어서 심장이 남아나질 않았다. 갑자기 그대로 무릎을 꿇은 지오프리가 그녀를 빤히 올려다봤다.
“뭐 하는 거예요.”
그는 말없이 미오의 손을 붙들었다.
손끝을 통해서 지오프리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겠지.’
하지만 이야기는 미오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그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무래도 아주 많이 이상한 결혼이었다.
혼인서에 서약하고, 결혼식은 없이 신혼여행을 왔고, 이제는 반짝이는 반지까지.
“이곳에서 주고 싶었거든.”
그제야 결혼했지만, 반지도 하나 없는 휑한 그녀의 손이 의식되었다.
“여기가 어디길래…….”
“우리 어머니의 성.”
“……아.”
가끔 로렌이 향수병에 시달리고는 했다던 아가타 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오프리의 어머니는 이곳 출신이었구나.
‘어머니의 성에서 굳이 이 반지를 주려는 이유가 뭐지.’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었는데,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가락에 이미 반지가 끼워진 후였다.
“……와.”
은색의 링에 작은 흑요석이 어지럽게 박혀 있어서, 흡사 밤하늘 같은 느낌을 주는 반지였다.
“이리로 와.”
지오프리는 그녀의 손을 잡고 성 옆으로 난 전망대를 오르기 시작했다. 발코니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건너편에는 산이 있었고, 반짝이는 호수 안에는 성이 비쳤다.
부서지는 햇살 속에서 두 사람은 잠깐 말이 없었다.
“이곳을 그대에게 주겠다.”
“네?”
놀란 미오의 음성에 호수를 유유히 떠돌던 새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결혼 선물로…….”
그 말을 건넨 지오프리가 난간에 몸을 기댄 후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그의 붉어진 귀가 신경 쓰여서 미오는 더 말을 건넬 수 없었다. 도르프의 온화한 기운이 두 사람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