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3)
‘그가 잠들면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도저히 이 가운을 걸치고는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드레스로 갈아입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베갯잇을 꼭 쥔 미오가 귀를 세운 채 눈을 꼭 감았다.
“피곤하다더니 벌써 잠든 건가.”
‘도대체 언제까지 질문을 퍼부을 작정이야!’
어쩐지 지오프리가 점점 그녀 쪽으로 넘어오는 것 같았지만, 꼼짝할 수 없었다. 지금 대꾸하면 잠든 척한 것이 헛수고가 되니까.
“얼마나 추우면 가운을 걸치고 잔다는 거지.”
이제 그의 음성이 지척에서 들렸다.
아마도 몸을 돌리면 그녀의 얼굴이 바로 지오프리의 가슴에 닿을 만큼.
“내가 저번에 사냥터에서 다쳤을 때 말이야. 나를 구해 주고 보살펴 준 은인이 있었는데…….”
잔잔한 그의 음성에 미오의 온 신경이 쏠렸다.
‘설마 아직도 라비니아가 구해 줬다고 믿고 있는 건 아니겠지?’
“폭포 뒤 동굴이라 밤에는 퍽 추웠지. 그때 이렇게 하니까 체온이 유지되던데.”
불쑥 그의 커다란 손이 미오의 허리를 감더니 그녀를 뒤에서 안았다.
“……!”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고 순간 숨을 참아야만 했다.
“이런 방법은 전장에서도 흔히 쓰이기도 하지. 누군가의 체온만큼 따뜻한 것은 없는 법이니까.”
술기운에 몸이 더운 데다, 꽉 조이는 잠옷 위로 가운까지 걸친 상태라 지오프리가 꽉 껴안자 미오는 현기증이 났다.
‘떨어지라고! 저리 가!’
“어때? 아직도 추운가?”
귓가에 닿는 그의 음성에 배 속에서 나비가 날갯짓하는 기분이 들었다. 순간 지금 느껴서는 안 될 기이한 감정에 눈 뜬 미오가 질겁했다.
‘안 돼! 아니야! 지금은 절대 아니야!’
시기상으로 따져 봐도 마지막으로 각인열이 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닐 거야.’
베갯잇을 붙드는 것으로는 떨림을 참을 수 없어서 미오는 무심결에 끙 소리를 냈다.
“많이 아픈가.”
“하지 마―.”
그가 돌연히 그녀의 몸을 돌려 눕히는 바람에 미오가 소리를 꽥 질렀다. 그 바람에 땀에 젖은 흉한 얼굴을 보이고 말았다.
“진짜 왜 그래요!”
입술을 짓이기던 미오가 그에게 따져 묻자 지오프리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뭘 잘못했지? 머리도 말려 줬고, 추운 것 같아서 안아 준 건데……. 얼굴을 보니 추운 게 아니라 더워 보이는데? 열이 있는 것 아닌가?”
열이 있냐면서 그가 불쑥 자기 이마를 미오에게 대는 바람에 그녀는 침대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갑자기 그렇게 가까이 오면 어떡해요!”
그녀가 투덜대자 미오의 허리를 붙든 지오프리가 고개를 갸웃댔다.
“오늘따라 화를 자주 내는 것 같은데…….”
‘오! 디아나 신이시여! 왜 그에게 미모와 검술 빼고는 아무것도 내려 주시지 않았나요!’
미오는 정말 가슴을 쾅쾅 두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상황을 빨리 정리하고 잠을 자는 게 최선일 터.
“저 이제 안 추워요.”
그녀는 이불을 폭 덮고는 그 속에서 가운을 벗어 내렸다. 시원한 바람이 느껴지자 날아갈 것만 같았다.
“자! 보셨죠? 이제 우리 자요.”
“뭔가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나?”
“또 뭐가 있죠?”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 당긴 미오가 이를 악물었다.
“우리는 지금 신혼여행을 온 건데…….”
“하지만 이건 서류상으로―.”
“나를 누가 위협한다고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할 사람으로 봤나?”
그건 몹시 지오프리답지 않은 일이었다.
‘죽으면 죽었지, 강제로 시키는 걸 고분고분히 할 성격은 아니야.’
미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서류에도 있지만, 그대가 나를 원하는 동안은 이 결혼은 유효해. 그러니 지금 신혼여행은 진짜야.”
지오프리의 폭탄선언에 미오의 등에서 다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저런 말을 들어 버렸으니 어쩌나.
“그렇다고 치면요.”
도대체 그가 원하는 것은 뭘까.
“이런 곳에서 그대를 안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명색이 초야에…….”
초야라는 단어에 미오는 정말이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언젠가 본 적 있던 지오프리의 벗은 몸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숨 막히던 입맞춤까지…….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아.’
이대로 입술이라도 겹치게 된다면 지금 입은 엄청난 잠옷을 들킬지도 모른다. 게다가 지오프리와 달리 그녀는 자제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이제까지 몇 번이고 끓어오르는 본능을 참아 왔으니까.
‘지오프리의 어깨에 이를 콱 박고, 그의 입술을 밤새도록 탐하고 싶어.’
생각만 해도 황홀한 상상이 아닐 수 없었다.
“……미오.”
그녀 옆에 비스듬하게 누운 지오프리가 입을 뗐다. 그가 불러 주는 그녀의 이름은 언제나 특별했다.
간질간질한 기분에 감고 있던 눈을 뜨자 그녀를 내려다보는 지오프리를 볼 수 있었다.
‘……어쩜.’
평소 내리고 있던 앞머리를 죄다 위로 한 지오프리의 얼굴은 야성미가 철철 흘러넘쳤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곧장 촉촉하고 붉은 입술에 고정되었다.
‘입맞춤을 미리 해 둬서 나쁠 게 없긴 하지.’
갑자기 여우로 변하면 낭패니까 말이다.
예전에는 밤에 몰래 숨어들어서라도 하고 싶었던 입맞춤인데 어쩌다 이렇게 망설여지게 된 건지 모른다. 그때 지오프리의 목울대가 꿀렁대는 것을 확인한 그녀의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
“뭐예요. 나한테는 침 흘린다고 놀려 놓고…….”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서 미오가 가벼이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지오프리가 몸을 완전히 그녀의 위로 움직이면서 싱긋 웃었다.
“정확하게 봤어.”
“……에?”
미오가 바보처럼 묻는데 그의 입술이 밤하늘 별빛처럼 사뿐히 내려왔다. 아주 가볍게 맞물린 입술은 젖은 마찰음을 내면서 떨어졌다.
“아까 마차에서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다.”
깊게 잠긴 그의 음성에서 숨겨진 열망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미오는 지오프리의 강렬한 시선만으로 질식하는 것 같았다. 입술을 달싹대던 미오가 그에게 뭐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지오프리가 그녀의 머리를 쓸어서 귀 옆으로 넘겨 주었다.
“나를 계속 좋아하도록 해.”
주문과도 같은 그의 말에 미오의 호박색 눈에 몽환적인 기운이 서렸다. 굳이 그가 이리 말하지 않아도 미오는 어차피 이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좋아하려고 좋아한 것도 아니란 말이야.’
불순한 의도를 품고 시작했던 관계지만, 언제 이렇게 진심이 되어 버렸나 모른다.
‘그러니까 입맞춤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이불을 쥔 손을 슬쩍 뗀 미오가 고개를 살짝 들어서 그의 입술에 입을 가져갔다.
“이건 그 대답인가?”
새들이 나눌 법한 가벼운 입맞춤에 지오프리가 손가락으로 입술을 나른하게 쓸었다.
“공작님을 좋아해요.”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미끄러지는 것을 보면서 미오가 속삭였다.
“불은 끄는 게 좋겠군.”
지오프리가 머리맡에 둔 단도를 날려서 불을 꺼 버렸다. 이윽고 침침한 어둠에 잠긴 침실에 반짝이는 것은 오직 두 사람의 눈빛뿐이었다.
“……흡.”
거칠게 다가온 그의 입술이 미오의 숨을 모조리 앗아 갔다. 포개진 입술 사이로 춥춥대는 소음이 커졌다. 숨이 막혀서 미오가 손을 뻗어 그를 막아 보려 했다.
“미오, 조금만 더…….”
아예 양손을 결박해서 머리 위로 누른 후 그가 다시 입술을 겹쳐 왔다. 뜨거운 숨결이 서로의 입술을 넘나들었고, 누가 내는 탄성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몰두했다.
“지오프리, 나 숨이―.”
“다시 지오프리인가?”
그의 낮은 음성에 미오는 두려워졌다.
‘이대로 더 있다가는 내가 아니게 될 것만 같아.’
혼란스러운 눈으로 지오프리와 방을 둘러보았지만, 달아날 곳은 없었다.
방은 너무 작았고, 침대는 더 작았으니까.
‘아니, 이제 달아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몰라.’
달빛을 받은 그의 어깨가 탐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닿는 곳을 확인한 지오프리가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또 그런 눈빛이군.”
“……내가 뭘요.”
“뭘 원하는 거지?”
이성이 반쯤 달아난 미오는 진짜로 원하는 것을 털어놓았다.
“깨, 깨물어도 될까요?”
“……뭘 말이지?”
그렇게 되묻는 지오프리가 슬쩍 어깨를 그녀 쪽으로 비스듬하게 내려 주었다. 미오는 손을 뻗어서 그의 단단한 어깨선을 쓸었다. 그녀의 손길에 탄탄한 근육이 움찔대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이러다가 참지 못할지도 모르겠군.”
탁해진 음성을 뱉은 지오프리가 그녀의 손을 낚아채서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에게 사로잡혀서 몸을 꿈틀대는데, 어깨가 심하게 파인 느슨한 잠옷이 한쪽으로 흘러내렸다.
“이렇게 예쁜 옷을 입었는데, 왜 꼭꼭 숨기고만 있었지?”
“언제 이불이…….”
잘 가리고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미오는 새하얀 레이스로 만들어진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긴 소매에 가슴이 몹시 파인 것이었다. 레이스가 촘촘하지 않아서 조금이라도 빛이 닿는다면 속이 훤히 비칠지도 몰랐다. 손으로 가슴께를 가리면서 그녀가 속삭였다.
“보지 말아요.”
그녀의 봉긋한 가슴이 얄따란 잠옷 밑에서 팔딱팔딱 뛰었다.
“정말 예뻐.”
달뜬 그의 음성에 그녀가 눈을 감아 버렸다.
보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면 지금 이 고난을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나는 참지 못할 것 같단 말이야.’
열병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덜덜 떨면서 미오가 제발 그가 이대로 기절이라도 했으면 하고 기도했다. 하지만 몸을 돌린 그녀의 어깨에 닿는 손가락의 감촉에 그럴 수도 없었다.
“뭐 하는 거예요!”
“추울 것 같아서 옷을 정돈해 주려고 했을 뿐인데…….”
그녀의 등에 찰싹 붙은 지오프리가 손가락으로 미오의 목과 등을 쓸어내렸다.
“그게 무슨 정, 정돈이에요.”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불꽃이 피어올랐고, 몸이 덜덜 떨렸다.
“……하.”
어느새 그녀에게 다가온 붉은 입술이 다시금 겹쳐졌다. 그의 굵은 팔은 그녀를 절대로 풀어 주지 않을 작정인지 허리와 등을 꽁꽁 감았다. 숨을 서로 주고받던 두 사람의 눈은 욕망으로 번들대고 있었다.
“……지오프리.”
촉촉한 입술이 그를 부르자, 가쁜 숨을 내쉬던 지오프리가 다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마법 같은 밤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