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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95)화 (95/123)

95화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2)

지오프리에게 더 닿고 싶었고, 그의 시선을 조금 더 사로잡고 싶었다. 그의 차가운 가슴에 이 마음을 아주 조금이라도 전할 수 있기를 바랐다. 동시에 이런 감정을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다.

“두려운 게 아니라면……?”

“그건―.”

더듬대던 미오는 그의 입술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맞닿은 허리에서 시작된 열기가 좁은 방을 가득 채웠다. 지오프리의 손가락이 턱을 시작으로 볼을 부드럽게 쓸자, 그녀의 입술 사이로 기이한 숨소리가 흘렀다.

“아까는 기뻤다.”

아무런 설명은 없었지만, 미오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를 위해서 그렇게 나서 줄 사람이 있을 줄이야.”

“싫어할 줄 알았어요.”

붉은 기가 서린 그의 눈가를 바라보면서 미오가 더듬댔다. 무모하게 나서서 사고만 치는 그녀를 미워할 줄 알았다.

“왜 그런 생각을 했지?”

지오프리가 나지막하게 속삭이면서 그녀의 허리를 움켜쥔 찰나였다.

“나리, 문을 좀 열어 주시겠습니까.”

“흠, 흠.”

바깥에서 들린 여관 주인의 음성에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면서 떨어졌다. 지오프리가 문을 열었고, 그녀는 얼른 창가 쪽에 다가섰다.

“가방과 분부하신 것을 준비해 왔습니다.”

“수고했네.”

여관 주인장은 금방 사라졌고, 다시 방은 어색한 침묵에 잠겼다.

“방이 왜 이렇게 답답하지?”

미오는 이런 이상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창을 열기로 했다. 하지만 잔뜩 녹슨 데다 아귀가 맞지 않는 창을 여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끙끙.

“그러다 손이라도 다치면 어쩌려고.”

그녀를 가벼이 밀어 낸 지오프리가 창을 손쉽게 열었다. 이내 바깥에서 신선한 바람이 들어와서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 줬다.

“바람이 따뜻해요.”

조금 남쪽으로 내려왔을 뿐인데 볼에 닿는 바람의 냄새와 맛이 달랐다.

“여행이 꼭 처음인 사람처럼 구는군.”

“……그게.”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망설여졌다.

카스피언 제국에서도 북쪽에 있는 황량한 숲 외에는 가 본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카스피언 공작령에 갔던 일이며 그와 함께했던 모든 것이 특별했다.

“적어도 신혼여행은 처음인 거겠지?”

“당연하죠!”

말도 안 되는 질문에 그녀가 버럭 성질을 냈다.

“이제야 좀 그대답군.”

장난기 섞인 지오프리의 음성에 미오는 그가 장난을 쳤음을 깨달았다.

‘휘둘리고 싶지 않은데…….’

그의 말, 눈빛 하나에 휘청대기만 했다.

달콤한 밤바람에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실려 들어왔다. 창밖으로 몸을 내민 미오가 노래의 주인공을 찾으려고 목을 길게 뺐다. 조금 멀리에 분수대가 하나 있었고, 그 주변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누군가는 시턴을 연주했고, 다른 이들은 노래를 불렀다.

“저것 좀 봐요.”

평범한 밤의 풍경을 제대로 본 적 없던 미오의 가슴이 두근댔다.

‘이게 평범한 이들의 시간이구나.’

그리고 지금 미오는 그들의 시간에 발을 들인 것이다.

“이게 이곳 특산품이라고 하던데―.”

작은 잔에 술을 따라 온 지오프리가 그녀에게 내밀었다. 유리잔에는 투명하지만 연한 푸른빛이 감도는 술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술은 마시지 말라고―.”

언젠가 그가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났다.

“나와 함께는 괜찮아.”

“……음.”

다른 사람과는 안 되고, 그와 함께는 되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웃겨. 정말.’

목이 너무 탔던 그녀는 잔을 들고 그대로 들이켰다. 차가운 술은 매끄럽게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약간 달콤한 뒷맛이 있는 술을 들이켜자, 지오프리가 퍽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 잔 더 하겠어?”

바깥에서 들리는 음악 소리와 달곰한 술은 무척 조화로웠다.

“약간 주스 같은데.”

혀끝에 감도는 단맛이 딱 베리를 설탕에 푹 절인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한 잔 더 마시고 나자 주스 같다는 생각을 금방 지울 수 있었다.

“성에 있는 것보다 독한 것 같아요.”

“아마 그럴 거야.”

남은 술을 죄다 들이켠 지오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씻는 게 좋겠군.”

“……네?”

술기운이 달아오르려는 찰나 씻는다는 이야기에 그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여관 주인이 애써 가져다준 더운물을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좁은 방에는 천으로 만든 가림막이 둘러져 있었고, 그 뒤로 작은 욕조가 하나 있었다. 욕조가 있는 유일한 방이라서 이 여관에서 제일 좋은 방이라고 한 것도 과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좀―.”

“얼른 씻고 와. 나도 씻어야 하니까.”

물이 식는다면서 그가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잠깐만요. 잠깐만.”

가방에서 갈아입을 옷을 챙긴 그녀가 가림막 뒤로 쭈뼛쭈뼛 들어섰다.

우리 지오프리가 달라졌어요! 를 보는 기분이 이럴까.

원래 저런 사람이었나.

술을 마셔서 조금 어지러워지기 시작한 그녀는 머뭇머뭇 옷을 벗어서 가림막에 걸쳤다. 그리고 미오는 간이 욕조 앞에서 몸에 물을 뿌렸다.

‘욕조는 하나뿐이고, 더운물도 이게 전부라면―.’

그도 이 욕조에 몸을 담근다는 걸까.

벌거벗은 지오프리를 상상하지 않으려 갖은 애를 쓰던 미오는 재빨리 목욕을 끝냈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가운을 걸친 후 밖으로 나오자 창밖을 응시하는 지오프리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흰 셔츠와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저대로 훌쩍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

지금 저 아름다운 풍경을 꼭 기억하고 싶다.

이곳에서의 그녀의 기억은 빈틈이 너무 많았다. 꼭 기억하고 싶은 것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누가 죽였는지, 아니 왜 죽었는지 그런 것을 잊은 채 매번 새로이 시작했다.

‘지오프리에게 반하고, 깊은 사랑에 빠졌지.’

“……아.”

그때 지오프리가 돌아보는 바람에 그녀는 후다닥 침대로 뛰어들었다. 별말 없이 가림막 뒤로 사라진 지오프리는 조용히 옷을 벗었다.

“……헙.”

누군가 옷을 벗는 소리가 이렇게도 야한 거였나.

가림막 위로 그의 셔츠와 바지가 걸쳐지더니 바닥으로 검집이 툭 떨어졌다. 차가운 금속성 소음에 미오의 가슴이 쿵 울렸다.

“정신 차려.”

이불 밖으로 나온 미오는 열심히 머리를 말렸다. 하지만 참방, 물 튀는 소리가 나자 다시 귀가 절로 쫑긋 세워졌다.

‘토끼, 토끼라도 세자.’

무릎을 끌어안은 그녀가 머릿속으로 귀여운 토끼를 세기 시작하는데, 노력이 무색하게 5백 마리도 세기도 전에 가림막이 삐걱댔다.

지오프리가 천으로 머리를 털면서 그녀에게 다가섰다. 미오는 최대한 그를 보지 않기 위해서 몸을 돌린 채였다.

“머리를 제대로 말리는 법이 없군.”

그가 침대 위로 올라왔다.

“아, 아니, 왜 여기에…….”

당황한 미오가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오래된 침대에서 삐걱대는 소음이 울렸다. 한쪽으로 기우는 침대 위에서 미오의 몸도 기우뚱했다. 이곳의 침대는 공작가에 있던 구름 침대의 발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형편없었다.

어느새 그녀의 뒤에 자리한 지오프리는 천으로 미오의 머리를 닦아 주었다.

“제가 할 수 있어요.”

낯선 곳, 작은 방, 하나의 침대, 꺼질 듯이 위태로운 불빛 하나.

더운 열기를 뿜어내는 육체가 주는 기이한 감각에 미오의 등이 옹송그려졌다. 하지만 그녀의 만류에도 지오프리는 머리를 닦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다 된 것 같군.”

미오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움켜쥔 그가 속삭였다. 이렇게 더 앉아 있다가는 그녀의 몸이 녹아내리거나, 호흡 곤란으로 죽어 버릴 것 같았다.

“피곤할 테니 그만 자는 게 어때요.”

이것도 말하고 보니 역시나 이상했다.

“밤이 깊어지긴 했으니…….”

지오프리가 그대로 옆자리로 옮겨 갔다. 가운을 훌렁 벗어서 바닥에 던진 후에 벌러덩 눕자 침대가 다시 한번 기우뚱했다.

“여기서 자려고요?”

“……그럼?”

태연한 그의 대꾸에 미오가 좁아터진 방을 둘러봤다. 아무리 봐도 사람이 누울 만한 다른 공간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바닥에서 잘 수는 없잖아.’

청소 상태가 좋지 않은 바닥을 떠올린 그녀가 몸서리쳤다.

‘아! 진짜 어쩌란 말이야…….’

이런 그녀의 절망적인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분수대에서 흥겨운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래. 한 침대에서 자는 게 처음도 아닌데 뭐.’

지오프리와 아침에 눈을 뜬 게 벌써 여러 번이라서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뭐 해?”

여전히 가운의 앞섶을 꼭 쥔 그녀가 가만 앉아 있자, 지오프리가 베개를 툭툭 두드리면서 누우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는 잠이 안 와서요. 먼저 자요.”

“방금 피곤하다고 하지 않았나?”

하여튼 뭐든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깐깐하고, 집요하다니까…….’

미오가 툴툴대면서 그대로 배게 위에 웅크려 눕자, 지오프리가 몸을 그녀 쪽으로 틀었다. 손가락 하나를 뻗어 그녀의 등을 툭툭 쳤다.

“춥지도 않은데 그걸 걸치고 잘 건가?”

“그래요? 저는 조금 추운데…….”

사실 춥기는커녕 등에 다시 땀이 날 지경이었다. 술을 마신 후 더운물에 씻었더니 머리도 빙글빙글 돌았다.

‘하지만 가운은 절대 벗을 수 없어.’

분명히 짐을 정리하면서 로렌이 준비해 준 잠옷을 죄다 빼고, 단정한 것을 넣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가방에는 망사로 만든 것과 레이스가 치렁치렁한 잠옷만 들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멀쩡한 것을 고르기는 했지만, 지오프리에게 죽었다 깨어나도 보여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아직 추운 건가?”

“창문이 부실해서 바람이 엄청나게 들어오는 것 같아요.”

창문이 덜커덩대긴 했지만, 카스피언처럼 매서운 바람은 불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미오의 등이 축축하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술기운이 오르는지 점점 볼도 달아올랐다.

“계속 등을 돌리고 있을 건가?”

“…….”

그녀가 알던 지오프리가 저렇게 말이 많았던가.

미오는 잠든 척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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