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1)
“에이! 설마. 버드만 후작님과 베일 백작님이 그걸 가만뒀으려고?”
너무 엄청난 이야기에 몇몇은 의구심을 품었지만, 사실 여부는 크게 중요한 게 아니었는지 다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난잡한 생활을 한다더군. 변방에서도 평민 계집을 밤마다 품고는 죽여 버렸다고…….”
“정말 지독한 작자군.”
“그러니 황태자의 자리에서 쫓겨난 거지.”
“그 어미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딱 맞는 거야.”
어떻게든 참아 보려고 했던 미오의 눈이 그대로 뒤집혔다. 얼굴을 온통 가리고 있던 검은 망토를 뒤로 젖힌 그녀는 그대로 사내들이 모인 탁자로 걸어갔다.
“이 아가씨는 못 보던 얼굴인데?”
두 주먹을 꼭 쥔 미오의 얼굴을 살피던 사내가 휘파람을 불었다.
“제법 예쁜 얼굴이야. 귀족인가? 응?”
미오가 걸친 그리 비싸지 않은 드레스를 보면서 가난한 가문의 귀족가의 영애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벌레 같은 놈들, 가족을 건드리는 건 용서할 수 없어!’
그들과 대화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미오는 탁자 위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고 가장 비열한 방식으로 지오프리를 씹어 댄 사내의 머리를 내리쳤다.
순식간의 일이라서 모두가 숨을 죽였다.
“아니! 이 계집이 미친 건가?”
이마가 깨져서 철철 흐르는 피를 손으로 막은 사내가 술기운에 곧장 일어서지도 못하고 씩씩댔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동료들이 다가와서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검집에 손을 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지? 우리가 누군 줄 알고? 오늘 아가씨 잘못 걸렸어.”
비릿한 미소를 띤 사내 몇이 미오를 에워싸려고 하는 찰나에 지오프리가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곧 비명이 나더니 사내들이 차례차례로 쓰러졌다.
“다른 건 괜찮은데, 이 여인을 건드리는 건 안 된다.”
“어디서 잘난 척이야! 보아하니 이 계집의 기둥서방이라도 되는 모양이지?”
지오프리의 아름다운 얼굴을 확인한 사내들이 고함쳤다. 그들이 실컷 씹어 댄 카스피언 공작이 눈앞에 나타났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하는 얼굴들이었다. 동료의 부상으로 흥분한 사내들이 다시 덤비려 하자, 지오프리가 음침하게 속삭였다.
“내가 검을 뽑으면 너희는 모두 죽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미오가 들고 있던 술병을 내팽개치고 지오프리의 팔부터 붙들었다.
“루키우스! 저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미오는 울상만 지었다.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지오프리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에서 손을 뗐다.
“저것 봐. 저도 귀족이라고 까부는 꼴이 우습지도 않구먼.”
언젠가부터 가난하고 힘없는 귀족은 상인보다 대접을 받지 못했다. 여관의 손님들은 값비싼 보석이나 비단으로 만든 드레스를 걸치지 않은 가난한 귀족을 무시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검을 뽑으면 어쩔 건데? 딱 봐도 얼굴만 곱상하니 검 한번 못 잡아 봤을 것 같은데…….”
만취한 사내들에게는 지오프리의 전신에서 풍기는 남모를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전장에서 다져진 탄탄한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 역시 알지 못했다.
“우리가 너를 무서워할까 보냐!”
사내 서넛이 동시에 지오프리의 뒤에서 덤벼들었고, 놀란 미오가 비명을 질렀다. 언젠가의 밤처럼 전혀 동요함 없이 지오프리가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눈을 감고 있어.”
하지만 미오가 무서워하는 것은 술주정뱅이의 공격이 아니었다. 저자들의 도발로 지오프리가 이 여관의 손님을 모두 죽여 버리면 어쩌나 두려웠다. 몸이 조금 아프다고 해도 이런 자들 정도는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으니까.
‘이곳이 커다란 무덤이 될지도 몰라.’
들개 떼에게 쫓기던 밤처럼 그들을 공격하던 자들이 지오프리에게 걷어차여서 벽에 처박혔다. 그제야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님을 깨달은 자들이 비틀거리면서 몸을 피했다.
“이 정도면 치료비로 충분할 테니…….”
지오프리가 품속에서 금화가 든 주머니 하나를 여관 주인에게 던졌다.
“남는 것은 수리비에 보태도록 하시오.”
“아이고, 나리. 어찌 이리 얼굴도 준수하신 데다 마음도 비단결 같으십니까. 저자들은 제 손에서 깨끗하게 해결할 테니 염려 놓으시죠.”
아까까지 함께 카스피언 공작을 욕했던 여관 주인은 갑자기 생긴 돈에 싱글벙글 웃으면서 넙죽댔다.
* * *
여관 주인은 많은 돈을 받고 신이 나서 방으로 안내했다. 양초를 든 주인은 돈 때문에 몹시 흥분해서는 할 말 하지 않을 말 구분도 못 하고 떠들어 댔다.
“아까 그 작자들은 죽여 버려도 무방합니다. 암만요.”
올라가는 계단은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걱대는 소리가 났고, 삭아서 구멍이 난 곳도 보였다. 여관 주인이 안내한 방은 2층의 제일 끝 방이었다.
“이곳에서 가장 좋은 곳인데 특별히 내어 드리는 거랍니다.”
크기는 숲속의 쉼터보다 작았고, 있는 것이라고는 침대 하나와 옷장, 화장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내부가 어두워서 더 자세히는 볼 수 없었다.
“더운물과 술을 좀 더 가져다주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편히 쉬십시오.”
여관 주인이 곧 떠났고, 어두컴컴한 방에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사고를 친 것 같은 기분에 미오는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했다.
“불이, 불이 어딨더라.”
창밖에서 비쳐 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해서 화장대에 놓인 등불에 불을 붙이려고 했다. 하지만 아까의 일로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서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가 하지.”
그녀의 뒤에 다가선 지오프리가 천천히 불을 붙였고, 방은 이내 아늑한 주황색 불로 가득 찼다.
“조용히 있다 가는 게 낫지 않겠냐고 말하지 않았나?”
여전히 그녀 뒤에 꼭 붙어 선 지오프리의 말에 그녀가 말없이 고개만 푹 숙였다. 그런 일을 벌이지 않는 편이 좋았다. 혼자 싸워서 그자들을 모두 상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결국, 뒷감당은 지오프리 차지일 텐데 말이다.
“하지만 아가타 님을 욕하는 건, 그건―.”
로렌에게 하도 들어서 익숙해진 이름이었다. 아가타 님은 빛바랜 초상화 속에서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전 황후이자 지오프리를 낳아 준 분이었다.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잖아.’
늘 글쎄라는 묘한 말로 때우려 들고, 감정을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런 술주정뱅이들의 입에서 어머니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게 괜찮을 리가 없다. 드러내 놓고 화를 내지 못하는 그를 대신해서 미오는 나설 수밖에 없었다.
‘주제넘은 짓이라고 해도 할 수 없어.’
“……공작님.”
여전히 그녀의 몸에 밀착해 있는 지오프리를 살짝 밀어 보았다. 통풍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인지 아까부터 방 안 공기가 조금 텁텁했다. 하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미오는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이제야 결혼했다는 실감이 나는군.”
밀려 나기는커녕 아예 그녀의 어깨를 감싼 지오프리가 미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게, 그게 무슨 말…….”
“아주 용감하더군.”
“말도 안 되는 소리만 잔뜩 늘어놓으니까―.”
망자를 욕보이는 것도 화가 났고, 돌로레스나 라비니아를 언급한 것도 참을 수 없었다.
‘뭐? 두 사람과 동시에 침실에서 나와? 여색에 빠져서 할 일을 내팽개쳐?’
그녀가 보기에 지오프리 카스피언은 심각한 일 중독자였다. 서류를 보고 있지 않으면 병이 나는 그런 부류였다. 게다가 소문처럼 심각한 바람둥이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무엘처럼 숙맥인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녀를 안은 채 속삭이기만 해도 미오는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떠들썩하게 다닐 걸 그랬나.”
“왜 이렇게 신분을 숨긴 거예요?”
지오프리가 천천히 안은 그녀의 몸을 돌렸다. 이제 화장대에 엉덩이를 걸친 채 그의 두 팔에 갇히게 된 미오의 속눈썹이 빠르게 흔들렸다.
“저주받다시피 한 이 이름 옆에 있으면 그대가 다칠까 봐.”
어둠을 타고 온 그를 노리는 자들이 미오까지 노릴까 봐.
지오프리를 욕하는 이들이 아무 잘못도 없는 그녀에게도 돌을 던질까 봐.
그게 두렵고 싫었다.
지오프리의 끝을 헤아리기 힘든 까만 두 눈이 미오를 향해 올곧게 내리꽂혔다. 그의 시선만으로 몸이 타들어 갈 것 같은 밤이었다.
뿌연 거울에 두 사람의 꼭 안은 모습이 어지럽게 비쳤다.
‘……정말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그가 했던 말이 미오의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메아리쳤다.
결혼한 게 실감이 난다든지, 그의 곁에 있으면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렵다든지.
“……하지만 이건 가짜―.”
어쩐지 목이 메서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그녀의 말에 지오프리가 손을 들어서 미오의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더니 불만족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그만했으면 좋겠군. 그 말.”
“공작님!”
“아직도 모르겠어?”
지오프리가 입술을 길게 늘였다. 근사한 그의 모습에 미오는 주먹으로 가슴께를 눌렀다.
“뭘 모른다는 거죠?”
“새로 보낸 서류를 꼼꼼하게 읽어 보지 않은 모양이군.”
이건 또 무슨 이야기지?
황실에 보내는 것 말고 두 사람이 새로 만든 특약을 추가한 서류가 있었다. 미오는 1년이라는 기간 한정 결혼식이라는 부분을 분명 똑똑히 확인했다. 그래서 지오프리 역시 그녀와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했었다.
황제의 명에 따라 결혼하는 걸 피한 후 다음 일을 도모하는 것.
‘그러니까 그의 상대로 내가 제격이지.’
어차피 그녀는 이곳에 속하지도 않았고,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는 존재였다. 그래서 이런 결혼 따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믿었다.
‘내가 사라지면 지오프리가 진짜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면 되니까.’
그녀가 모르는 무엇이 더 있을 리가 없었다.
“제대로 읽었어요.”
“……아닌 거 같은데.”
지오프리가 그녀의 턱을 잡은 채 몸을 깊게 숙였다. 그 바람에 그녀의 몸이 뒤로 휘청댔다.
“나를 좋아한다면서 뭘 그렇게 두려워하지?”
그의 말에 미오는 가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런 건 두려워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