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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93)화 (93/123)

93화 신혼여행 (2)

지오프리가 수줍어하는 모습을 다 보다니, 정말 해가 서쪽에서 떴나 의심이 들었다. 정신을 잃기 전에 그녀가 작게 손을 말아 쥔 후 그의 가슴을 밀어 냈다.

“일단 일어나는 게 좋겠어요.”

하지만 좁은 공간에 거의 낀 상태라서 몸을 세우기도 쉽지 않았다. 지오프리가 팔을 뻗어서 의자를 움켜잡자 두 사람 사이에 약간의 틈이 생겼다. 하지만 굴러갈 여유가 없어서 미오는 그의 아래에서 곤란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아.”

순간 지오프리의 입술에서 짧은 탄식이 흘렀다.

거의 한 달 정도는 잠을 아예 이루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미오와 함께 마차에 오르자마자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그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미오에게 왜 결혼식을 치르지 않았는지, 왜 가문을 숨기고 여행하게 되었는지 들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했고, 잠깐 사이에 이런 일이 있었다.

눈을 뜨자 어떤 연유인지 두 사람은 좁은 바닥에 하나로 뒤엉켜 있었다.

‘곧장 일어나야 했다.’

하지만 미오의 상기된 볼을 본 순간 그럴 수 없었다. 오묘한 빛을 발하는 그녀의 눈 안에 그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분홍빛이 어린 입술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달싹댔다. 가느다란 목선을 훑어 내려가면, 한 팔로 안을 수 있는 허리가 그의 아래에 깔려 있었다.

‘부드러워.’

그의 팔에 닿는 미오의 피부가 녹아내릴 것처럼 뜨거웠다.

그리하여 조금만 더 이렇게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부가 큰 소리를 내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잠시 마차를 세우겠습니다!”

지오프리가 의자를 붙잡고 몸을 일으킨 후 곧장 미오의 허리를 안아서 일으켜 세워 주었다.

“나리, 괜찮으십니까?”

두 사람이 구겨진 의복을 정돈하는데, 마부의 조수가 건너와서 대강의 사정을 전했다.

마차 앞에 작은 짐승이 갑작스레 달려들었고 피하는 바람에 이런 일이 벌어졌단다.

“여기는 아무 일도 없다. 곧장 출발할 수 있겠느냐.”

“아무래도 바퀴가 조금 망가져서 오늘 더 이동하는 것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그럼 가장 가까운 마을로 가도록 하지.”

“분부 받잡겠습니다.”

마차가 힘없이 다시 굴러가기 시작하자, 지오프리가 짧게 헛기침했다.

“아무래도 내가 잠들었나 보군.”

“……네.”

미오는 아직 도착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건성으로 답했다.

‘순 제멋대로야.’

다칠까 봐 몸을 던져서 구해 줬더니 이상한 오해나 받았다. 입을 잔뜩 내민 채 결리는 어깨를 두드리자, 그가 천천히 자리를 옮겼다.

“내가 좀 봐 주지.”

“아니, 괜찮아요.”

“나 때문에 그런 거니까―.”

거절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얼굴로 다가온 지오프리가 그녀의 몸을 조금 돌려 앉혔다. 그리고 조심스레 미오의 어깨와 팔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원래도 잠을 잘 이루지 못했지만, 결혼이 결정된 이후로는 거의 못 잤다. 그래서 근육이 온통 뭉쳐 있었는데 아까 갑작스레 움직였더니 영 몸이 개운치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그의 마사지를 받자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저절로 흘렀다.

“……아.”

“어디 아픈 곳이 있으면 곤란하니까…….”

“아, 여기는 의원을 구하기가 어렵겠죠.”

“……글쎄.”

카스피언 영지에서 멀어졌으니까 이것저것 불편한 점이 많을지도 모른다.

“나리,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말에 미오가 창밖에 고개를 내미는데, 낯선 풍경에 덜컥 겁이 났다.

“여기가 어디죠?”

“도르프로 가는 길에 이런 마을이 수도 없이 있겠지.”

아직은 카스피언 제국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했다. 지오프리의 손을 잡고 내려온 미오는 두리번대다가 그를 따라서 여관에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방을 하나 얻고 싶은데…….”

그의 말에 화들짝 놀란 미오가 지오프리의 옆구리를 슬쩍 쳤다.

“왜 방이 하나예요?”

“우리가 신혼여행 왔다는 것을 잊은 건가?”

“…….”

그의 말에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미오는 입을 다물었다.

“여기 먹을 것을 좀 내오고, 바깥에 매 둔 말에게도 여물을 가져다주게.”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지오프리는 여관에 들르는 손님이 작성하는 숙박부에 전혀 모르는 이름을 적어 넣었다.

‘루키우스 모르시아니? 그게 누구지?’

잠깐의 마차 여행으로 지친 미오는 안내해 주는 자리에 앉아서 일단 물부터 들이켰다. 그러자 1층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굉장한데.’

그간 다양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던 미오의 눈에는 모든 것이 새로웠다. 하급 귀족이나 상인, 군인 등 다양한 계급의 사람이 한자리에 어우러져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입에 파리가 들어가겠군.”

“아, 죄송해요.”

미오는 이런 상황에도 동요 없이 술을 마시는 지오프리를 보면서 존경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면 숲속의 쉼터에서도 능숙해 보였는데…….’

황족의 핏줄로 태어난 고귀한 공작님이 이런 허름한 여관에 올 일이 있었을까.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말라비틀어진 빵과 건더기가 거의 없는 스튜, 벌레 먹은 과일.

음식을 보는 순간 카스피언 공작 성 주방에서 신나게 빵을 굽고 있을 케이 생각이 났다. 케이의 손에서는 이런 말라비틀어진 빵도 일류 요리로 탈바꿈할 수 있을 텐데.

‘내가 그사이에 너무 귀족 놀음에 빠진 건가.’

배고프던 때를 생각하면 이것도 감지덕지했다. 그녀가 빵으로 손을 뻗으려고 하는데, 지오프리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먹지 마.”

아, 익숙해 보이는 것은 그녀의 착각이었나.

“이딴 것을 음식이라고 내어놓은 건가?”

지오프리가 볼품없는 음식 때문에 몹시 흥분해서 여관 주인을 죽을 듯이 노려보았다. 미오는 잡힌 손을 빼서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조용히 있는 게 낫지 않아요?”

잘 몰라도 그가 가명을 썼을 때는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 두 사람의 차림은 다른 손님보다야 고상했지만, 무도회 때 입은 드레스에 비하면 무척 수수한 편이었다. 남색의 드레스는 가슴과 치마 끝단에 흰 레이스가 장식되어 있었다. 함께 쓴 보닛 역시 흰 레이스로 마무리되어 있었지만 화려한 느낌은 아니었다.

“……흠.”

그녀의 말에 헛기침을 뱉은 지오프리가 모자를 깊게 눌러쓰더니 마시던 술잔을 집어 들었다.

‘하여튼 성질머리하고는…….’

그렇게 조용히 식사를 이어 나가는데, 한 무리의 사내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얼핏 봐도 질이 안 좋아 보이는 이들이었다. 사냥한 작은 짐승을 허리에 차고, 비릿한 피 냄새를 풍기던 이들은 여관 한중간에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소란을 피웠다.

“주인장, 여기 술독을 가져오게!”

최대한 신경 쓰지 않고 빵을 스튜에 찍어서 먹으려는데, 들려오는 이름 때문에 목에 사레가 들렸다.

“무슨 얼어 죽을 카스피언 공작 타령이야!”

“그 정도 마물은 우리 손으로도 충분하다고, 안 그래?”

“그래. 카스피언 공작 소문도 죄다 과장된 거겠지. 그렇게 위대하신 나리가 왜 황태자 자리에서 쫓겨났을까?”

마물을 사냥하는 무리인 듯 보였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지오프리의 흉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미오?”

“……네?”

저들의 이야기에 신경 쓰느라 조금 늦게 지오프리를 올려다본 미오가 깜짝 놀랐다. 빵을 담근다는 것이 그녀의 손까지 스튜 그릇에 넣은 것이다.

“하하, 이게 왜 이렇죠?”

어색하게 미소를 짓긴 했지만, 미오의 눈은 분노로 이글대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그 잘난 카스피언 공작이 여기 온다고 해도 이 몸이 맨손으로 제압 가능하다는 거야.”

술에 얼큰하게 취한 사내가 잔뜩 허풍을 떨자 여관에 있던 손님 모두가 손뼉 쳤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이 황족이나 귀족 험담을 하는 것인데, 그중에서도 온갖 무용담과 소문을 몰고 다니는 카스피언 공작이 으뜸이라 할 수 있었다.

“듣자 하니 여우 사냥터에서도 낙마해서는 숲에 갇혀 있었다지?”

“여우를 잡은 게 아니라, 공작이 잡힌 격이구먼!”

“자자! 한잔 들지!”

처음 가볍게 시작된 이야기는 점점 과열되어서 결국에는 지오프리를 둘러싼 끔찍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카스피언 공작을 안주 삼아서 술을 들이켜 가며 낄낄댔다.

“……후.”

미오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도, 지오프리의 안색을 살피느라 바빴다. 그는 맛없게 생긴 음식에는 분노했지만, 저렇게 함부로 떠드는 이야기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당신들, 지오프리가 밤잠 설쳐 가면서 지켜 주지 않았으면, 지금 그렇게 웃으면서 술을 마실 수 있었을 것 같아?’

게다가 지오프리는 여우 사냥터에서도 악독한 황후와 황태자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목숨을 잃을 뻔했었다.

‘그런데도 그걸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로 술안주 삼는다고?’

배가 조금 고팠던 것 같은데, 입맛이 싹 사라졌다.

눈은 이글이글 타올랐고, 드레스 아래 허벅지를 움켜잡느라 살이 따끔거렸다.

지오프리는 그때 입은 상처 때문에 사경을 헤맸고, 지금도 건강하지 못하다.

‘왜 이런 이야기를 다 듣고 있지?’

항상 오만한 얼굴로 그녀를 핀잔줄 때는 언제고, 지금 저런 버러지만도 못한 자들의 이야기는 왜 참아 주느냔 말이다. 충혈된 눈에 고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듣자 하니 여색도 지독하게 밝힌다지?”

“이건 진짜 비밀인데, 베일 백작가의 영애와 버드만 후작가의 영애 말일세.”

은근한 사내의 음성에 다른 탁자에 있던 손님들까지 그쪽으로 몰려들었다.

“어서 해 보게. 어서!”

얼굴도 본 적 없는 아름다운 귀족 영애의 이야기에 사내의 얼굴에 열기가 번져 갔다.

“그 두 영애가 카스피언 공작의 침실에서 나오는 걸 본 사람이 있다더군.”

사내의 음성이 점점 은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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