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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92)화 (92/123)

92화 신혼여행 (1)

“내 신부가 벌써부터 비밀을 만드는 건 별로야.”

“……저기, 공작님. 이러시는 건.”

“뭐가 어떻다는 거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대가 내게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웃음기 하나 없는 지오프리의 말에 그녀의 머리가 하얘졌다.이제까지 그에게 했던 수많은 일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랬다.

확실히 이런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더한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과 감정 자체가 달랐단 말이야.’

요즘 지오프리를 볼 때면 좋아하는 마음이 차고 넘쳐서 금방이라도 바보 같은 짓을 해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뭔지 내게 보여 줘.”

정신을 차리니 소중하게 품고 있던 그것을 뺏긴 후였다. 잠시 후 몸을 세운 지오프리가 붉은 슈미즈를 쫙 폈다. 망사로 만들어진 붉은 색의 슈미즈가 깃발처럼 펄럭대는데, 미오는 이대로 기절하고 싶었다.

나를 얼마나 놀려 댈까.

‘꼴사나워서 봐 줄 수가 없군.’

저번에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에게 가운을 집어 던졌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 지오프리는 화를 내는 대신 말을 더듬어 댔다.

“……이건.”

곧장 그것을 조심스레 침대 위에 내려 두더니 침묵을 지켰다. 미오는 그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지 궁금해서 고개를 쳐들었다.

‘에? 왜 얼굴이 빨개진 거야?’

손으로 볼을 감싼 채 고개를 돌리고 있었지만, 미처 가리지 못한 볼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의아한 나머지 그를 빤히 응시하자, 지오프리가 그녀와 슈미즈를 번갈아 봤다.

“이런 취향인가?”

그러니까 지금 그의 질문은 미오의 잠옷 취향이 이런 거냐고 묻는 건가.

‘저 망사로 만들어서 몸이 하나도 안 가려지는 저런…….’

“아니거든요! 이건 로렌이!”

억울한 나머지 벌떡 일어나서 큰 소리를 쳤다. 너무 급하게 일어났는지 몸이 비틀댔다.

“…….”

왜 이번에는 넘어지는 그녀를 잡아 줬는지 모른다.

‘그대로 놔두지.’

가뜩이나 온몸이 뜨거운데 지오프리의 품에 안기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재빨리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몸을 움직이는데 그녀를 안은 지오프리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신혼여행이 퍽 기대되는군.”

귓가에 속삭이는 그의 말에 미오는 그대로 기절할 것 같았다.

“무슨 기대를 해요.”

“추가한 특약을 자세히 읽어 보는 게 좋을 것 같군.”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린 후 지오프리가 그대로 몸을 돌려서 방을 빠져나갔다.

“……도대체 뭐야.”

대낮에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미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 * *

“얼마나 낭만적인지 모르겠습니다.”

신혼여행 출발일이 되자 상기된 얼굴을 한 로렌이 배웅을 나왔다.

“이맘때의 도르프 제국은 정말 아름답다고 들었답니다.”

신혼여행지는 남쪽에 있는 도르프로 정해졌다.

“게다가 이렇게 차려입으니 정말이지, 너무 잘 어울리세요.”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지오프리는 그들의 신분을 숨기고 여행을 다녀올 것을 제안했다. 그래서 가문의 인장이 달리지 않은 평범한 마차를 준비했고, 두 사람은 최대한 장식이 달리지 않은 옷을 갖추어 입었다.

“하지만 호위병도 없이 괜찮을까요.”

여러 번의 암살 위협이 있었던 것을 아는 미오가 연신 불안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공작님이 계시는데 뭐가 걱정인가요.”

로렌이 그녀를 꼭 안아 주면서 토닥이는데, 미오가 마지못해서 웃었다.

‘그 공작님 때문에 걱정인 거랍니다.’

로렌은 여우 사냥 때의 일이나 가면무도회 때 일을 직접 보지 않아서 지오프리 주변을 둘러싼 적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게다가 다른 사람을 속이고 있지만, 지오프리는 여전히 약을 먹었다.

‘몸이 좋지도 않은데, 긴 여행은 무리가 아닐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사이에 마차가 벌써 출발했다. 카스피언 공작 성의 식구들에게 제대로 인사를 못 했다는 생각에 창을 열고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다녀올게요!”

그녀의 인사에 집사와 로렌, 사무엘이 나란히 서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들의 모습이 아주 작아질 때까지 인사를 건네던 그녀가 창을 닫자, 마차는 다시 침묵에 잠겼다.

“정말 수완이 대단하다니까…….”

지오프리의 혼잣말에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던 미오가 입을 씰룩댔다. 하지만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익숙해졌는지 지오프리가 저렇게 얄밉게 말하는 것이 귀엽기까지 했다.

“저분들이 좋은 사람이라서 그런 거예요.”

처음부터 믿어 주었던 로렌부터 시간이 걸렸지만 친해진 집사, 그리고 나이가 많지만, 오히려 동생 같기도 한 사무엘이 그녀를 받아 준 덕분이었다.

“……미오.”

“네?”

그냥 지오프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미오는 화들짝 놀랐다.

“그대의 수완이 좋다는 말에는 내가 포함되어 있어.”

“……?”

마차에 등을 가벼이 기댄 채 무심하게 내뱉는 그의 말은 한 번, 두 번을 생각해도 해석이 잘되지 않았다.

‘여우로 오래 지내서 말을 잘 못 알아듣는 걸까.’

하지만 설명을 해 줄 생각은 없는지 지오프리는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저 성격 파탄자!’

이렇게나 궁금하게만 만들고서는 속 편하게 잠을 자 버리다니.

게다가 명색이 신혼여행인데…….

대공의 꽃마차 같은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아니, 은근 그런 것을 기대했던 걸까.’

도대체 그렇게 많은 삶에서 그녀는 무슨 교훈을 얻었던 걸까.

“……휴.”

손으로 턱을 받친 채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도르프까지는 마차로 일주일은 걸린다고 했다. 그곳에서 열흘 정도를 지낼 예정이라고 했으니, 이 여행은 대충 한 달은 걸릴 것이다.

‘……도르프라.’

그러고 보니 카스피언 제국을 떠나는 것도 처음이란 생각이 들었다. 네 개의 제국은 책 속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여행을 간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조금 두근댔다.

덜컹덜컹.

마차가 자갈길을 지나는지 심하게 요동쳤다.

얼른 손을 뻗어서 천장의 손잡이를 꽉 붙들었다.

이렇게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도 조금은 익숙해졌다.

‘익숙해진다라…….’

경계해야 할 감정일진대, 어쩌다가 이 모든 것에 정을 줘 버린 걸까.

그러다 시선은 자연스레 앞을 향했다.

‘자는 모습만큼은 천사가 따로 없다니까…….’

기다란 속눈썹이 마차의 열린 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바람에 가늘게 흔들렸다. 날카로운 콧대를 따라서 내려오면 얇고 붉은 입술에 닿을 수 있었다. 불거진 목울대와 넓은 어깨에 이르자 미오의 볼이 달아올랐다.

‘중병이야. 중병.’

지오프리만 보면 이렇게 침을 꼴깍 삼키게 되니까.

그때였다.

히이잉~!

“어! 어! 앞에 이게 뭐지!”

무슨 일이 생겼는지 마부가 큰 소리를 냈고, 마차가 심하게 요동쳤다. 미오는 창가에 밀착한 후 손잡이를 잡아서 무사했지만, 잠이 푹 든 지오프리는 그렇지 못했다.

“……지오프리!”

잠든 채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는데 머리가 어딘가 부딪칠 것 같았다. 손잡이에서 손을 뗀 미오가 얼른 그를 향해 몸을 던졌다. 두 팔로 지오프리의 머리를 감싸는데 마차가 다시 한번 들썩거렸다.

의자에 앉지 못한 채 그대로 두 사람의 몸이 의자 사이의 공간으로 고꾸라졌다.

“……아으읏.”

좁은 공간에 꽉 끼인 채 쓰러져서 등과 어깨가 조금 쑤셨다. 잠시 후 눈을 뜬 미오는 입을 크게 벌렸다.

몸을 옆으로 움직일 수도 없는 공간에 두 사람이 한 몸처럼 붙은 채였다.

“괜찮아요? 공작님!”

그녀의 음성에 정신을 차린 지오프리가 바닥을 짚은 채 고개를 들어서 상황을 파악했다. 지오프리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무리 신혼여행이기는 하지만, 이건 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미오가 꽥 소리를 지르는데, 그의 귓볼이 다시금 붉게 물들어 있었다.

* * *

“대공 각하, 저 사무엘입니다.”

“…….”

우르체카 대공이 머무는 침실로 들어선 사무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 커튼도 열지 않았고, 창도 닫힌 채였다. 게다가 술을 침실에 갖다 부은 건지 술 냄새 때문에 머리가 어질해질 정도였다.

“공작님과 공작 부인께서 막 출발하셨습니다.”

“공작 부인이라…….”

그제야 아무렇게나 누워 있던 알렉세이가 몸을 일으켰다. 사무엘이 서둘러 커튼과 창을 열자, 그가 짧은 신음을 뱉었다.

“그래.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어도 태양은 뜬다고 하니까 말이야.”

도무지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를 늘어놓는 대공의 곁에 시원한 물을 내려 두었다.

“꿀과 레몬을 곁들여서 숙취에 좋을 겁니다.”

발에 뭔가 걸려서 내려다보니 빈 술병 여러 개가 굴러다녔다.

“사무엘, 실연당해 본 경험이 있나?”

“……네?”

“하긴 아직 어려서 그런 일을 겪었을 턱이 없겠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던 대공의 말에 사무엘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연애니 결혼 같은 것은 잘 모르지만, 짝사랑이나 실연 같은 것이라면 잘 알았다.

“실연당할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행복한 일입니다.”

평소 같았으면 하지 않았을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아마도 방에 진동하는 술 냄새 때문인가 보다.

사무엘의 말에 잔을 내려 둔 대공이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안 봤는데 사무엘 자네도 남자였군!”

그는 그대로 침대 밖으로 내려와서 술병을 걷어찼다. 그리고 탁자에 남겨 둔 술병을 열어서 잔에 콸콸 들이부었다.

“대공 각하, 또 술을 드시면 속 버리실 겁니다.”

파랗게 질린 사무엘이 그를 만류하려고 하는데 대공이 손을 불쑥 내밀었다.

“이건 자네 건데?”

“하지만 저는 술을 즐기지 않―.”

“공작이 신혼여행을 떠난 이런 경사스러운 날에는 한잔 마셔 주는 게 도리일세.”

“……아, 그런 거라면.”

사무엘이 부들부들 떨면서 술을 홀짝대자 대공이 크게 웃더니 술병을 그대로 입으로 가져갔다.

“오늘 둘이 진탕 마셔 보는 거야!”

왜 일이 이렇게 흘러가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그건 좀 곤란합니다. 공작님이 안 계시는 동안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

사무엘이 커다란 눈을 굴리면서 달아날 기회를 잡으려 했다.

“내가 도와주면 아무 문제 없겠지? 안 그래? 어차피 공작이 내게 이 성을 부탁하고 갔으니까―.”

그대로 사무엘의 어깨를 세차게 끌어 잡은 대공이 그를 의자에 주저앉혔다.

“……끙.”

아무래도 단단히 잘못 걸린 기분에 사무엘의 얼굴에 절망이 깃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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