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알렉세이 우르체카의 실연 (2)
‘혹 내가 이번에 잘못되더라도 이건 모두 기억하고 싶어.’
펑펑 우는 대공을 봐서인지 괜히 기분이 가라앉은 미오가 드레스 자락을 만지작댔다.
카스피언 공작령의 고요한 풍경.
넉넉한 미소를 지닌 로렌과 다정한 집사.
소년처럼 귀여운 사무엘.
친오빠 같은 느낌을 주는 대공.
그리고 그녀를 괴롭게 만들다가도 설레게 하는 지오프리까지.
‘모두 잊고 싶지 않아.’
그렇게 처음으로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다.
‘맞아. 이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아.’
항상 쫓기거나 숨어 다녔던 기억뿐이다.
내내 굶주렸으며 슬픈 사랑에 말라비틀어졌다.
종내에는 죽어서 다시 그 숲에서 눈을 뜨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지만, 한 번도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흐으윽.”
분명 대공을 달래려고 마련한 자리였는데, 미오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입술을 꾹 깨물었지만, 울음을 참는 게 그리 쉽지 않았다.
“내가 우리 지오프리를 보낼 수 있을까요?”
그때 들려온 대공의 말이 아니었다면 분명 펑펑 울었을 것이다.
“……에?”
대공이 슬퍼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이것저것 추측했던 것이 죄다 빗나간 모양이었다.
“누군가를 떠나보낸다는 기분은 참 별로예요.”
“……아!”
“하지만 매정한 지오프리는 제가 얼마나 그를 아끼는지 모를 테죠.”
“그건 아마도―.”
잘생긴 얼굴 빼고는 상대방의 의중 파악이나 배려 같은 것을 지오프리에게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도 조금 당황스럽기는 해.’
알렉세이 우르체카가 평범한 사람은 분명 아니었지만, 친구가 결혼한다고 해서 이렇게 울 줄은 몰랐다.
“우리는 소꿉친구 같은 사이거든요. 아주 오래 알고 지냈답니다.”
그의 담담한 설명에 미오는 차츰 대공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오래 어울려 지내다가 한 명이 먼저 결혼을 하게 되면 조금 허전한 기분이 들 것도 같았다.
‘드라마에서도 아들딸을 결혼시키고 나면 어른들이 적적해하고는 했으니까…….’
이게 진짜 결혼이 아니라고 그에게 알려 준다면 조금 위안이 될까.
입을 떼려던 미오가 찻잔을 드는 것으로 대신했다. 특약으로 비밀 유지 조항을 추가했던 것이 떠올랐던 까닭이다.
그래도 대공의 기분을 북돋워 주고 싶었다.
“대공 각하는 인기가 많으시니까―.”
우르체카 대공을 칭찬하자 그의 어두웠던 표정이 차츰 밝아졌다.
“……네 개의 제국 어딜 가도 이만한 인물이 없긴 하죠.”
“그럼요.”
“추한 꼴을 보여서 미안합니다. 미오.”
식은 차를 홀짝이던 알렉세이가 한 손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훔쳐 내렸다.
“아니에요. 우리는 가족이잖아요.”
어떻게든 우르체카 대공의 기분이 풀렸으면 하는 마음에서 미오가 활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미오의 말에 잠시 굳은 표정을 짓더니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당신이 내게 마음을 열어 주는군요. 이리 와요.”
아까 막 울 때는 언제고 벌떡 일어난 대공이 미오를 안으려고 들었다. 그녀는 대공을 피해서 소파 주변을 어지럽게 돌았다. 그러다 보니 슬픔도 저 멀리 달아났다.
* * *
아무도 없는 숲속을 걷는 커다란 그림자가 있었다. 쓰러질 듯 말 듯 하면서 앞으로 향하던 그림자가 멈춘 곳은 작은 굴 앞.
“등신 같은 놈.”
거친 욕설이 절로 터져 나왔다.
이번에는 욕심을 내 보겠다고 다짐했던 것이 얼마 전이었던 것 같은데,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래서 나는 안 되는 거였구나.”
사실 미오와 지오프리의 결혼 소식에 그녀를 붙잡고 싶었다.
‘왜 내가 아니라 지오프리냐고…….’
미오를 더 아껴 주고 사랑해 줄 자신이 있다고 설득하려 했다. 이 마음을 모조리 꺼내서 보여 주려고 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그가 끼어들 자리는 없어 보였다.
“우습지. 하나도 기억 못 하면서 서로에게 끌리는 게.”
지오프리는 예의 그 냉랭한 표정 아래 감정을 감추려고 했지만, 그건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배고픔과 재채기와 사랑은 속일 수 없는 것이라고들 하지 않나.
“그래도 미오가 우는 것은 싫으니까.”
아까 그를 달래려고 하다가 울먹이는 미오를 보는 순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울음을 막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졸지에 지오프리를 남몰래 가슴에 품은 다소 이상한 꼴이 되어 버렸다.
“그런 거야 아무래도 좋아.”
가족이라고 말하는 미오의 말에 조금은 슬펐다.
“조금은 다른 의미의 가족이 되고 싶었는데 말이야.”
게다가 인기가 많으면 무얼 하나.
“진짜로 원하는 것은 가질 수가 없는 신세인걸.”
작은 굴 앞에 쭈그리고 앉은 알렉세이는 붉은 열매가 달린 나뭇가지를 그 앞에 두었다. 망토도 걸치지 않은 널따란 등 위로 북풍이 사정없이 몰아쳤다. 사내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잠시 들리는가 싶더니 하늘 위로 새 무리가 날아올랐다.
* * *
“이렇게 갑자기 말이에요?”
혼인 서약서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의 일이었다. 지오프리는 신혼여행 준비가 끝났다는 것을 사무엘을 통해서 통보했다.
카스피언의 전통 결혼식은 예비 신부의 집에서 사흘, 예비 신랑의 집에서 일주일간 연회를 벌였다. 두 번이나 거행되는 결혼식은 신분이나 재산 정도에 따라서 규모가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신혼여행을 가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아예 결혼식을 안 한다니.’
기대가 없기는 했지만, 묘한 실망감이 밀려들었다.
“내일 출발인데, 아무것도 준비할 건 없다고 하셨습니다.”
“……네. 알겠어요.”
어쩐지 기운이 빠진 그녀가 의자에 주저앉았는데 품에 뭔가 잔뜩 껴안은 로렌이 방을 찾았다. 로렌의 뒤로 하녀 여럿이 주렁주렁 들어왔다.
“이게 다 뭐죠?”
“어쩜 우리 공작님, 그렇게 안 봤는데 엉큼한 구석이 있으신 거 있죠.”
“……네?”
가끔 로렌의 이야기는 아무리 집중해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을 때가 있었다.
“미오를 독점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신 거잖아요.”
서약서부터 작성한 뒤 신혼여행을 가겠다는 공작이 로렌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나 보다. 뭐라고 반박하기도 힘들어서 그녀가 멋쩍게 웃자, 로렌이 손뼉을 쳤다. 그러자 하녀가 상자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아니, 저건.”
“기억나죠? 제가 저번에 입혀 드렸던 그 잠옷 말이에요. 신혼부부에게 가장 인기가 많다는 그거.”
로렌의 말에 미오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잠자리 날개 같은 하늘하늘한 슈미즈를 어찌 잊을까.
“이번에도 제가 최선을 다해서 구해 왔습니다.”
“아니, 그런데 잠옷이 왜 이렇게 많아요?”
로렌이 보여 주는 잠옷은 하나같이 파격적이었다. 등이 파였거나 길이가 너무 짧아서 입는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그건, 제가 두 분을 위해서 하나씩 사 모으고 있었거든요.”
“……하.”
처음부터 미오를 공작의 짝으로 점찍은 로렌은 이렇게 장기 계획을 세운 후 물밑에서 실천 중이었다.
‘역시 무서운 분이야.’
“자! 이걸 첫날에 입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첫날이라는 단어에 미오의 코에서 더운 김이 쉭쉭 났다. 로렌에게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설명할 수 없어서 속만 타들어 갔다. 그런 와중에 고개를 돌리는데 붉은 망사로 만든 슈미즈가 눈앞에 펼쳐졌다.
“로렌, 저건 구멍이 너무 많은데요. 입으면 몸을 하나도 못 가릴―.”
“바로 그런 목적으로 입는 것 아니겠어요? 자자, 어디 한번 대 봐요.”
“아, 아니에요.”
미오가 손사래를 치는데도 로렌은 그 붉은 천 쪼가리를 드레스 위에 댔다. 그리고 그때 문 근처에서 누군가 인기척을 냈다.
“뭘 하는 거지?”
요즘 지오프리가 부쩍 그녀를 자주 찾고 있었지만, 이런 때에 오다니 정말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미오는 얼른 손을 뻗어서 붉은 슈미즈를 둘둘 말아서 품속에 감추었다.
“공작님을 뵙습니다. 자자, 우리는 모두 나가서 일해야지.”
로렌이 눈치 빠르게 하녀 모두를 데리고 나갔고, 방에는 미오와 그만 남게 되었다.
“뭘 하는 거냐고 묻잖아.”
닫힌 문에 기대서 있던 지오프리가 다가와 미오는 천 뭉치를 꼭 안은 채 주변을 두리번댔다.
‘이크! 큰일이야.’
붉은 슈미즈는 감췄지만 웬걸, 침대 위에 흰색, 검은색 오색 빛깔 슈미즈가 펼쳐져 있는 게 아닌가.
미오는 얼른 뒷걸음질 쳐서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얼른 한 손을 뒤로 빼서 슈미즈를 한데로 모았다.
“나만 빼놓고 무슨 작당 모의라도 한 건가?”
“아, 아니에요.”
“그러면……?”
속이 끓어오르기 시작한 미오가 점점 다가오는 그를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방에 어지럽게 늘어놓은 상자들과 천 무더기를 보면 대충 무슨 일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걸 꼭 이렇게 다그쳐야 해?’
“그러니까 로렌이 신혼여행…….”
미오는 입에 담았던 단어가 주는 묘한 느낌에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신혼여행 때 입으라고 로렌이 입으나 마나 한 슈미즈를 특별히 준비해 줬더라고요.’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절대로 못 하지.’
혼자서 고개를 세차게 흔드는데 그녀의 앞에 성큼 다가온 지오프리가 두 팔을 뻗었다. 미오는 품 안에 숨긴 것을 뺏길까 봐 손에 힘을 잔뜩 주었다.
‘오지 마!’
하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은 그가 침대 매트 위로 팔을 길게 뻗었다. 서로 밀착하게 되자 당황한 미오가 그대로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게 되었다.
‘이게 뭐야.’
그의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 한 자세였다.
서로의 숨결마저 공유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라 미오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차마 정면으로 지오프리를 볼 자신이 없었다. 붉게 달아오른 귀를 살피던 지오프리가 작게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