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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90)화 (90/123)

90화 알렉세이 우르체카의 실연 (1)

“……지금 뭐라고 했죠?”

몸에 딱 맞는 황금빛 드레스를 걸치고 화려한 장신구로 꾸민 돌로레스가 느긋하게 입을 뗐다. 전갈을 가지고 온 하녀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다.

“그게, 카스피언 공작님이 결혼하셔서―.”

“헛소리는 그만하도록 해요. 하나도 재미없으니까…….”

돌로레스가 입 안에 굴리던 포도알을 짓씹으면서 싱긋 웃었다. 그녀가 처음부터 지오프리 카스피언을 마음에 둔 것은 아니었다. 네 개의 제국에 잘난 사내는 차고 넘쳤고, 버드만 후작의 총애를 받는 그녀는 최대한 많은 사내를 만나 볼 작정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베일 영애가 목매고 있다는 사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지오프리 카스피언? 어디 변방에 가 있지 않았어? 무도회에서 본 적도 없고, 소문도 흉측하던데…….’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카스피언 제국에서 그녀의 적수가 될 만한 유일한 인물이 라비니아 베일이었으니까. 라비니아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사내가 궁금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변방에 있다는 그를 보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러다 벤 황태자의 생일 축하 무도회에서 그를 만났다. 만났다기보다는 멀찌감치에서 얼굴을 본 게 전부였지만.

‘저런 사내였어?’

날카로운 눈매와 각진 얼굴,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 유행과는 전혀 거리가 먼, 군청색의 바지와 투박한 군대의 망토 아래 쭉 뻗은 다리와 탄탄한 가슴.

‘전신에서 빛이 흘러넘치는 것 같아.’

그녀가 생각했던 것처럼 허울뿐인 공작 작위를 가진 사내가 아니었다. 그를 보자 어쩐지 이제껏 만나 왔던 사내들이 죄다 시시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관심이 죄다 지오프리에게 집중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가져야겠어.’

그 이후의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라비니아 베일이 아주 오랫동안 황후의 옆에서 알랑방귀를 뀌어 가면서 지오프리의 곁을 노려 온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주 하는 짓이 제 아비를 꼭 빼닮았구나.’

원래부터 부유했던 버드만 후작가와 달리 베일 백작가는 선대 백작부터 서서히 가문의 세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굳이 따지자면 버드만 후작가에 감히 대적할 게 못 되었다.

‘건방지게 말이야. 돈 좀 있다고 다 되는 줄 아나 봐?’

몇 년째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던 돌로레스가 후작에게 청을 올렸다.

‘결혼하고 싶은 사내가 생겼어요.’

결혼하겠다는 말에 기뻐했던 후작은 상대의 이름을 듣자 그녀에게 생각을 바꾸기를 설득했다.

‘누구라도 괜찮지만, 카스피언 공작은 네 짝으로 맞지 않는단다.’

이제까지 돌로레스가 어떤 추문에 휩싸여도 그의 권력으로 모두 막아 준 후작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뜻을 굽히지 않자 후작은 돌로레스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많은 문제를 해결하느라 시간은 좀 걸렸지만, 황제에게서 청혼하라는 명을 받는 데 성공했다.

“이제 합법적으로 지오프리 카스피언을 손에 넣는 일만 남았는데 말이에요. 인제 와서 그게 무슨 말이에요.”

라비니아의 일그러지는 얼굴을 볼 생각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게다가 그런 알량한 경쟁 의식 때문만은 아니었기에,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느긋하게 다시 포도알로 손을 가져가는데 하녀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아가씨. 저를 죽여 주십시오.”

그제야 저들의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뭐예요? 기분 잡치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데 드레스에 달린 수많은 비즈가 잘그락대는 소음을 냈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면서 다가온 돌로레스는 하녀의 손에 들린 서신을 뺏어 들었다.

“이, 이게 뭐야.”

지오프리 카스피언이 이미 결혼했기 때문에 그녀와의 결혼은 불가능하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믿을 수 없어.”

버드만 후작의 힘으로 베일가에는 압력을 넣어 뒀다. 그런데 감히 누가 카스피언 공작가에 혼담을 넣었다는 거지?

“……당장 외출 채비를 해요. 내 이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으니까.”

서신을 구겨서 방에 집어 던진 그녀가 하녀의 등을 세게 밟고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하녀는 신음을 삼킨 채 계속 엎드려 있었다.

* * *

결과적으로 지오프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분명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천천히 알려 달라고 부탁한 것 같은데, 아침부터 성안 식구가 모두 그녀를 찾았다. 꽃이나 손수 만든 작은 장식품 같은 것을 가져온 이들이 미오에게 축복의 말을 건넸다.

‘디아나 여신의 가호가 함께하실 겁니다.’

‘카스피언 공작님과 백년해로하세요.’

쏟아지는 축하 세례에 답을 하다 보니 머리가 어질해졌다.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아서 미오가 달아난 곳은 서재였다. 그곳에는 언제나처럼 서류를 정리하는 집사가 홀로 있었다.

“집사님.”

그의 평온한 얼굴을 보자 미오는 왠지 울고 싶어졌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비밀을 품고 있는 가슴이 답답했다.

“아가씨. 기쁜 소식이 있던데 왜 그런 얼굴을 하십니까. 아, 이제 마님이라고 부르는 연습을 해야겠군요.”

알프레드의 농담에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집사가 그녀에게 마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상상하자 너무 어색했다.

“만약에 말이에요. 이게 잘하는 일인지 확신이 안 들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미오는 지금 몹시 불안했다.

지오프리를 생각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이래도 되는가 하는 불안감이 깊어졌다. 그러자 서류를 가지런하게 정리한 집사가 안경을 벗으면서 입을 열었다.

“원래 우리 삶이란 불안정한 법이죠. 길을 잃은 것 같을 때는 말입니다. 마음의 소리를 따라가면 실패하지 않는답니다.”

“……마음의 소리를 따라가는데도 불안하면요.”

“원래 실패를 거듭하면서 배우는 게 있는 법이죠.”

무슨 일이 있어도 당황하지 않을 것 같은 집사의 차분한 음성에 미오는 떨리는 마음을 조금 다스릴 수 있었다.

‘이 결혼은 진짜가 아니니까, 일 년 뒤에, 아니 그 전에 언제라도 지오프리를 떠나면 그만이야.’

무책임한 계획이기는 해도 장기적으로 보면 이게 오히려 지오프리를 위하는 일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에 곁에 있으면서 도움을 주고 싶어.’

아직 몸도 다 낫지 않은 지오프리가 악당과 결혼하는 것을 볼 수는 없으니까.

‘분명 그가 완쾌할 방법이 있겠지.’

그때까지만…….

욕심인 줄 알면서도 조금 욕심을 부리고 싶었다.

“저는 두 분이 분명 행복하게 잘 사실 거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제 욕심만 차리려는 미오에게 덕담을 건네는 집사를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잠시 피신해 있던 미오가 방으로 돌아온 것은 늦은 오후였다. 그녀가 복도에 들어서서 주변을 살폈다.

“이제 좀 조용해졌을까.”

살금살금 복도를 지나던 그녀는 같은 층에 있는 지오프리의 침실을 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만큼 재수가 없지는 않겠지.’

지금 또 지오프리를 만난다면 심장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았다. 다행히 그쪽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고, 어둑어둑한 복도를 거의 다 지나올 때였다.

“……대공 각하.”

그녀의 방문 앞에 커다란 몸집을 한 사내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미오의 음성에 고개를 든 알렉세이 우르체카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우르체카 대공의 이런 모습에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디 안 좋으세요?”

“미오, 미오…….”

미오의 얼굴을 확인한 그가 벌떡 일어서더니 그녀를 와락 안았다.

“저기, 이건 좀 놓고 이야기를 하는 게―.”

하지만 그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미오의 품을 더욱더 깊게 파고들었다.

‘하, 진짜 곤란한데…….’

그녀가 대공의 친척이라고 되어 있기는 해도 컴컴한 복도에서 두 사람이 부둥켜안고 있는 것을 누군가 보게 된다면 안 좋은 소문에 휩싸일 게 분명했다.

‘게다가 카스피언 공작과 결혼한다고 말이 나온 직후니까…….’

어떻게든 이 사람을 달래서 울음을 그치게 하는 게 중요했다.

‘이상한 소문은 이제 사절이야.’

미오가 대공의 넓은 등을 토닥이면서 속삭였다.

“대공 각하,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저기 응접실에 가서 차라도 한잔 드시는 게 어떨까요? 저번에 선물해 주신 차와 비스킷이 정말 맛있더라고요.”

미오의 예상대로 그가 준 선물을 언급하자 울음을 조금 그친 대공이 물었다.

“맛, 맛있던가요? 훌쩍.”

“……얼른 가요.”

평소에는 응접실까지 1분도 걸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몸집이 큰 대공을 끌고 가자니 10분은 더 걸린 것 같았다. 간신히 그를 소파에 앉힌 후에 손수 우려서 향긋한 차를 따라 주었다.

“우르체카에서 나는 특별한 차라고 했죠. 이게 참 좋더라고요.”

미오의 등에서 땀이 줄줄 흘러 내리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 차를 권했다. 대공은 차를 받고도 마실 생각은 하지 않고 내내 훌쩍대기만 했다. 그는 목소리도 크고, 다소 과격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의외로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였다.

“결혼, 진짜 합니까?”

“……아.”

맙소사, 대공이 우는 이유가 그녀와 지오프리의 결혼 소식 때문이라니. 그가 그녀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힘들어할 줄은 몰랐다.

‘내가 지오프리와 결혼하는 것에 놀란 걸까. 아니면 미리 이야기하지 않아서 서운한 걸까. 아니면 설마 대공 각하가 날 좋아했었나?’

뭐라고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미오는 쿠키를 만지작대기만 했다.

‘위로하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고…….’

한참 망설이던 그녀가 입을 뗐다.

“항상 제게 잘해 주셔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것저것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하나도 보답을 못 했네요.”

그냥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진심을 전하는 것뿐이었다. 정말로 그녀는 우르체카 대공에게 고마운 것이 많았다.

대공 덕분에 가짜긴 해도 귀족 신분도 될 수 있었고, 분에 넘치게 많은 선물도 받았다. 이런 경험은 모두 처음이라서 미오에게 정말 소중했다. 그녀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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