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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89)화 (89/123)

89화 카스피언 공작 부인 (2)

아마 아침 단장을 도와주기 위한 하녀나 로렌일 것이다.

“들어와요.”

미오는 어깨를 힘없이 축 늘어뜨리고는 거울 앞 의자에 비스듬하게 걸터앉았다. 꿈꾸는 청혼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장미꽃 백 송이라든지, 반짝이는 보석 반지 정도의 고전적인 장면은 생각해 봤었다.

“뭐야. 진짜도 아닌데 말이야.”

이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때 가까이 다가온 이가 미오의 머리를 뒤로 모아서 손으로 쓸어 주었다.

“산책하기에 적당한 차림으로 부탁할게요.”

이제 하녀의 시중을 받는 것도 조금 익숙해졌다. 미오의 말에 상대는 아무 말 없이 빗질만 했다.

“……?”

이상한 느낌에 거울을 확인하자, 빗을 들고 있는 것은 지오프리였다. 놀란 그녀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왜 아침부터…….”

“아침부터 나를 보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잘못 생각한 건가?”

“아뇨. 너무 놀라서요.”

미오는 그의 손에서 빗을 뺏고는 눈을 잔뜩 굴렸다. 오늘 종일 산책하러 나가거나 병을 핑계로 지오프리를 피할 계획이었는데, 이렇게 맞닥뜨리자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슬금슬금 그를 피해서 물러나다 보니 창가까지 밀려 났다. 미오는 아직 찬 기운이 남은 창틀을 더듬으면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결혼할 사이인데 꼭 용무가 있어야 얼굴을 보는 건가?”

“저기, 공작님! 그 결혼 말인데요.”

미오는 주먹을 꽉 쥔 채 고민하고 있던 말을 내뱉었다. 그녀의 말에 느긋하게 서 있던 지오프리가 성큼성큼 다가섰다. 그는 팔 하나를 벽으로 뻗어서 미오를 품에 가두었다.

“설마 한 입으로 두말하려는 건 아니지?”

“아니, 그건 아니고요.”

그제야 그녀를 깔아뭉갤 것처럼 다가오던 그가 멈춰 섰다.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라면 뭐든 들어 주지.”

“확실하게 해 둘 게 있어요.”

“무슨 일이든 확실하게 해 두는 건 중요한 일이지.”

아침 햇살이 창을 타고 지오프리의 얼굴을 가득 비추기 시작했다. 저번부터 느꼈지만, 동굴에서 그 고생을 해도, 헛간 같은 곳에서 자고 일어나도 지오프리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항상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는 비법이 궁금할 정도였다.

‘씻고 바로 온 걸까.’

언젠가 맡아 본 적 있는 향유 냄새가 그에게서 풍기고 있었다. 조금 덜 마른 앞머리와 그녀를 오롯이 담고 있는 검은 눈동자.

‘……최고야.’

“뭐지? 아무리 그래도 이런 노골적인 시선은 좀 부담스럽군.”

손가락 하나를 내민 그가 미오의 볼을 쿡 찌르는 바람에 그녀는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미오는 턱을 쳐들고 생각을 정리한 것을 입 밖으로 낼 수 있었다.

“제가 공작님을 오랫동안 흠모해 왔고 상황이 이래서…….”

느닷없이 청혼하게 되었지만, 이건 정상적인 결혼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니까 임시로 하는 결혼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쩐지 뒤의 말은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는 바람에 속으로만 해야 했다.

“상황이 어떻지?”

오늘도 지오프리는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 하는 게 분명했다. 그는 황족인 데다 공작이니 결혼을 신중하게 해야 했다.

“그러니까 결혼이란 것은 공작님 말씀대로 장난이 아니니까…….”

“모처럼 생각이 통하는군.”

미오의 말에 어쩐 일로 미소 띤 그가 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일전에 그녀의 귀족 신분을 증명했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이게 뭐죠?”

그녀가 서류의 내용을 확인하기도 전에 지오프리가 미오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러더니 벽에 서류를 갖다 대고는 그녀의 몸을 홱 돌렸다.

“자, 서명해.”

난데없이 펜을 쥐게 된 미오는 그제야 서류를 읽을 수 있었다.

“……혼인 서약서.”

아침부터 지오프리가 그녀를 찾은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라니. 갑자기 북풍을 정통으로 맞은 것처럼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펜을 쥔 미오가 감히 뒤를 돌아볼 생각도 못 하고 오만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왜 서약서를 쓰라고 하는 걸까.’

지오프리가 정말로 그녀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걸까?

하지만 이 가정은 번번이 실패했던 터라서 가능성이 작았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건가.”

그녀의 등 뒤에 사자처럼 버티고 서 있던 지오프리가 불쑥 고개를 들이미는 바람에 미오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아뇨. 그게 아니라…….”

“난 벌써 했으니까 여기에 이름만 써넣으면 끝이야. 그러면 카스피언 공작 부인이 되는 거지.”

“……아.”

거울에 비친 지오프리를 봤을 때부터, 아니 어제 입맞춤을 했을 때부터였을까. 멀미하는 것처럼 울렁거리는 가슴이 완전히 뒤집혔다.

‘이건 원작에도 없었고,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이야기야.’

카스피언 공작 부인이 된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심장이 없다고 일컬어지는 지오프리는 수많은 여인을 곁에 두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그 누구도 가까이하지 않았으니까.

“이걸 전달하지 않으면 나는 돌로레스와 결혼하는 수밖에 없지. 황제 폐하가 내린 명이니 기꺼이 따라야―.”

‘아, 역시 이건 황명 때문에 필요한 서류에 불과한 거야.’

“특약을 하나 달았으면 좋겠어요.”

“……특약이 뭐지?”

미오는 황제에게 보내는 서류 말고 두 사람만 볼 수 있게 추가 내용을 덧붙이자고 제안했다. 지오프리의 말처럼 영원한 결혼이 될 수는 없었다.

“시한부 결혼이라.”

미오는 일단 이 위기를 넘기려고 하는 결혼임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이 결혼을 이용하는 거예요.”

“그대가 내 방패막이가 되어 준다는 건가?”

“그렇죠. 저는 좋아하는 공작님과 함께 있을 수 있고, 공작님은 억지로 결혼하지 않아도 되고요.”

설명하다 보니 어쩐지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일로 결혼을 해도 되는 걸까.’

미오가 잠시 망설이는데 지오프리가 흔쾌히 요청을 받아들였다.

“서명하면 그렇게 해 주지.”

그의 말에 미오는 망설이지 않고 서명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와서 하는 최초의 서명이었다.

‘아무 데나 서명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 귓가를 스쳤지만, 이미 그녀의 이름이 서류에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지오프리가 그것을 잘 챙겼고, 미오는 그 자리에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뭐, 엄청나게 일이 복잡해지겠지만, 그가 돌로레스와 결혼해서 일어나는 일만큼은 아닐 거야.’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쓰는데 지오프리가 여전히 그녀의 뒤에 버티고 서 있었다.

“저기, 공작님. 이제 용무가 끝났으니까…….”

“누가 그래? 용무가 끝났다고?”

“……그럼?”

침을 꿀꺽 삼킨 미오가 천천히 몸을 돌리는데 여전히 잘생긴 지오프리가 한쪽 눈을 찡긋댔다. 순간 놀란 미오가 들고 있던 펜을 놓쳤고, 그것이 그의 흰 셔츠 한복판에 긴 선을 만들었다.

“……아.”

순백의 흰 셔츠를 타고 번지는 잉크를 바라보던 미오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지오프리 역시 그의 구김 하나 없는 순백의 셔츠에 새겨진 흔적을 가만 내려다봤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미오는 처벌을 기다리는 순교자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제발 아무 말이라도 해.’

침조차 삼키지 못하고 있는데 그가 손을 쓱 드는 것이 느껴졌다. 지오프리가 한 대 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목이 점점 더 움츠러들었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첫인상이라는 것이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커다란 손이 닿은 곳은 미오의 정수리였다.

낯선 감각에 화들짝 놀란 그녀가 고개를 쳐들자, 지오프리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여기에도 서명을 하고 싶었던 건가? 이 몸이 네 것이라고?”

“……에?”

미오는 듣고도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왜 자꾸 그는 두 사람이 진짜 연인인 것처럼 구는 거지.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혹시 그런 조짐이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사귀자는 말을 들었나?’

‘그럼 나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을까?’

그런 비슷한 말은 아예 들은 적이 없었다.

미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던 지오프리는 고민에 잠긴 그녀를 가만 응시했다. 방금까지 그녀의 비단 같은 머리카락이 이 손안에 있었다.

‘너는 알까.’

흐트러진 은발에 잠옷 차림인데도 그 모습에서 눈을 떼기가 힘들다는 것을.

미오가 귀엽다는 것을 인식한 그날 이후로 쭉 그랬다. 하지만 아직 그녀의 마음은 온전히 그에게 닿지 않았다.

‘기다리면 곧 너도 내게 올 테지.’

음유 시인이 이르기를,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기다리는 법이라고 노래했으니까.

그래서 미오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었다.

‘방패막이? 시한부 결혼?’

그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뭐든 상관없었다. 품속에 서류를 갈무리한 지오프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저기, 공작님. 그냥 가시면 어쩌나요?”

어제부터 이렇게 머리를 복잡하게만 만든 장본인이 도망치려는 것 같아서, 미오는 그의 셔츠 자락을 움켜잡았다.

“……뭐지?”

고개만 뒤로 한 지오프리가 그녀의 바르르 떨리는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그게, 셔츠가 엉망이 되어서…….”

왜 나오는 말은 죄다 이렇게 엉뚱한 것뿐인지 모른다. 셔츠를 붙잡은 손을 놓고 입술을 짓이기자 그가 천천히 돌아섰다.

“당장 벗어 달라는 건가?”

지오프리가 손을 뻗어서 허리춤에서 셔츠를 빼내더니 단추를 뜯을 듯이 굴었다. 이러다가 정말 침실에서 옷이라도 벗어 줄 판이었다. 그녀가 두 팔을 겹쳐서 엑스 표를 만든 다음에 격렬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생각해 보니까 제가 괜히 바쁜 분을 붙잡았네요.”

속이 답답하기는 하지만, 지오프리와 함께 더 있다가는 정신이 더욱더 혼란스러워질 뿐이었다. 미오가 두 손으로 그의 등을 떠밀었다.

“가서 일 보세요.”

“……싱겁긴.”

“참, 성안 식구들에게는 좀 천천히 알려도 괜찮을까요.”

지금도 이렇게 정신이 없는데, 로렌이나 다른 사람들이 야단법석을 떨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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