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카스피언 공작 부인 (1)
그때 지오프리가 손수건을 꺼내 입을 가리더니, 기침했다.
콜록콜록.
그는 일전의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갑자기 창백해지는 지오프리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가 얼른 물을 따라서 건네주었다.
“괜찮아요?”
기침이 멎지 않아 물도 힘들게 마신 그가 대충 손을 흔들었다.
“약은 챙겨 먹고 있는 거죠?”
미오는 자연스레 그의 등을 가벼이 두드려 주었다. 넓고 단단해 보이는 지오프리의 등을 바라본 순간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왜 자꾸 미워하지 못하게 만들어.’
미워하기는커녕 자꾸만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이제 그의 운명이 가엾기까지 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은 그녀인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기침이 멎은 지오프리가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아서 끌었다. 갑자기 그와 무릎이 맞닿게 서게 되었다.
“이제 조금 쉬면 괜찮아질 것 같군.”
여전히 꽉 부여잡은 손목에서 일전에 그가 준 팔찌가 달랑댔다. 그걸 아직도 하고 있다는 것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서 얼른 다른 손으로 소매를 내렸다. 그리고 잡힌 손을 빼려고 몸을 뒤로 했지만, 지오프리는 그녀의 소매를 더욱더 위로 걷어 올렸다. 그리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팔찌의 진주알을 쓸어내렸다.
“……하지 마―.”
손가락이 그녀의 피부에 닿는 것도 아니었지만,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몸에 자잘한 경련이 일었다. 그사이 그녀의 몸이 지오프리의 무릎 사이에 갇히다시피 했다.
“내 선물을 소중하게 여겨 줘서 고맙군.”
이내 손을 뗀 그가 미오의 소매를 단정하게 정돈해 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에게서 멀어지려고 했다. 거칠어졌던 호흡이 채 진정되지 않은 채 미오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이 아니면 도저히 하지 못할 말이 있었다.
“나, 나랑 해요.”
“……뭘 말이지?”
그녀는 전혀 모르겠다는 눈을 한 지오프리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나랑 결혼해요.”
“……진심인가?”
“내가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해 온 말이었다. 이제야 미오는 제가 뱉은 말이 얼마나 진심인지 느낄 수 있었다.
‘맙소사, 나 정말 이 사람을 좋아하나 봐.’
아파서 콜록대는 모습에 가슴이 아팠고, 나쁜 여자와 결혼하는 것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내게서 늘 달아나려고만 하지 않았나.”
좋아한다고 고백했고, 청혼까지 했는데 지금 그는 미오의 말을 믿지 못했다.
‘하긴 내가 좀 헷갈리게 굴기는 했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그에게 이끌리는 감정을 외면하려고도 했고, 그를 이용하려는 마음을 품은 적도 있었다. 미오는 차오르는 눈물을 꾹 참고, 그대로 두 손을 그의 목에 감았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서 지오프리의 서늘한 입술을 찾았다.
“……흡.”
입술이 맞닿는 순간 왜 이리 서러운 기분이 드는지 몰랐다. 이 마음이 진심인 것을 그가 몰라주는 것이 속상했다. 아니, 이렇게 진심이 되어 버린 감정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쉬, 울지 마.”
입맞춤하는 사이에 그의 다정한 음성을 듣자 미오는 더욱더 크게 울었다.
“내가 좋아한다고 했는데, 결혼하자고 했는데!”
“미오.”
한참 서로의 숨을 탐하던 두 사람의 얼굴이 떨어졌고, 지오프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숨을 헐떡대던 미오는 그의 음성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들었다. 지오프리가 손을 들어서 그녀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결혼은 장난으로 하는 게 아니야.”
“누가 그런 것도 모르는 줄 알아요?”
“인연을 맺으면 평생 함께하는 거야.”
언젠가 들어 본 말과 비슷했다.
‘암수가 한번 짝은 지으면 말이야. 평생 함께하는 거야. 깍깍.’
까마귀의 말을 떠올라서 기분이 약간 떨떠름했다. 하지만 지금 그를 누구에게도 내어 주고 싶지 않은 것은 진심이었다.
“당신이 다른 사람하고 결혼하는 건 싫어요.”
비장한 눈을 한 미오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대자, 그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내 짝이 되는 거야.”
“……아.”
기이한 느낌은 점점 커졌고, 달라진 그의 표정에 약간의 두려움이 일었다. 무심하기만 하던 지오프리의 눈가에 붉은 열기가 묻어났다. 미오가 몸을 약간 뒤로 빼려다 창문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을 확인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앉은 거야.’
그녀가 지오프리의 오른쪽 허벅지에 걸터앉은 채로 입맞춤하고, 이런 낯 뜨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실컷 정신이 팔려 있던 미오의 눈에 수치심이 어리자, 그가 손가락을 뻗었다.
“조금 부었군.”
그가 미오의 젖은 입술을 훑었고, 그녀는 지오프리 눈 안에 넘실대는 어둑한 기운을 느꼈다.
“이제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약속은 성립되었어.”
“그게 무슨 말이죠?”
“식은 따로 해야겠지만…….”
미오는 그제야 그가 말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지오프리는 그녀와 그가 결혼하기로 한 약속을 언급한 것이다.
“일단 그러니까, 그게…….”
좋아하는 감정과 별개의 문제에 미오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의 눈이 흔들리는 것을 확인한 지오프리는 그대로 미오의 허리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곧장 입술을 포개서 그녀의 항의를 그대로 삼켜 버렸다. 반쯤 가려진 창밖으로 땅거미가 붉게 내리고 있었다.
* * *
“사무엘, 서신을 지금 당장 전하도록 해.”
“공작님, 정말 돌로레스 님과 혼인하시나요?”
서신을 건네받은 사무엘의 눈이 얼마나 울었는지 퉁퉁 부어 있었다.
“다들 내 결혼에 관심이 퍽 많군.”
사무엘은 어쩐지 들떠 보이는 공작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의 주인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긴 했지만, 요즘 들어서 더 어려워진 느낌이었다.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주인님의 일인걸요.”
“그만 울어. 우는 모습은 정말 참아 주기 힘드니까.”
지오프리의 손이 책상 위에 꽂힌 단검으로 향하자 그제야 사무엘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서신을 곧장 전하겠습니다.”
사무엘이 사라지고 나자 지오프리는 여유롭게 검을 빼 들어서 문으로 던졌다.
“황제가 내게 도움을 준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인가.”
좀처럼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사냥감이 하나 있었다. 경계심이 지나쳐서 그가 쳐 둔 덫을 모두 피해 갔다.
“작고 귀여운 짐승은 제 발로 오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거니까.”
그의 목에 매달려서 펑펑 울던 작은 몸을 떠올리자 지오프리의 단정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역시 우는 것은 별로야.”
그녀는 활짝 웃는 얼굴이 보기 좋았다.
그리고 지오프리는 생애 처음으로 품은 이 감정을 절대로 놓지 않을 작정이었다.
“……내 것이니까.”
* * *
방으로 돌아온 미오는 넋이 빠진 사람처럼 창가에 앉아 있었다. 숨이 심하게 차고 심장이 바닥에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태풍이 지나간 기분이야.’
생각을 정리해 보려던 그녀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도 이렇게 엉망진창인데, 아까 일을 떠올려 봐야 혼란만 가중될 게 뻔했으니까.
일단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편이 좋다.
“아앗.”
머리카락이 입술에 닿자 미약한 통증이 느껴졌다. 손끝으로 입술을 더듬는데 작은 상처가 느껴졌다. 그러자 창백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지오프리…… 아, 진짜 끝까지 나를 괴롭히네.”
사실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나, 나랑 해요.’
‘나랑 결혼해요.’
‘내가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그렇게 집무실이 떠나가라 외쳤는데 잊을 수가 있을까.
“하, 진짜 미쳤나 봐.”
미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데, 아까의 감각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지오프리는 알 듯 말 듯 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청혼이 좋은지 싫은지는 구분하기 힘들었다. 그는 인제 무를 수 없다는 것만 확실하게 했다.
“무슨 계약서를 작성하듯 깐깐하게 굴었어.”
미오의 제안은 다소 충동적이긴 했지만, 무르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했던 말을 지킬 거라는 확신을 보이자 지오프리는 느닷없이 입맞춤을 퍼부었다. 절대 놔주지 않을 것처럼 붙잡고서는 미오의 입술을 비벼 대고 핥았다.
“연애 한 번도 안 해 봤다면서…….”
이렇게 정신을 쏙 빼놓는 입맞춤을 할 수 있는 걸까.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미오가 혀로 상처를 살짝 쓸었다.
“꿈이면 좋겠다.”
아니면 지오프리가 잠시 기억 상실에 걸리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 일은 좀 부끄럽기도 했고, 겁이 났다.
“완전히 내가 매달리는 느낌이었잖아?”
결혼해 달라고, 나랑 하자고 졸라 댔으니까.
지오프리는 약간 마지못해서 청혼에 응하는 느낌이었나.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 입맞춤이 너무 격렬했고, 눈빛이 꼭…….
“정글에 사는 맹수 같았잖아.”
하지만 제멋대로인 지오프리가 내일은 또 무슨 말을 할지는 아직 모를 일이다. 창문에 머리를 콩콩 박아 대던 미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물은 이미 엎질러졌고, 인제 와서 이런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머리가 복잡해진 그녀는 저녁도 물린 채 그래도 침대에 들었다. 이럴 때는 자는 게 최고의 극복 방법이었다.
잠은 쉽게 오지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지친 탓인지 평소보다 조금 더 늦게 눈을 떴다.
“후함.”
기지개를 쭉 켠 미오가 창밖부터 확인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
입술을 움직였더니 상처가 덧난 건지 악 소리가 절로 났다.
‘짐승도 아니면서 왜 사람 입술을 깨문 거야.’
이 상처 때문에 눈을 뜨자마자 기분이 묘해졌다. 침대에서 내려온 미오가 얼른 거울 앞에 서서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이제는 익숙해진 은발에 호박색 눈을 한 여인이 거울 안에 있었다.
“진짜 앞으로 어쩔 거야?”
가뜩이나 불안한 상황인데, 청혼을 덜컥 해 버렸으니 이제는 뭐라 설명하기 힘들었다. 유혹해서 지오프리가 넘어오면 걷어차 버리겠다는 목표도 사실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
“아악!”
머리를 세차게 흔드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