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우리 결혼해요!
미오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얼른 돌아가서 이불 속에 숨고 싶었다. 또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영영 기억해 내지 못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하튼 이제 돌아가야겠어요.”
먼저 몸을 돌린 미오가 창고의 문을 열자 떡 버티고 있던 앙겔라스가 크게 기지개를 켰다.
“밤새 여기 있었던 거야?”
끼잉, 끼잉.
미오는 혹시 개가 어제 그녀가 했던 실수를 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괜히 머쓱해졌다. 그녀가 손을 뻗어서 무시무시하게 생긴 짐승의 정수리를 쓱쓱 쓸었다.
“나중에 다시 올게.”
서둘러 인사를 마무리한 미오가 뒤따라 나오는 지오프리를 의식하면서 뛰듯이 걸었다.
“공작님, 천천히 오세요!”
어찌나 재빠른지 아까 쥐가 나서 고생했던 게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그녀가 달아나자 문가에 기대선 지오프리가 손끝으로 다른 손등을 두드렸다.
“앙겔라스, 저렇게 달아나면 더 쫓고 싶어진다는 걸 모르는 걸까?”
그의 음산한 음성에 거대한 몸을 한 개가 꼬리를 다리 사이에 말아 넣었다.
* * *
“공작님, 황제 폐하께서 이것을 보내셨습니다.”
평온해 보이던 카스피언 공작가가 발칵 뒤집혔다. 황제가 보낸 서신에는 혼인을 명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변방에서 큰 공을 세운 카스피언 공작에게 버드만 후작가의 돌로레스와 혼인을 명하는 바이다. 아름다운 두 젊은이의 앞날에 디아나의 가호가 있을 것이며, 가장 위대한 가문의 결합으로 카스피언 제국은 향후 천년의 세월도 끄떡없을 것이다.」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황족이나 귀족은 황제의 명으로 결혼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대부분은 그것을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받아들였다. 명목상 큰 공을 세운 공작을 치하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오프리는 전혀 영광스럽지 않았다. 불거진 목울대를 훑던 그가 씩 웃었다.
“강제로 목줄을 채우겠다?”
변방으로 다시 보내거나 암살 시도를 더 할 줄 알았는데, 이건 또 의외의 공격이었다. 그를 역겨운 눈으로 훑던 돌로레스 버드만을 떠올리자 속이 뒤틀렸다.
‘나, 당신 옆자리가 탐나요.’
무도회에서 광적인 관심을 보이더니 황후를 제대로 구워삶은 게 분명했다.
‘라비니아 베일이 아니라 돌로레스 버드만이라………….’
물론 그에게는 두 사람 중 누가 되었든 간에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나쁜 일만은 아닐지도 몰라.”
지오프리는 서신을 갈가리 찢으며 서늘하게 웃었다.
이 소식에 놀란 것은 지오프리뿐만이 아니었다. 광분한 알렉세이가 쿵쿵 발소리를 내면서 집무실을 찾았다.
“아니! 우리 미오는 어쩌고! 버드만 가문의 영애라니?”
알렉세이의 얼굴에 오만 가지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미오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가 미오를 마음에 뒀어도 지오프리와 미오의 결합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제 와서 지오프리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다니?
“우리 미오를 이렇게 저버릴 거면 그녀를 흔들지 말았어야지!”
씩씩대던 알렉세이가 서가를 뒤흔들자 꽂혀 있던 책이 앞으로투두둑 떨어졌다. 흥분한 알렉세이의 모습에 지오프리가 허탈하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진짜 화를 내야 할 것은 알렉세이가 아니라 그였다. 분노를 간신히 참고 있던 지오프리가 씁쓸하게 입을 뗐다.
“알렉세이, 조금 진정하는 게 좋겠군.”
힘을 제어하지 못해서 소중한 사람을 잃었던 기억을 되풀이할 생각은 없었다. 흥분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우리 미오라고 부르는 게 거슬려서 듣기 싫었다.
“지오프리…….”
“슬슬 준비가 끝나 간다.”
그는 지오프리가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별 감흥이 없었지만, 왠지 지금은 조금 염려되었다.
“아직 그 계획에 변함이 없는 건가.”
“그렇다. 그리고 그런 결혼은 조금도 응할 생각이 없다.”
지오프리의 말에 알렉세이는 묘한 안도감과 함께 괴로움을 느꼈다.
* * *
“미오 님! 이 일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해요.”
지오프리의 결혼 소식에 로렌이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달려왔다. 미오가 찬물을 그녀에게 건네면서 진정시켰다.
“하지만 황제 폐하의 명이니까…….”
“우리 순진하고 착한 공작님이 이대로 결혼하는 걸 보고만 있을 건가요!”
“……하.”
순진하고 착한 공작은 아닌 것 같지만, 그의 결혼 소식에 미오 역시 큰 충격을 받았다.
‘지오프리가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고……?’
이건 그가 다른 사람과 춤을 추거나 대화를 나누는 일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내 허리를 휘감던 그의 손이 다른 여자를 꼭 안고 있겠지.’
그냥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틀리고, 토악질이 치밀었다. 미오는 그녀조차 몰랐던 이런 감정에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이건 거역할 수도 없을 텐데…….”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는 것은 반역으로 간주된다.
가뜩이나 황제와 사이도 좋지 않은 지오프리가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그녀가 걱정으로 한숨을 내쉬는데 로렌이 큰 소리를 냈다.
“왜 없답니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답니다.”
로렌의 말에 미오가 고개를 들었다.
“결혼을 먼저 해 버리면 아무리 황제 폐하라도 중혼을 명하실 수는 없죠.”
“하지만 공작님이 갑자기 누구랑 결혼한다는 거죠?”
“미오, 당신이 아니라면 누가 우리 공작님의 짝이 되겠어요?”
“제가 공작님과 결혼한다고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에 미오가 눈을 크게 떴다.
‘이건 해결책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문제처럼 느껴지는데…….’
“공작님을 이대로 포기하실 건가요? 그래요?”
그녀가 망설이는데 앞치마를 세차게 움켜쥔 로렌이 강경하게 말했다. 도대체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오프리를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그 여자는 정말 아니야.’
돌로레스는 그냥 재미로 지오프리를 노리는 것이다. 저번에도 다짐했지만, 남자 사냥꾼에게 그를 넘길 수는 없다.
‘일단 가서 지오프리랑 대화를 나눠 봐야겠어!’
결심한 미오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똑똑.
공작의 집무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음성이 들렸다. 미오는 심호흡을 길게 한 후 문을 밀고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그에게 매달려서 결혼은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아.”
하지만 집무실 안의 공기가 너무 무거워서 섣불리 행동할 수가 없었다. 반쯤 닫힌 커튼 앞에서 지오프리가 책을 읽고 있었다. 목 끝까지 채운 단추와 갖춰 입은 재킷, 얼룩 하나 없는 안경. 그 단정한 모습에 미오는 두근대는 가슴을 움켜잡아야 했다. 그녀가 주춤대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지오프리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뗐다.
“급한 일이 아니면…….”
‘지금 나를 쫓아내려는 거야?’
지금 이런 일이 있는데 책이나 읽고 있는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약간 격앙된 음성이 흘렀다.
“그 결혼, 하실 건가요?”
언제가 물어본 적 있는 질문과 닮아 있었다. 하지만 이 마음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절박했다.
“글쎄.”
이런 순간에도 저놈의 글쎄라는 말밖에 할 수 없는 거야?
화가 잔뜩 난 미오가 그의 책상 가까이 다가섰다.
“저더러 곁에 있으라면서요?”
“……음.”
그제야 읽던 책을 덮은 지오프리가 고개를 들었다.
두 손으로 책상을 짚은 미오의 상기된 볼과 화가 나서 반짝대는 눈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늘하늘한 은발이 어두운 방에서도 빛을 발했고, 자잘한 레이스가 달린 분홍 드레스 아래 가슴이 흥분으로 들썩였다. 그는 책 표지를 살포시 쓸어내리면서 싱긋 웃었다.
‘화를 내면 호박색 눈에 붉은 기가 도는군.’
“왜 그렇게 화가 난 거지?”
“그러는 공작님은 뭐가 그렇게 좋아서 웃고 있어요?”
그녀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가까이 다가섰다.
“딱히 화를 낼 만한 일도 없으니까?”
천하태평인 지오프리 때문에 속이 터질 것 같았다. 평소에 그를 두려워했던 것도 잊은 미오가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다.
“그 사람을 좋아하지도 않잖아요!”
“영광스러운 일이기는 하지.”
의자를 미오 쪽으로 완전히 튼 지오프리가 다리를 꼬면서 속삭였다. 지나치게 차분한 그의 태도 때문에 미오는 심장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전부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황제의 명이란 절대적이니.
“하지만…….”
그녀가 말문을 흐리자, 지오프리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면서 중얼댔다.
“사무엘이 내가 돌로레스와 결혼하지 않는 방법이 있긴 하다던데. 하지만 그런 방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알다시피 나는 평판이 그리 좋지 않으니까, 나 같은 남자와 결혼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확실히 제국 내에서 지오프리는 평판이랄 게 없었다.
빼어난 외모와 검술 실력은 모두의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황태자의 자리를 뺏긴 데다, 정원에 시체를 파묻는다거나 광기에 사로잡혀서 닥치는 대로 살육을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갖고 싶지만, 다칠지도 모르는…….’
가시 돋친 장미 같은 존재가 바로 지오프리였다.
그러니 정식으로 혼담을 넣는 가문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단 말이야.’
미오는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을 겨우 참고 있었다. 움켜잡은 드레스 자락이 구깃구깃해졌고, 화를 참느라 어깨가 뻣뻣했다.
그때 지오프리가 무슨 생각이라도 난 건지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벼이 두드렸다.
“아! 베일 영애라면……”
라비니아와 결혼한 지오프리를 상상하자 아까보다 더 아찔해졌다. 돌로레스가 재력과 인물, 권력을 탐하는 쪽이라고 하면 라비니아는 광적인 집착을 보였다. 그녀는 아마 뜻대로 되지 않으면 지오프리에게도 독을 쓸지도 모른다.
‘저번에 살린다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동굴에서 했던 고생이 생생했다. 그때 발톱까지 빠진 터라 지금 그녀의 손톱에 미세한 금이 가 있었다.
‘이번에도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지오프리가 죽으면 그녀는 영영 인간이 될 수 없었다. 복잡한 이유로 절대 이 결혼을 막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