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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86)화 (86/123)

86화 덫에 걸려든 작은 여우

입에서 더운 김까지 나오기 시작하자 다리 힘이 쭉 빠졌다. 그녀가 축 늘어지자 지오프리는 그대로 미오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제야 달빛을 받은 지오프리의 얼굴을 확인하게 된 그녀는 손을 들어서 그를 밀어 냈다.

“지오프리, 너는 안…… 돼.”

정신을 잃기 전이라 횡설수설 하는 미오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했다.

“왜 안 된다고만 하는 걸까?”

그녀를 안은 지오프리의 혼잣말에 앙겔라스가 털을 삐쭉 세웠다.

급한 대로 후원에 있는 좁은 건물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지오프리는 퍽 난감했다. 앙겔라스가 버티고 있는 후원에는 쥐새끼 한 마리도 얼씬하지 않았고, 두 사람이 몸을 숨기기에 지금 이곳만큼 적당한 곳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사람의 열기로 작은 창에 습기가 찼다.

“머리가 지끈대는군.”

두통을 유발하는 것은 그의 앞에 있는 작은 인영이었다.

“지오프리! 너는 안 된다고…….”

제대로 앉을 의자도 하나 없어서 탁자 위에 대충 앉혀 둔 미오가 몸부림을 쳤다. 곧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운 그녀의 모습에 마디가 불거진 그의 손이 미오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의 손아귀 아래서 버둥대는 작은 몸은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뜨거웠다.

“지오프리, 지오프리!”

끝까지 그를 거부하면서도 연신 이름을 외쳐 대는 미오를 내려다보는 지오프리의 무감한 얼굴에 붉은 기가 조금씩 번졌다.

“또 지오프리인가.”

그녀를 타박하는 것 같지만, 노기가 느껴지지는 않는 느릿한 음성이었다.

“……너무 더워.”

목을 벅벅 긁어 대는 그녀의 손목을 떼어 잡은 지오프리의 얼굴이 묘하게 진지했다.

‘전에는 독충에 물렸거나 열병에 걸렸다고 생각했었는데…….’

“알렉세이가 날 욕해도 할 말이 없군.”

그녀를 향한 기이한 감정의 정체를 깨닫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생소한 감정은 만지면 손 델 것처럼 뜨거웠고, 들여다보기 겁날 정도로 거친 불길을 일으켰다.

“지오프리, 지오프리…….”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도 미오는 내내 그의 이름만을 불렀다. 이름에는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미오가 불러 주는 그의 이름이 어쩐지 듣기 좋았다.

“네가 원하는 것이 뭔지 잘 알지만, 지금은 들어줄 수 없어.”

어쩐지 조금 안타까운 기분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하지만 일시적인 기분에 취해서 중대한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더더구나 상대가 저리 정신을 잃은 상태라면 말이다.

“왜, 안 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건지 투정하듯 그녀가 물었다. 속상한지 동그란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이 흘렀다. 지오프리는 한 손으로 미오의 눈가를 훔치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너는 내 것이 맞지만, 지금은 안 돼.”

어쩐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인 것 같았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싫어! 저리 가!”

격하게 몸부림을 치던 미오가 이제 그녀의 손목을 물어뜯으려고 하는 것을 본 지오프리가 한숨을 쉬었다.

“네가 다치는 것도 허락하지 않겠다.”

그대로 주저앉자 탁자에 앉은 미오의 무릎쯤에 그의 이마가 닿았다.

“……미오. 내게 와.”

그의 주문 같은 속삭임에 미오는 그대로 두 팔을 뻗어서 지오프리의 목을 감싸 안았다. 하지만 여전히 고통스러운지 괴이한 탄성을 질러 댔다.

“이러면 앙겔라스가 잘 수가 없을 테니까.”

미오의 신음에 귀가 살짝 붉어진 그가 혼잣말했다.

“미오, 눈을 감아.”

지오프리가 붉은빛으로 물든 미오의 눈을 응시한 채 느릿하게 입술을 마주 댔다. 그의 서늘한 입술이 닿자 미오는 진정이라도 된 건지 버둥거리는 것을 멈추었다. 그녀는 숨을 헐떡대면서 지오프리가 건네주는 숨을 정신 없이 받아들였다. 잠시 후 떨어진 입술 사이로 긴 한숨이 맴돌았다.

“미오, 자…….”

지오프리가 한 손으로 셔츠를 조금 내려 주자 아이 손바닥만 한 창을 타고 들어온 달빛이 그의 하얀 목덜미를 비추어 주었다. 그러자 미오가 그의 어깨로 고개를 파묻었다.

“그래. 착하지.”

두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은 미오가 그의 체향에 취해서 만족스러워하는 소리를 냈다. 그대로 그녀를 안은 채 일어나서 탁자에 걸터앉은 지오프리는 한 손으로 미오의 등을 쓸어내렸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좁은 창고의 벽 위로 한 몸처럼 뒤엉킨 검은 그림자가 밤새 어른댔다.

* * *

“……으음.”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자서 머리가 개운했다. 충만한 기운이 전신에 감돌았다. 두 팔을 뻗어서 기지개를 켜려고 하는데,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헉!”

작은 창 아래 벽에 지오프리가 기대앉아 있었고, 그녀가 마치 캥거루처럼 그의 몸에 매달려 있었다. 그제야 어제 앙겔라스를 보러 나왔던 일과 지오프리가 나타났던 장면이 차례로 떠올랐다. 넘어질 뻔한 그녀를 그가 붙들었고, 갑자기 각인열이 올랐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 많았을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민망해서 쳐다보지를 못하겠어.’

그의 다리 위에 걸터앉은 탓에 미오의 슈미즈가 허벅지까지 말려 올라가 있었다. 뽀얀 피부 위에 커다란 손이 올려져 있었고, 그의 다른 한 손은 미오의 허리를 붙들고 있었다.

‘이러고 밤새 잠을 자다니…….’

모를 때는 괜찮았는데, 의식하자 온몸에 개미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화끈거렸다. 우선 조심스레 그의 목을 안은 손부터 풀어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는데, 그녀의 몸을 안은 지오프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놀란 그녀가 눈을 크게 뜨자 언제 깬 건지 지오프리의 날카로운 눈이 미오를 응시하고 있었다. 채 가시지 않은 습한 기운이 어른대는 그의 눈빛에 그녀가 허리를 뒤로 뺐다.

“그게 그러니까…….”

“오늘은 또 무슨 변명을 하려고?”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지오프리가 먼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분명 그녀가 무슨 잘못을 했을 테지만, 기억에 없는 것을 사과하기는 어려웠다.

“제가 몸이 약해서 기절을 했던 모양이에요.”

정말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는 것을 알면서 변명하는 기분이란 끔찍했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각인열에 정신을 잃고 당신에게 매달린 것 같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면 내가 여우인 것도 말해야 하니까.’

괜히 어색해진 그녀가 우물쭈물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좁고 은밀한 곳에서 우리 둘이 꼭 붙어서 잠을 잤던 걸까요.

선택지는 정녕 이것뿐이었나요.

그녀의 눈빛에 담긴 속뜻이라도 읽은 건지 지오프리가 피식 웃었다.

“밤새 나를 붙들고 놔주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내 허리를 잡은 건.”

분명 그의 억센 손이 그녀를 보호하는 건지, 가두는 건지 구분이 안 될 만큼 허리를 감고 있었다.

“그건 탁자 아래로 떨어질까 봐 잡아 준 거지.”

“……그럼 이 손은?”

한 손으로 올라간 슈미즈를 끌어 내리면서 여전히 그녀의 허벅지 위에 있는 그의 손을 가리켰다.

“그건 나도 잠결이라서 이유를 모르겠군.”

“……네?”

이런 무책임한 대답은 전에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손을 위로 뗀 지오프리가 그녀의 슈미즈를 무릎까지 단정하게 내려 주었다. 그리고 이마를 잔뜩 찡그리면서 그녀에게 턱짓했다.

“이제 좀 비켜 주겠어? 다리에 피가 통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미오는 결국 밤에 돌아가려는 그를 붙잡고 못 가게 한 장본인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게 일방적인 의심은 아닌 것 같아서 항의하기는 힘들었다.

끙차.

미오가 얼른 탁자 아래로 내려오는데 쥐가 나서 그대로 벽에 기대서기도 힘들었다. 지오프리 역시 몸이 힘든지 그녀에게 등진 채 탁자 끝에 기대서서 한참 뭉그적댔다. 미오는 온몸을 주무르면서 작은 창밖을 노려봤다.

‘누가 또 이 사실을 알면 진짜 큰일이야.’

이미 미오와 지오프리의 관계에 달콤한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그런데 같이 밤을 보낸 것을 들키면 이제 두 사람 사이는 낭만 소설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위험한 공작과 사랑에 빠진 여인.’

로렌이 또 이상한 말을 할 것을 생각하자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는 참 좋은 사람이지만 지오프리에 관한 문제라면 다소 과잉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몸을 세운 미오가 옷을 정돈한 후에 은밀하게 속삭였다.

“공작님. 저 먼저 나갈 테니까 나중에 나오세요.”

지오프리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신은 그에게 완벽한 미모만을 내려 주었다. 다른 것은 죄다 부족하거나 없었으니까.

“그게, 같이 나가면 괜히 의심을 살 테니까요.”

“……이를테면 어떤?”

그걸 꼭 말로 해야 알겠어?

미오의 호박색 눈에 짜증이 가득했지만, 그는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할 수 없이 그녀는 입에 담기 싫은 이야기를 천천히 늘어놓았다. 이따금 그는 어린아이보다 못한 이해력을 가졌으니까 말이다.

“안 그래도 우리 사이를 오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렇게 같이 나가면 오해 정도가 아니라…….”

“잠깐만.”

그녀가 설명하는 중간에 말을 끊은 지오프리가 구겨진 셔츠를 탁 털면서 가까이 다가섰다. 그는 방금 일어난 얼굴인데도 막 씻고 나온 것처럼 뽀송뽀송했다. 완벽한 지오프리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는데, 그가 손가락 하나로 미오의 이마를 콕 찔렀다.

“지금도 이렇게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쳐다보고 있는데, 그게 과연 오해인가?”

“이건.”

불가항력 같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람은 누구나 예쁘고 반짝이는 존재에게 마음을 뺏기게 마련이니까.

“네가 나를 좋아하고, 내가 허락했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지?”

자신감 넘치는 지오프리의 말에 그녀는 더욱더 혼란스러워졌다.

“그게, 공작님은 공작님이고 저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 데다, 저는 사람도 아닌데요.

괜히 의기소침해진 그녀는 뒷말을 흐렸다.

“아, 그런 문제 때문이라면 걱정할 거 없잖아.”

이렇게 복잡하고 중요한 일을 두고 그는 쿠키 하나 사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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