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그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다면
하지만 곧 들리는 그의 설명에 미오는 얼른 휘파람 부는 척을 해야 했다.
“내게 목숨 빚을 두 번 졌다.”
“아, 그 두 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지만, 태연한 척 인사를 건넸다. 당황하지 않으면 상대는 그녀의 오해를 알 리가 없을 테니까.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만하게 턱을 쳐든 지오프리가 의자에 걸쳐 둔 재킷을 빼 들었다.
“잘 기억해 둬.”
천천히 그가 온실 밖으로 걷기 시작했고, 이제 완전히 마른 드레스 자락을 두 손으로 잡은 미오가 그 뒤를 쫓았다.
‘목숨 빚이라니, 설마 목숨에는 목숨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겠지.
빚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걸 보면 그것에 상응하는 뭔가를 내놓으라는 것 같은데…….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데?’
숲에 숨겨 둔 도토리와 말린 열매가 조금 있기는 했지만, 시간이 너무 지나 버려서 어디다 묻어 뒀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그녀가 뒤에서 머뭇대자 빠르게 걷던 지오프리가 멈춰 섰다.
“늦게 오면 로렌이 만든 고기파이가 남아 있지 않을 텐데…….”
“가고 있어요.”
고기파이라는 단어에 미오의 눈이 동그래졌다. 일전에 그녀가 했던 부탁을 지오프리가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저물어 가는 노을빛이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 * *
저녁 식탁에는 맛있는 것이 한가득 올라왔다.
“아까 만든 건 다 식어 버려서 새로 준비했답니다. 진짜 맛있을 거예요.”
로렌이 특별히 미오의 앞에 고기파이가 산더미처럼 쌓인 접시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요리를 코앞에 두고도 미오의 눈은 자꾸 건너편에 앉은 지오프리에게 닿았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과 날렵한 턱선, 오물대는 입술, 반듯한 이마, 자연스레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
‘깨, 깨물고 싶다.’
탄탄한 어깨 근육을 보면서 미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아까부터 그 생각만 하느라 머리가 엉망이었다.
“모처럼의 소풍을 망쳤나 했는데 말입니다.”
로렌의 음성에 미오는 겨우 상념을 떨쳐 낼 수 있었다. 그렇게 포크를 들어서 콩을 골라내려고 하는데, 우울한 음성이 들렸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미오.”
대공이 반나절 사이에 나이가 갑자기 더 들어 보였다.
“놀라셨죠. 제가 줄을 놓치는 바람에…….”
아무래도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은데, 사실 대공의 탓이 아니었다. 지오프리에게 정신이 팔려서 바보 같은 짓을 한 것은 그녀였으니까.
“내가 자책할까 봐 그렇게 말해 주다니, 당신은 정말 상냥하군요. 제가 수영만 할 줄 알았더라면 백 번이고 뛰어들었을 겁니다.”
“어쨌든 아무도 안 다쳤으니까요. 인제 그만 걱정하셔도 될 것 같아요. 이것 좀 드세요.”
아까부터 포도주만 줄곧 마시던 대공의 접시에 고기파이 하나를 덜어 주자 그제야 그의 얼굴이 환하게 개었다.
“미오. 예로부터 ‘먹을 것을 나눠 주는 사람과는 앞뒤 잴 것 없이 결혼하라’는 우르체카의 속담을 들어 본 적이 있나요?”
“……네?”
대공의 괴상한 말에 미오의 눈이 튀어 나올뻔했다.
탁.
바닥에 포크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정확하게는 집어 던지는 것과 비슷한 소리였다.
놀란 미오가 고개를 들자 입술을 매만지는 지오프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손가락 두 개를 펴서 흔들었고, 미오는 금방 고개를 홱 돌렸다.
난데없이 목숨 빚을 상기시키는 이유가 뭘까.
‘고기파이 먹다가 체하라는 거야. 뭐야.’
어금니를 꽉 깨문 미오가 얼른 고개를 홱 돌렸다.
목숨 빚이니 뭐니 하면서 협박을 해 대는 지오프리는 예뻐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 * *
오늘도 잠은 오질 않았다.
“정말 미치겠어!”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도 보고 세로로 가로로 자세도 바꿔 봤고, 베개로 눈도 가려 봤다. 토끼를 2천 2백 마리까지 세어 보기도 했다. 침대 아래로 들어가서 이곳은 동굴이라고 최면도 걸어 봤지만 잠드는 것에 실패했다.
“진짜 잠이 안 와.”
퀭한 눈으로 일어난 미오가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유리 정원에서 지오프리가 했던 말과 표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두 번이라고 말하기 전에 말이야.”
분명 그가 말했다.
‘내 곁에 있어. 네가 나를 원하는 동안 말이야.’
곁에 있으라는 말보다 확실한 고백이 또 있을까.
“하지만 내가 원하는 동안이라는 건 또 뭘까.”
아까는 지오프리의 달콤한 말에 홀려서 그것을 따져 볼 여유가 없었다.
“내가 그를 원하는 동안만 곁에 있으라는 건 결국 언젠가는 떠난다는 의미가 되는 건가.”
혹은 그만큼 그녀의 마음이 더 소중하다는 걸까.
“아, 진짜 성격이 이상해서 그런가. 말도 꽈배기처럼 해.”
단순하게 널 좋아한다.
이렇게 말해 주면 이렇게 고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니야. 좋아한다고 했으면 더 큰 실수 했을지도 몰라.”
기뻐 정원을 펄쩍펄쩍 날뛰는 여우 한 마리를 떠올렸다.
생각만 해도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마음을 안 뺏기려고 제법 노력한 것 같은데, 다시 원점이었다. 달라진 게 많기는 해도 지오프리를 좋아하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존재했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건 괜찮지만, 만약 그가 날 좋아하면…….”
그를 뻥 차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목표를 버렸다고 치면 말이다. 정말 보통 사람처럼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게 된 거라면.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다섯 손가락을 펴서 흔들어 보던 미오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녀의 눈에 찹쌀떡 같던 작은 흰 발이 선했다.
‘나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잖아.’
고민이란 것은 해결했다 싶으면, 다른 고민이 생기는 게 악질 중에서 악질이었다. 미오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잠도 안 오는데 시원한 바람이라도 쐬자.”
어차피 방에 있어 봐야 계속 쓸데없는 생각만 할 테니.
협탁에 던져둔 가운을 걸치고 조심조심 침실 문을 열고 나오자, 희미한 불빛이 어른대는 복도가 보였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금방 바깥으로 나온 미오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창문을 열어서 방에서 맞는 바람과는 질적으로 다른 청량감이 몸을 감쌌다. 제법 세찬 바람에 가운 자락이 파르르 떨렸지만 미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 둥근 달이 높이 떠오른 하늘 아래 정원의 모든 생명이 반짝댔다.
“……확실히 여기가 제일 예뻐.”
많은 정원을 다녀본 것은 아니지만 미오의 눈에는 이곳 정원이 최고로 멋졌다. 희미한 미소를 짓는데 오리를 보면서 군침을 흘렸던 그녀가 호수에 처박혔던 순간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진짜 이상한 오해를 많이 받았었는데…….’
식탐을 부렸다가 짝사랑 때문에 목숨을 저버리는 그런 가련한 인물이 되기도 했었다.
‘그날도 지오프리는 진짜 예뻤지.’
호수 근처에 무언가를 파묻고 있던 지오프리의 처연한 미모가 눈에 선했다. 원작에서 그가 얼마나 냉혈한인지 다 봤으면서도 어째서 이 마음을 거둘 수가 없었을까.
“진짜 이 모든 게 각인 때문일까. 아니면 여우의 마음으로 하여금 영향을 받는 걸까.”
혹은 이게 진짜 그녀의 마음일까.
혼잣말을 한참 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한참 정원을 눈에 담던 그녀가 향한 곳은 후원 쪽이었다.
크르르.
앙겔라스는 역시 오늘도 혼자였다.
조금 작아 보이는 방석 위에 엎드려 있던 개는 그녀의 등장에 얼른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미안, 미안.”
아무리 고독을 즐기는 이라고 해도 매일 홀로 지낸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대화를 나누거나, 이렇게 따스한 체온을 나눌 수도 없으니까. 그녀는 완전한 짐승은 아니지만, 수인이기에 앙겔라스의 마음을 조금 알 수 있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크르르.
꼬리 흔들기를 마친 앙겔라스가 그녀를 향해 거칠게 질주하자 덜컥 겁이 났다. 먼지를 일으키면서 달려온 앙겔라스가 미오의 몸에 와서 부딪쳤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서 있었지만, 그 순간 무의식적으로 미오는 눈을 꼭 감았다.
“……아.”
하지만 거센 힘을 감당하기는 역부족이었고, 두 다리가 심하게 휘청였다.
‘분명 넘어질 거야. 제발 돌부리 같은 것만 없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녀의 몸이 닿은 곳은 바닥이 아니라 누군가의 단단한 가슴팍이었다.
“……달밤에 여기에서 뭘 하는 거지?”
밤새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던 장본인의 음성에 미오는 화들짝 놀랐다. 빨리 몸을 떼려고 했지만, 그녀를 붙든 손 때문에 그러지도 못했다. 지오프리에게 허리와 어깨를 붙잡힌 미오가 작게 중얼댔다.
“그게, 잠이 잘 안 와서요.”
완벽하게 그에게 붙잡힌 것처럼 안긴 미오는 숨을 헐떡댔다.
“이제 괜찮아요.”
다리는 여전히 후들댔지만 이런 이상한 자세로 더 있다가는 심장이 터져 버릴 것이다. 그의 손목이 그녀의 심장께에 닿아 있었으니 미쳐 날뛰는 미오의 심장 소리를 고스란히 느끼고도 남을 것이다.
“왜 자꾸 달아나려고만 하지.”
“제가 언제 그, 그랬어요.”
“지금도 버둥대고 있으니까…….”
너무 좋아서 그런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이제 아예 지오프리가 턱을 그녀의 어깨에 깊이 묻었다.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히는 그의 머리카락 때문에 이상한 신음을 낼 것 같았다. 그리고 아까 훤한 달을 봤을 때 느꼈던 기이한 감각을 알아차렸다.
‘당장 그의 곁에서 벗어나야 해.’
이건 너무 좋아서도, 부끄러워서도 아니었다.
‘……위험해.’
눈가가 붉어지기 시작한 미오는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은 그의 손을 떼려고 애썼다.
“제발 저를 그냥 보내 주세요. 지금―.”
이마가 뜨끈했고, 속이 답답했다. 볼이 달아올랐고 앞이 흐릿해졌다. 그녀가 있는 힘을 다해서 몸을 비틀자 커다란 손이 더욱더 강하게 감아 왔다.
“……괜찮아.”
“제가 안 괜찮―아요. 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