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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84)화 (84/123)

84화 다른 각인의 밤

‘너무 높이 미는 거 아닌가.’

미오가 겁이 나서 손가락 마디가 하얘지도록 줄을 잡고 있는데 알렉세이는 그것도 안 보이는 건지 그네를 부술 것처럼 밀고 있었다.

‘저 무식한 곰 새끼.’

아무래도 불안해서 그네가 있는 쪽으로 걷고 있을 때였다. 짧은 비명과 함께 호수의 중심에 물거품이 일었다.

‘지오프리! 미오가…….’

덜렁대는 빈 그넷줄을 잡은 알렉세이가 그를 향해서 울먹댔다. 대단한 우르체카 대공이 딱 하나 못하는 게 수영이었다.

지오프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물로 뛰어들었다. 물속에 가라앉은 그녀를 안아서 아주 느릿하게 물 밖으로 나왔다. 물속에서의 일을 떠올린 지오프리가 입술을 길게 말아 올렸다.

굳이 숨을 나누어 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아예 불필요한 일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물 밖으로 나오자 창백하게 질린 알렉세이가 달려왔다.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으니까 의원에게는 내가 데려가겠네.’

모포 속에서 축 늘어진 미오를 받아 안으려던 알렉세이가 두 팔을 벌렸다. 지오프리는 그녀가 놀라서 잠이 든 것뿐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의 온실에 데려가면 금방 몸이 마를 것이다.

‘비켜. 알렉세이.’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낮게 속삭였는데, 알렉세이는 물러나지 않았다.

‘제발 내가 하게 해 줘.’

그네를 밀다 일어난 일이니까 책임지고 싶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오프리는 그것을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알렉세이. 가서 물고기나 좀 잡는 게 어때.’

허탈한 얼굴로 어깨를 아래로 툭 떨구던 알렉세이의 얼굴은 참 볼만했다.

지오프리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미오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호박색 눈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를 앞에 두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 지오프리를 지켜보는데, 아랫배가 꼬이는 것 같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얼굴인데 몇 분째 그녀를 노려보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종 고문인가? 아무래도 여기서 나가는 편이 낫겠어.’

물에 빠져서인지, 지오프리의 눈빛과 체향 때문인지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역시 물어보지 않는 게 좋겠어.’

사실 바뀌었다는 그 생각이 궁금하기는 했다. 하지만 듣고 나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미오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처음의 목표를 떠올릴 수 있었다.

‘지오프리를 유혹해서 반하게 한 다음에 뻥 차 버리기.’

물론 처음만큼 자신이 있지는 않았다. 일단 그를 유혹하기도 전에 그녀가 지오프리에게 푹 빠졌으니까.

‘하지만 이건 사랑 같은 건 아닐 거야. 그냥 단순히 각인 때문에 일어나는 혼란 같은 거야.’

미오는 고개를 들어서 온실의 출구를 응시했다. 이대로 재빠르게 달리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일단 곤란할 때는 삼십육계 줄행랑이 최고였다.

“……앗.”

몸을 일으키던 그때 발목에 뭔가 걸리는 바람에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덩굴 같은 것인 줄 알았는데, 내려다보니 지오프리가 그녀의 발목을 붙들고 있었다.

“이야기하다 말고 달아나는 것은 나쁜 습관이야.”

“……그게 아니라 제가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요.”

“그런 거라면 내가 친히 안아서 의원에게 데려다줄 수도 있는데…….”

땀에 흠뻑 젖은 셔츠 안으로 맨살이 고스란히 비쳤다. 그런 지오프리에게 안길 상상을 하자 절로 소름이 일었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던 미오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괜찮은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제…….”

제발 지오프리가 멀리 떨어졌으면 좋겠다. 내뱉는 숨이 뒤섞일 만큼 서로 가까워서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우악스러운 손이 그녀의 발목을 꽉 옭아매고 있었다.

“내 눈을 봐.”

발목을 내려다보던 미오가 고개를 들자, 그의 검은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제는 보내 주지 못할 것 같군.”

“……네?”

의미심장한 그의 말에 놀란 미오가 펄쩍 뛰었지만, 여전히 발목이 잡힌 상태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꾸 강하게 죄어 오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이런 말을 하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얇은 입술 끝이 위로 휘자, 미오의 심장이 더 세차게 뛰었다. 그가 미오를 놓아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지오프리가 나를 원하고 있어?’

지나친 흥분으로 앞이 어질어질했다.

하지만 그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는 전혀 모른다. 지금처럼 손님 대접을 해 주겠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이런 일은 확실히 해야 하는 거니까.’

입술을 짓씹던 미오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물론 기쁘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어요.”

이제 그의 마디가 불거진 손가락이 미오의 발목을 느리게 쓸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에 미오는 숨이 자꾸만 가빠져서 똑바로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그녀의 의아해하는 눈빛을 알아챈 그가 손가락 하나를 위로 들었다. 지오프리의 손가락에는 물풀 같은 것이 있었다.

“여기에 뭐가 많이 묻었군.”

“……아.”

이상한 신음을 낸 것이 민망해서 시선을 피하려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내 곁에 있어. 네가 나를 원하는 동안 말이야.”

사랑 고백과 닮아 있는 그의 말에 미오의 볼에 불이 붙었다.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진 뺨을 시작으로 귀와 목덜미, 어깨, 등을 타고 열기가 전신으로 번졌다.

“……싫은 건가.”

로렌에게 듣기로는 지오프리는 분명 연애는커녕 여인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지금 그는 너무 능숙하게 미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마성의 지오프리라는 말이 틀림없다니까.’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아직 그를 대체할 만한 상대를 찾지도 못했고, 이제는 다른 사람을 찾고 싶은 건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아니요.”

대답을 듣자 그제야 미오의 발목을 놔준 그가 천천히 일어나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보여 줄 게 있어.”

미오는 저보다 두 배는 클 것 같은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정원의 한복판으로 걸어갔다.

‘이제 그의 비밀이라도 공유해 주려는 걸까.’

지오프리의 숨겨진 얼굴을 본다고 생각하자 맞잡은 손이 금방 땀으로 끈적해졌다. 그의 모든 것을 품어 줄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아서, 약간 두렵기까지 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의 손을 이렇게 계속 잡고 싶다는 것이었다.

“바로 여기야.”

그는 삽이 넘어진 자리이자, 아까까지 지오프리가 열심히 삽으로 작업을 했던 곳에 멈춰 섰다.

“……이건.”

시선이 닿은 곳에는 작은 화단이 만들어져 있었고, 주변에 낯익은 꽃이 심겨 있었다. 작고 하얀 꽃을 보자 떠오르는 기억에 미오는 당황스러운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

“시간이 별로 없어서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군.”

“그러니까 시체를 묻은 게 아니라…….”

“카스피언 영지 어디에도 그런 건 없어.”

“스텔라리아를 심은 거군요.”

미오가 중얼대는 음성을 듣더니 그가 퍽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꽃을 아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는데…….”

미오는 그녀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동굴에서 당신을 구해 준 여우는 나라고 떠들고 싶은 거야?’

얼른 표정을 정돈한 미오가 비장하게 답했다.

“아니에요. 전혀 몰라요.”

다행히 지오프리는 그녀를 더 추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오의 머릿속에 한바탕 소낙비가 내렸다. 소문처럼 그는 시체를 파묻는 살인귀가 아니었다.

밤마다 그냥 꽃을 심은 거였다면.

그녀의 옆에 서 있는 이 남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원작만 믿고 늘 의심하고 경계했었는데…….

혼란스러워진 미오가 고개를 세차게 흔드는데 은밀하고 다정한 음성이 들려왔다.

“미오. 이건 누구에게도 보여 준 적이 없는 거야.”

그, 그런 걸 그녀에게 보여 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맙소사. 정말 지오프리가 나를 좋아하나 봐.’

스텔라리아 화단 앞에 선 미오의 얼굴이 온갖 색채로 물들었다.

‘꼭 입맞춤이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야.’

침이 죄다 말라 버려서 목이 따가웠다. 미오는 미세한 떨림을 숨기려고 발끝에 힘을 줘 봤지만, 옆에 선 지오프리의 체향만으로도 온몸의 힘이 죄다 풀렸다.

“두 번이야.”

“……? 두 번이나요?”

입맞춤을 두 번이나 하겠다고 선전 포고 하는 걸까.

지오프리가 천천히 아래로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본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근데 나, 지금 괜찮을까?’

그제야 미오는 물속에서 나온 후에 거울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진짜 입맞춤인데?’

인간으로 변하려고 의미 없이 살을 비비는 게 아니었다. 도저히 엉망진창이 된 꼴로 그와 입을 맞출 수가 없었다.

“못, 못 하겠어요.”

“……뭘 못 하겠다는 거지?”

미오가 손을 쭉 뻗어서 그의 어깨를 밀자, 지오프리가 황당한 얼굴을 했다.

‘천하의 지오프리니까 거부당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겠지.’

미오가 눈을 내리깔고 중얼댔다.

“나중에 해요. 나중에.”

입맞춤이야 거부할 이유가 없지만, 아무래도 좀 씻은 후에 옷을 갈아입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씻어?’

샤워한 후에 가운만 걸치고 나오던 지오프리의 모습을 떠올린 미오의 얼굴이 터질 듯 불그스름해졌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젖은 머리를 한 지오프리는 심장에 무척 해로웠다.

“아무래도 우리가 무척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그제야 지오프리의 냉랭한 기운을 느낀 미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두어 발짝 떨어진 곳에 선 지오프리가 인상을 잔뜩 쓰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이면서 흔들었다.

‘당장 하자는 신호인가?’

혼란스러운 마음을 갈무리한 미오가 입술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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