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 않다
지오프리는 그녀를 뒤에서 안고 뭍으로 헤엄쳐 갔다.
잠시 후 모포에 싸인 미오는 깬 것을 들킬까 봐 조심스레 숨을 쉬었다.
‘지오프리가 나를 구해 줬어.’
그녀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게 아니라, 죽는 것을 외면한 게 아니라 숨을 불어 넣어 주었다.
머릿속이 온통 지오프리가 나눠 준 숨결로 가득하여서 그대로 터질 것 같았다. 손발은 차가웠지만, 심장이 타올라서 이대로 모포에 불이 붙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의 입술이 내…….’
물에 빠져서 감각도 둔했는데, 지오프리의 몰랑한 입술이 닿던 순간은 왜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나는지 모른다.
“……하.”
입술이 맞닿던 순간만 계속 떠올리던 그녀는 더운 한숨을 남긴 채 진짜로 기절해 버렸다.
* * *
미오는 끙끙대다 손으로 눈을 비볐다. 얼굴에 와 닿는 빛이 너무 뜨거워서 살갗이 벗겨질 것 같았다.
“……으읏.”
흐릿하게 뜬 눈으로 살피자니, 그녀는 라탄으로 만든 기다란 의자에 누워 있었다.
“내가 왜…….”
몸에 덮인 모포에서 잘 마른 햇빛 냄새가 났고, 팔에 라탄 자국이 나 있었다. 그제야 그네를 타다가 호수에 빠졌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요즘 왜 이렇게 창피한 일만 생기는 거지.’
주변을 두리번대는데, 어디선가 삽으로 땅을 파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장 맡아 본 적 있는 꽃향기와 풀 냄새가 폐부를 파고들었다.
‘유리 온실이구나.’
이곳은 지오프리의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다.
‘물에 빠진 나를 왜 구한 걸까.’
주변에 고용인도 있었고, 대공도 있었을 텐데…….
볼이 살짝 달아오른 그녀가 손으로 입술을 쓸어내렸다. 그때 땅을 파던 소음이 멎었고, 곧장 긴 다리가 그녀를 향해서 오는 것이 보였다.
미오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그윽한 음성이 그녀를 저지했다.
“그대로 있어.”
목소리만으로 누구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미오는 굳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지오프리의 검은 눈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아.”
땀에 젖은 지오프리를 보는데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굵은 땀방울이 귀 옆을 타고 흘렀다. 작은 방울 하나가 목을 타고 셔츠 속으로 사라졌고, 그것을 지켜보던 미오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다 내 얼굴, 닳겠어.”
지오프리의 얇은 입술이 살짝 비틀렸다. 그러자 미오의 눈앞에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던 순간이 환영처럼 피어올랐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입맞춤이 아니라 숨을 나누어 준 것에 불과해.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마.’
그때 미오 앞에 무릎을 꿇은 그가 손을 뻗어서 그녀의 볼을 쓸었다.
“이제 괜찮군.”
그의 손길에 당황한 미오가 어깨를 움츠렸다. 고맙다고 해야 했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긴장감이 고조되는 찰나였다.
침묵을 견디지 못한 미오가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공작님. 나를 땅에 묻을 건가요?”
“……하?”
어깨를 들썩이던 지오프리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고맙다는 말이 언제 그렇게 바뀐 거지?”
“다 알고 있어요. 당신이 호수랑 이곳에서 하는 일들…….”
멈추고 싶었지만, 긴장한 나머지 자꾸 이상한 말이 나왔다.
예전부터 묻고 싶은 말이었다.
그를 둘러싼 숱한 소문 중에 이게 가장 오싹했으니까.
‘카스피언 공작은 그가 죽인 사람을 자기 정원에 묻어 버린대.’
덜덜 떨면서 묻는 미오의 얼굴을 살피던 지오프리가 비웃음을 날렸다.
“확실히 이곳에 무언가를 묻으면 누구도 찾지 못할 테지.”
흙 묻은 장갑을 벗은 그가 다른 손으로 그것을 흔드는 모습이 어쩐지 기괴했다. 그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불길한 느낌에 미오가 일어나서 라탄 의자에 등을 바싹 붙였다.
“그런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저는 믿지 않아요. 아니…….”
“믿지 않는다면서 왜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지? 내 팬이라고 했던 것도 전부 거짓말이었나?”
그의 날카로운 질문에 지오프리가 세워 두었던 삽이 요란스러운 소음을 내면서 땅으로 넘어졌다. 장갑 끝에서 불그스름한 흙이 후두두 떨어졌다.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입술만 달싹일 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미오. 내가 두렵나?”
그녀가 앉은 긴 의자 아래 무릎을 꿇고 앉은 지오프리가 고개를 위로 들었다. 길게 내리뻗은 그의 검은 속눈썹을 내려다보는 기분이 묘했다.
‘지오프리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어.’
건네는 말은 다소 위압감을 주었으나, 그의 몸짓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낯선 상황에 몸을 움찔대는데 어깨를 감쌌던 모포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라탄 의자 끄트머리에 걸쳐진 모포가 곧 바닥으로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그것을 집어서 그녀에게 건넸다. 그런 허드렛일을 굳이 하는 지오프리가 낯설었다.
“공작님. 일어나세요.”
미오가 떨리는 음성을 냈다.
“질문에 답을 하지 않는 버릇이 있군.”
지오프리는 오늘 답을 듣기 전에는 그녀의 앞에서 움직이지 않을 모양이다. 미오는 차마 정면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두렵지 않아요.”
“……정말인가.”
솜털이 일어난 가느다란 목이 지오프리의 눈앞에 무방비하게 드러났다.
‘한 손으로도 충분하겠군.’
비릿한 미소를 짓던 지오프리가 손을 크게 펼쳤다가 오므렸다.
순간 고개를 번쩍 든 미오가 진지하게 입을 뗐다.
“정원에 다른 시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그것 중 하나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사실 되고 싶지 않은 게 더 정확했지만.
마른침을 꿀꺽 삼킨 미오가 지오프리를 강하게 응시했다.
‘제발 그렇다고 해 줘! 나를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그녀의 애절한 시선에 지오프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리가 없지 않나.”
“……네?”
“무기도 쥐고 있지 않은 일반인을 죽인 기억은 없다는 거다.”
“아, 아.”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미오는 그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시선을 아래로 향한 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오프리의 눈이 닿은 곳은 미오의 발이었다. 물에 빠지면서 구두를 잃어버려서 드레스 아래 하얀 발이 무방비하게 드러났다. 제대로 서지도 못해서 비틀거리던 게 눈에 선했다.
이리 챙겨야 할 게 많은 존재라 정말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지오프리가 손을 뻗어서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원래는 몸이 나으면 너를 보내 주기로 했었는데…….”
“그랬었죠.”
심하게 다친 그녀를 지오프리가 치료해 주기로 했었다.
개인적인 호감이나 인도적인 이유가 아니라 가문의 평판을 위해서긴 했지만 말이다.
‘까맣게 잊고 있었어.’
미오 역시 몸만 나으면 다른 사람을 찾아볼 작정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일이 영 어그러졌다.
‘도대체 지오프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의 서늘한 눈빛에 묘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 몹시 수상쩍었다. 오싹한 기분에 미오는 입 안의 침이 다 마르는 것 같았다.
“생각이 바뀌었다.”
“아니요. 그러지 마세요.”
그 바뀐 생각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의 집요한 시선이 의미하는 바가 그다지 긍정적인 느낌이 아니었다.
‘우습군.’
지오프리는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면서도 그를 훔쳐보는 것을 멈추지 않는 미오를 향해서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는 이제껏 그가 봤던 사람 중에 가장 이상했다. 무엇을 할지 예측할 수 없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다가도 아리송하기도 했다.
‘지금도 퍽 웃기는 상상을 하는 것 같은데.’
그를 둘러싼 헛소문 중에 가장 웃기는 것이 바로 영지에 시체를 몰래 묻는다는 것이었다.
‘내가 왜 몰래 파묻는 짓을 하지?’
지오프리는 죽어 마땅한 상대가 있다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인 후 그대로 버려둘 작정이었다.
‘땅에 묻힐 만한 자격이 있는 것은 제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군사뿐이다.’
아까 미오와 알렉세이가 데이트 운운한 후 그네를 나란히 타는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렇지 않은 척 평온한 얼굴을 했지만, 지켜보는데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내가 이딴 소풍에 왜 나왔는데?’
전날 집무실을 찾은 로렌이 갑자기 소풍을 권했다.
‘공작님. 이러다가 정말 미오 님이 대공님을 선택하면 어쩌려고 이러세요.’
‘로렌, 나는 피곤해.’
‘정말 이러실 거예요! 내일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무조건 소풍을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미오 님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 거예요. 아셨죠?’
이미 그에게 흠뻑 빠져 있는 미오에게 굳이 좋은 인상을 남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알렉세이가 갖은 애를 써도 절대로 먹히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좋아하는 마음은 표현하지 않으면 상대는 영영 모르는 거랍니다.’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거야?’
지오프리가 말끝을 흐리자 로렌이 인상을 잔뜩 썼다.
‘유령을 속이지, 저를 속이실 수 있을 것 같으세요?’
‘로렌, 일단 알겠어.’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고자 그대로 로렌을 보낸 그는 이렇게 계획에 없던 소풍을 오게 된 것이다.
‘관심을 표현하라고…….’
로렌의 조언을 곱씹던 그는 자리에 앉은 채 미오와 정면으로 눈을 맞췄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 정신이 팔린 지오프리가 그녀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얼굴이지?’
하지만 미오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곧장 고개를 돌려 버렸고, 알렉세이와 그네를 타러 가 버렸으니까. 지오프리는 로렌의 조언을 따른 것뿐인데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혼자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는데 로렌이 나타나서 눈치를 주었다.
‘공작님. 여기까지 와서 뭐 하시는 거예요?’
‘로렌. 좀 비켜 주면 좋겠군. 호수가 잘 안 보이니까.’
투덜대는 로렌이 사라지자 곧 시야가 환해졌다. 그네를 타는 미오의 웃음소리가 호수에 울렸다.
‘아무래도 좋은 건가.’
그네를 밀어 주는 게 알렉세이라는 게 좀 거슬렸지만, 지금 이곳은 그의 영역이었으니까.
그러다 미오의 표정이 미세하게 바뀌는 것을 포착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지오프리는 가만 앉아 있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