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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82)화 (82/123)

82화 소문 속의 그와 진짜 그

우르체카 대공은 카스피언 공작 성에 눌러앉을 작정인 것 같았다. 그가 이곳에서 서류를 확인하면 전령이 그것을 공국으로 전했다. 퍽 번거로워 보이는 일이었지만, 대공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대공 각하는 우리 주인님과 은근히 사이가 좋으시다니까요.”

“……그런가요?”

차를 준비한 로렌이 미오에게 뜨거운 물을 부어 주면서 싱긋 웃었다. 대공과 지오프리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속으로 꿀꺽 삼켰다.

‘괜히 로렌이 실망하면 안 되니까.’

지오프리는 제국에 친구 하나 없는 눈치인데, 대공마저 친구가 아니라고 하면 그녀가 슬퍼할 게 분명했다. 로렌이 준비해 준 차를 한 모금 머금는데 깔끔한 맛이 입 안을 개운하게 했다.

“향이 좋아요.”

“저번에 미오가 만드는 것을 도와주었던 그 허브차랍니다. 그나저나 정말 요즘만 같으면 좋겠네요.”

카스피언 제국은 안정을 찾았고, 성벽을 타고 붉은 장미와 흰 장미가 만발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진한 꽃향기를 쉽게 맡을 수 있었다. 서늘하기는 해도 여름은 여름이었다. 모슬린 드레스 위에 숄을 걸친 미오가 로렌의 얼굴을 가만 살폈다.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 보기 좋아.’

차를 홀짝이는데, 로렌이 손수 만든 캐러멜이 담긴 접시를 밀었다.

“함께 먹으면 잘 어울린답니다.”

얇은 종이를 벗겨서 캐러멜을 입 안에 밀어 넣는데, 적당히 달콤해서 허브차의 향을 배가시켰다. 가만 등을 기대고 혀로 캐러멜을 굴리는데, 절로 눈이 감겼다. 로렌의 말처럼 늘 요즘 같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오프리가 묘하게 친절하니까.’

하지만 무도회에 다녀온 이후 그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에게 호감이 없을 때는 지겹도록 함께 있어야 했는데, 보고 싶어지니까 상황이 달라졌다.

‘대공 각하는 한가한데, 일은 지오프리 혼자서만 다 하는 걸까.’

대공은 일을 마치면 그녀를 찾아서 산책이나 승마를 하자고 졸라 댔다. 그리고 자주 우르체카 여행을 권했다.

‘오빠가 있으면 저런 느낌이려나.’

가짜 친척인데도 어쩐지 요즘 부쩍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새로운 추억 덕분에 아마 올여름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럴 게 아니라 다 같이 소풍가자고 청해 보는 건 어떨까요?”

아가타 님이 살아 계실 때는 소풍을 자주 갔었단다. 로렌은 그 이야기를 하면서 가볍게 눈물을 찍어 냈다.

“맛있는 것도 먹고, 함께 물놀이도 하면 좋지 않을까요?”

“……저기.”

“제가 당장 가서 공작님께 말씀드릴게요.”

“공작님은 무척 바쁘실 것 같은데…….”

괜한 기대를 품은 것을 들키고 싶지 않은지 미오는 찻잔만 만지작댔다.

* * *

로렌의 추진력은 실로 엄청났다.

소풍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다음 날 바로 실행에 옮긴 것이다.

미오는 호수 근처에 깔린 천 위에 앉아서 주변을 멍하게 둘러봤다. 그녀 앞에는 익숙한 호수가 펼쳐져 있었고, 뒤로는 오래된 성이 우뚝 서 있었다.

‘이게 다 뭐람.’

셋이 안기에는 다소 좁은 천 위에 앉은 미오가 입술을 짓씹었다. 불편해서 벌떡 일어나고 싶었지만, 그런 행동이 오히려 오해를 살까 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녀가 작게 끙 소리를 내자, 풀을 뜯어서 입에 물고 있던 대공이 빠르게 반응했다.

“미오, 왜 그런 얼굴인가요? 밑에 돌이라도 있는 거 아닌가요? 불편하면 여기 앉을래요?”

“……아뇨. 괜찮습니다.”

무도회라도 가는 것처럼 한껏 치장한 대공이 그의 허벅지 위를 수줍게 권했다.

‘가끔 무슨 생각인지 도저히 모르겠다니까.’

당황한 미오가 재빨리 대공의 시선을 피해서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깨가 맞부딪힌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의 눈이 더 커졌다. 퍽 피곤해 보이는 지오프리의 검은 눈이 그녀의 벌어진 입술 근처에 머물렀다.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얼굴이지?”

“그게, 아직 잠이 덜 깼나 봐요.”

지오프리의 핀잔에 황급히 정면을 바라본 미오가 더듬댔다.

‘이게 다 뭐야.’

이른 아침부터 미오의 침실을 찾은 로렌이 명랑한 음성을 냈다.

‘미오, 얼른 일어나 봐요. 예쁘게 단장해야죠.’

‘……로렌. 아직 해도 안 뜬 것 같은데.’

‘소풍 가려면 준비할 게 많답니다.’

‘……아.’

그렇게 로렌의 손에 이끌려서 단장한 직후 이곳 호숫가에 앉게 되었다. 반짝이는 물결이 넘실댔고, 우아한 백조가 유유히 헤엄쳤다.

“미오. 지난번에 우리가 데이트했던 날만큼 화창하군요.”

대공이 갑자기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고, 그 말에 지오프리의 어깨선이 살짝 경직되었다. 두 남자 사이에 앉은 미오는 가만 눈치를 살피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대공 각하, 그날은 비가 왔는데요.”

알렉세이는 그가 듣고 싶은 말만 듣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도 데이트였다는 것은 인정하는 거죠?

“……소란스럽군.”

대공의 물음에 미오가 아닌 지오프리가 짜증 섞인 음성을 냈다.

‘왜 화를 참는 것 같지.’

곧장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미오의 볼에 와 닿는 기분이었다. 잘못한 것도 없이 왠지 잘못한 기분이라서 점점 불편해졌다.

‘로렌, 아무래도 즐거운 소풍은 망한 것 같아요.’

울상이 된 미오가 소리 없이 아우성쳤다.

“저기 그네가 있었네요. 이리 와요. 미오.”

“꺅!”

대공은 초조하게 손가락만 튕기고 있던 미오의 손목을 잡아챘다. 갑작스럽게 끌어내자 그녀는 거부할 틈도 없었다. 곧장 커다란 나무 아래로 끌려간 미오가 의아한 눈을 했다.

“얼른 앉아 봐요.”

대공은 나무에 매달린 그네를 가리켰다.

“하지만 제가 애도 아니고…….”

호수 가장자리에 있는 그네는 어쩐지 조금 아슬아슬해 보였다.

“설마 무서운 거예요?”

“전혀 아니에요!”

대공의 재촉에 그네에 앉게 된 미오는 양손으로 끈을 단단히 잡았다.

사실 미오가 그네를 탔던 기억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항상 놀이터에서 가장 인기 있는 건 그네였다.

한껏 미소 짓는 아빠가 그네에 앉은 아이를 부드럽게 밀어 주었다. 명랑하게 웃는 아이의 웃음소리에 지켜보던 엄마의 미소가 더해졌다. 정말이지, 더없이 행복해 보이는 그림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 근처에 잘 가지 않았어.’

밀어 줄 아빠도, 함께 웃어 줄 엄마도 없었으니까.

그녀는 그곳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그네는 살면서 탈 기회가 거의 없었다.

“어때요, 미오?”

그네를 조심스럽게 밀어 준 대공의 물음에 미오는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호수 위를 미끄러지듯 나는 그네를 타는 일은 퍽 근사했다.

‘누군가 밀어 주는 그네는 이런 기분이구나.’

잠시지만 하늘을 자유로이 나는 새가 된 것 같았다.

“재미있어요.”

크림색 드레스에 달린 하얀 리본 장식이 그네를 따라서 가벼이 흔들렸다. 푸른 하늘을 비춘 호수 위를 나는 미오는 작은 구름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네를 타는 미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군요.”

“……그만 좀 해요. 대공 각하.”

처음 들었을 때는 볼이 화끈거렸는데 그의 칭찬이 어느새 익숙해졌다. 미오는 수줍어하는 대신 이제 잔뜩 화를 내고는 했다.

“정말이라니까요! 이 심장을 꺼내서 보여 줄 수도 없고! 하하하!”

그녀의 볼멘소리에 대공이 크게 웃자, 호수를 헤엄치던 백조가 푸드덕푸드덕 날갯짓했다.

‘이대로 정말 날아가 버리면 좋겠다.’

눈을 꼭 감은 미오는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차 사고가 나서 이곳에 왔던 것처럼 이대로 사라진다면 이 머리 아픈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지독한 짝사랑을 모두 지울 수 있을까.

‘비겁한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구나.’

버림받는 게 두려워서 사람과 거리를 뒀고, 지금도 그녀가 다칠까 봐 달아날 궁리나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실눈을 뜬 미오의 얼굴이 향한 곳은 대각선 너머였다.

‘어디 갔지? 벌써 돌아간 걸까.’

자리에 앉아 있을 줄 알았는데 지오프리가 보이지 않았다. 순간 실망한 그녀의 손에서 힘이 풀렸고, 순식간에 그네가 불안정하게 뒤틀렸다.

“……아.”

마침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올 때라서 몸을 제어하기가 힘들었다. 그대로 줄을 놓친 미오는 물에 첨벙 빠지고 말았다. 물에 빠지는 순간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이곳이 생각보다 깊다는 것을 깨닫자 두려움에 휩싸였다.

“살려 주세요!”

두 팔을 버둥대는데 이상하게 몸은 점점 더 아래를 향했다. 물 아래로 몸이 완전히 가라앉았고, 미오는 잠시 후회했다.

‘그런 말은 재수가 없으니까 하는 게 아니었는데…….’

사라지고 싶다고 말해서 이런 일을 당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럴 때는 하늘을 향해서 침을 세 번 뱉어야 하는 거야! 알았어? 멍청한 녀석.’

까마귀가 하던 잔소리가 문득 생각났다.

차라리 여우로 변하면 개헤엄이라도 쳐 볼 텐데, 지금 그녀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인간의 몸이었다.

‘원할 때 변할 수 있는 수인도 있다고 들었는데, 이런 몹쓸 몸으로 뭘 하겠다고.’

지오프리를 꼬셔서 차 주겠다고 다짐한 게 얼마 전 일 같은데, 이렇게 짝사랑만 실컷 하다가 죽게 되었다. 그때 주변에 자잘한 물방울이 일더니 누군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

‘……지오프리.’

소리를 내서 그를 불러 보고 싶었지만, 호흡이 모자라서 입을 떼기 어려웠다. 미오의 창백한 얼굴을 확인한 그는 손을 뻗어서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 물속에서도 또렷해 보이는 지오프리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뭐 하려는 거야.’

그때였다.

“……읍, 읍.”

그녀의 입술을 타고 신선한 공기가 흘러들어 왔다. 미오는 그의 목을 꽉 틀어잡고 정신없이 달고 맛있는 숨을 받아들였다. 가쁜 숨을 달래고 나자, 어느새 물 밖으로 나와 있었다. 지오프리의 품에 안긴 미오가 고개를 들었으나 뜨거운 햇살에 눈을 뜰 수 없었다.

“……후.”

그리고 지오프리와 눈이 마주치자 물밑에서 그녀가 무슨 짓을 했는지 떠올랐다. 어쩐지 지오프리의 붉은 입술이 조금 부은 것 같았다.

‘이럴 때는 모른 척하는 게 최고야.’

눈을 깜빡거리던 미오가 그대로 기절한 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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