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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81)화 (81/123)

81화 금이 가기 시작한 마음

“미오. 날씨가 좋아요. 함께 말을 타는 게 어때요?”

이제 막 깨서 기지개를 켜려는데, 그녀의 침실 앞에서 대공이 큰 소리로 물었다. 미오는 눈을 비빈 다음에 창밖을 내다봤다.

“날씨가 좋긴…….”

안개가 자욱해서 바로 앞도 구분하기 힘들어 보였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지려는지 사방이 습한 냄새로 가득했다. 한마디로 말을 타기는커녕 외출하기 최악이었다. 가운을 대강 걸친 미오가 침실 문을 빼꼼 열었다. 거절하려는데 알렉세이가 그녀의 얼굴에다 포장이 된 무엇을 들이밀었다.

“훈제 고기를 넣은 샌드위치를 준비했답니다. 그러니까 제발 내 청을 거절하지 말아요.”

“……하지만 대공님.”

어제 실컷 울다가 잠들어서인지 이상한 목소리가 나왔다.

“일단 제가 이제 막 일어난 데다, 바깥에 안개가 자욱해서 말이 무서워할 것 같아요.”

“아, 이렇게 다정할 데가……. 말이 겁먹을까 봐 걱정해 주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해석이 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꼭 공을 물어 온 대형견처럼 눈을 반짝이는 대공을 외면할 수 없었다. 오늘까지 그의 청을 거절한 것이 열 번이 넘었고, 샌드위치를 흔드는 표정이 애절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얼마든지요. 아래층 응접실에서 기다릴 테니 천천히 와요.”

문을 닫고 기대서는데 두통이 밀려드는 것 같았다. 미오는 간단하게 세수를 한 다음 옷을 두껍게 챙겨 입었다.

“내가 좋아하는 샌드위치를 준비했다니까 그것만 먹고 와야지.”

보닛의 끈을 단단히 묶은 미오가 아래층에 내려가자 큰 바구니를 든 대공이 벌떡 일어났다.

“저한테 주세요. 각하가 들고 다닐 것은 아니에요.”

미오가 팔을 내밀자 대공이 싱긋 웃으며 반대쪽 팔을 내밀었다. 재킷으로도 가릴 수 없는 우람한 근육이 순식간에 요동쳤다.

“저는 가진 게 힘밖에 없는 남자랍니다.”

“…….”

한쪽 눈을 심하게 깜빡대는 대공을 지나친 미오가 그대로 밖으로 향했다. 창 너머로 보던 것처럼 바깥은 온통 뿌옜다.

“대공 각하, 멀리는 못 갈 것 같아요.”

“어디든 좋습니다. 함께 있는 게 중요하니까요.”

꽤 무거워 보이는 바구니를 달랑달랑 흔들어 대는 대공은 퍽 즐거워 보였다. 미오는 잠시 고민하다 호수가 근처로 목적지를 정했다. 커다란 바구니에서는 별별 것이 다 나왔다. 펼쳐서 앉을 수 있는 두꺼운 천에 샌드위치, 과일, 치즈, 마실 것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것.”

“……와.”

숲에서 지낼 때 미오가 특별히 좋아하던 꽃이었다. 온통 하얀 눈이 내린 겨울 숲에 초록빛을 간직했던 나무는 작고 동그란 붉은 꽃을 피웠다. 그게 꼭 크리스마스 장식 같아서 볼 때마다 괜히 마음이 설레고는 했었다.

“마음에 드나요?”

“네, 고마워요.”

카스피언 제국에는 크리스마스 대신 디아나 탄생일을 기념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트리나 캐럴이 없는 까닭에, 미오는 가끔 과거를 그리워했다. 꽃을 받아 든 그녀의 표정을 살핀 알렉세이는 얼른 커다란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서 안개 자욱한 호수를 바라보면서 샌드위치를 베어 물기 시작했다. 의외로 대공은 함께 있으면 편안한 상대였다. 예법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의 실수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내내 배려해 주었다.

“그런데 대공 각하, 왜 만날 때마다 자꾸 먹을 것을 주세요?”

“그게 습관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요.”

“……?”

뭔가 묘한 말이었다. 습관이 될 정도면 한두 번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닌데…….

양상추와 토마토와 고기가 한데로 어우러져서 고소한 풍미가 입 안 가득 번져 가는 동안, 미오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우르체카 대공을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야.’

이전에 만났다면 그녀가 기억을 못 할 리가 없었다. 이렇게 크고 붉은색의 머리를 한 남자를 잊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러 번의 죽음 끝에 기억하는 것은 친절한 곰, 사슴, 숲속 친구들과 지오프리가 전부였다.

‘……에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기는 했어도 방금 했던 생각은 상상이 지나쳤다. 대공이랑 비슷한 느낌을 주는 짐승이 떠올랐던 까닭이다.

‘아니야. 전혀 다르게 생겼잖아.’

혼자 고개를 젓는데, 대공이 집요하게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미오. 언젠가 당신을 우르체카 공국에 데려가고 싶어요. 그곳은 춥고 서늘하지만 퍽 살기 좋답니다.”

“기회가 되면 여행하도록 할게요.”

“단번에 거절하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좋은 징조겠죠?”

커다란 샌드위치를 단숨에 먹어 치운 대공이 사과를 아작 씹었다.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 샌드위치를 먹던 미오는 저번부터 궁금하던 것을 묻기로 했다.

“각하는 공작님과 친구인가요?”

“……하하하!”

그는 먹던 사과를 내려 두더니 한참을 시원하게 웃어 댔다. 얼마나 웃었는지 눈가에 눈물까지 맺혔다.

“친구처럼 보이던가요?”

“조금은요.”

“우리는 친구가 될 수는 없는 관계랍니다. 다만 내가 예전에 그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고, 나도 공작을 도울 수 있는 관계랄까요.”

알렉세이의 기다란 속눈썹이 바람에 팔랑였고 그의 부드러운 시선이 미오의 볼록한 볼에 닿았다.

‘어쩜 이리도 귀여울까.’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모습에 그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미오는 대공이 건넨 건과일을 씹으면서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친구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대공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물론 나는 그를 제법 좋아한답니다.”

“그런데도 친구는 아닌가요?”

“아주 먼 친척이라고 하는 게 맞는 것 같군요.”

“……아.”

그런 거라면 대공의 반응을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듣자니 친척이란 가까우면서도 먼 듯한 관계라니까.

“이제 재미없는 이야기는 그만하죠.”

대공은 지오프리를 재미없는 이야기쯤으로 치부했다. 그의 노골적인 질투에 미오는 헛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녀가 아몬드를 오도독오도독 씹는데, 대공이 손을 길게 뻗었다.

“그나저나 너무 속상합니다. 모처럼 단둘이서 데이트하는데 웬 안개일까요.”

“……데이트요?”

“그럼 다 큰 남자랑 여자가 앉아서 밥 먹고 이야기하는 게 데이트가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우르체카 대공은 아주 능글맞기 그지없었다. 짧게 혀를 찬 미오가 물을 마시는데, 대공이 작은 사탕을 내밀었다.

“이건 키에트 공국의 소금 호수 물로 만든 거라고 하더군요.”

“소금 호수라니, 신기하네요.”

반짝거리는 투명한 사탕을 받아 든 미오가 살짝 웃었다.

‘차라리 이 사람을 좋아할 수 있으면…….’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 앉아 있어도 두근거림보다는 편안한 감정이 앞섰다.

‘편안함을 느낀다고?’

대공이 카스피언 공작 성에 머무른 지 제법 시간이 흐르기는 했지만, 이만큼의 친밀감을 느끼는 게 이상했다.

‘내가 정에 좀 굶주려서 그런가.’

아무도 찾지 않는 겨울 숲에서 쫄쫄 굶으며 홀로 지낸 시간이 제법 길었다. 아니, 이곳에 오기 전부터 미오는 평생 혼자였으니까.

‘그래서 로렌의 다정한 잔소리에도, 대공의 음식 선물에도 이렇게 마음이 쉽게 흔들리는 거겠지.’

“그래도 안개가 깔려서 운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식사를 마친 대공은 손수건에 손을 닦더니 벌떡 일어나서 호수를 향해 걸어갔다.

“내가 물수제비를 잘 뜬다고 말했던가요?”

얇고 평평한 돌을 쥔 대공이 호수의 표면을 향해서 그것을 던졌다. 돌은 한 번, 두 번, 세 번 수면을 튕기더니 안개 너머로 사라졌다. 미오는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엄청나게 으스대는 대공 때문에 웃음이 터졌다.

“그건 저도 좀 할 줄 아는데요.”

언제 배웠는지 모르지만 하는 방법이나 감각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미오는 좋은 돌을 골라서 호수를 향해서 팔을 휘둘렀다. 그녀가 던진 돌은 여러 번 수면 위를 구르더니 퐁당 물속에 빠졌다.

“분명 솜씨 좋은 사람한테 배운 것 같군요.”

“그런가요?”

두 사람은 이후에 말없이 물수제비 뜨는 데 한참 열중했다. 등에 땀이 나려고 하는데, 하늘에서 심상찮은 빛이 번쩍댔다.

“이런, 비가 올 모양인데요.”

대공은 서둘러 그녀의 손을 이끌어서 큰 나무 아래로 달려갔다. 그의 예상대로 곧 굵은 비가 쏟아졌고, 그들이 앉았던 자리 위로 작은 웅덩이가 생겼다.

“카스피언 제국은 날씨가 우울해요. 화창한 날이 별로 없는 게, 이게 다 제국을 세운 게 음흉한 늑대라서 그런가 봅니다.”

“……네?”

“우리 우르체카는 잘생기고 능력 있고, 믿음직한 곰 수인이 세운 곳이라서 날씨 변화도 별로 없거든요.”

“설마요.”

“하여튼 늑대는 별로예요. 교활하고 이기적이라니까.”

나무에 등을 기댄 대공이 투덜대는데, 미오는 묘하게 고개를 끄덕대고 있었다. 늑대에 대한 좋은 기억이 별로 없었다. 몇 번 마주치지도 못했지만, 항상 죽일 듯이 노려봤던 것 같다.

“나중에 말이에요. 이곳이 너무 싫어지는 순간이 오면 그때는 꼭 우르체카에 함께 갈래요?”

늘 장난기 가득한 대공이지만, 우르체카에 가자는 말은 진심인 것 같았다.

“초대는 감사하지만, 대공 각하는 저를 잘 모르시잖아요.”

그녀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처지인지 전혀 모를 것이다. 언제 여우의 몸으로 변할지 모르는 데다 지오프리에게 각인한 상태였다. 이대로는 어디도 가기 힘들었다. 떠난다고 마음먹는다면 그건 인간이 되는 것을 포기한다고 결심하는 것과 같았다.

“저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사람이 좋은 데는 이유가 없답니다.”

대공은 걸치고 있던 짧은 망토를 벗어서 미오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부담을 주려는 건 아니에요. 그냥 우르체카 공국의 손님으로 대접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그제야 지오프리가 몹시 화를 내던 것을 기억해 냈다.

‘뭐라고 했더라. 우르체카 대공을 가까이하지 말라고 했었지.’

약혼자도 있고, 또 속을 알 수 없다고도 했었다.

“말씀, 감사해요.”

인사는 진심이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호감을 품고 이렇게 대하는 것은 근사한 기분이었다.

“그냥 내가 해 주고 싶은 이야기는 그것뿐이에요.”

그의 비취색 눈이 활짝 휘었고, 미오도 희미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나저나 비가 그치지 않을 모양인가.”

손을 밖으로 쭉 뺀 대공이 빗방울을 모아서 입으로 가져갔다.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몸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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