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짝사랑은 아프다
“이제 완전히 미친 건가?”
창밖에서 우렁차게 울리는 알렉세이의 음성에 지오프리가 잔뜩 인상을 썼다. 돌아가라고 그만큼 이야기했는데도 상대는 전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밤낮으로 미오의 이름을 불러 대면서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왜 저러는 거지. 도무지 집중을 못 하겠군.”
책상에 앉은 반듯한 얼굴이 짜증으로 일그러졌다. 무도회에 다녀온 터라 봐야 할 서류가 산처럼 쌓였다. 사무엘에게 넘겨도 되었지만, 지금은 몰두할 무언가가 간절했다.
“가만있으면 머리가 복잡해지니까 말이야.”
한숨을 쉬는데 팔에서 꿈틀대는 기운이 느껴져서 얼른 약을 꺼냈다.
“……휴.”
요즘은 발작 주기가 더 짧아진 것 같았다.
“이게 전부 알렉세이 때문일 거야.”
그와 이렇게 다정하게 마주 앉아서 차를 마실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저 오래 알고 지냈기에 무시할 수 없는 관계 정도였다.
“내 신경을 긁으려고 작정이라도 한 건가?”
미오의 일을 부탁하려고 만난 직후부터 그의 태도가 눈에 띄게 변했고, 그것은 지오프리를 무척이나 자극했다.
‘갚아야 할 빚도 있으니 기꺼이 청을 들어주도록 하지. 그 아가씨가 무척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야.’
은근슬쩍 미오를 향한 관심을 드러내더니 무도회가 있기 전에는 아주 노골적이었다.
무도회 전날, 기척도 없이 알렉세이가 공작의 집무실을 찾았다.
‘자네는 기본예절을 모르는 건가.’
‘이미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던 거 아닌가.’
복도를 쿵쿵 울려 대는 발걸음 소리에 그가 접근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나저나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단장을 하는 거지? 나야 눈 호강을 할 수 있어서 나쁠 건 없지만 말이야.’
내일 입을 연미복을 미처 갈아입지 못한 지오프리를 살피던 알렉세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책장에 기댄 그는 여인에게나 보일 법한 끈적한 눈빛을 보냈다. 갑작스레 불쾌해진 지오프리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눈빛이 주먹을 부른다고 말했었나?’
‘그대의 주먹이라면 내, 기꺼이 청하고 싶군.’
보던 서류를 내던진 지오프리가 크라바트를 거칠게 풀어 헤쳤다. 그가 잔뜩 성질을 내자 알렉세이가 두 손을 들더니 본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그나저나 미오는 어떤 드레스를 입을지 궁금하군.’
‘관심 꺼.’
‘에이, 그럴 수야 없지. 천하의 목석같은 지오프리 카스피언의 가슴을 움직인 여인인데 관심을 가지지 말라니.’
‘용건이 없다면 이만 가는 게 좋을 것 같군. 피차 할 말도 그다지 없는데…….’
지오프리가 축객령을 내리는데, 난로 앞에 멈춰 선 알렉세이가 진지하게 물었다.
‘카스피언 공작. 도대체 그녀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 거지?’
그의 말에 지오프리는 크라바트에서 손을 뗀 채 일어나서 창가에 다가섰다. 그녀에 대한 감정은 뭐라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그런 걸 왜 묻는 거지…….’
알렉세이 우르체카가 무슨 자격으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가 미오에게 가지는 관심에 알 수 없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손님이니 그런 핑계 댈 생각 하지 말게. 지난번에 내게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이쯤 되면 그녀가 황후가 보낸 첩자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 것 아닌가.’
분명 그때는 미오가 첩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 못했었다.
‘알렉세이. 그나저나 그게 왜 궁금한 거지?’
그는 알렉세이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녀에게 관심이 생겨서 말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는 알렉세이의 표정은 무척이나 여유로웠다. 지오프리는 제국 모든 여인에게 추파를 던지는 알렉세이를 떠올렸다. 그의 반듯한 이마가 대번에 구겨졌다.
미오는 분명 그의 유혹을 이겨 내지 못할 것이다. 알렉세이의 달콤한 고백과 선물 공세에 넘어가서 그를 따라나설 것이다.
‘그리고 곧 눈물로 밤을 지새우게 될 테지.’
사랑이란 것은 그런 것이었다.
아버지를 사랑했던 어머니는 배신당했고,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 지오프리는 사랑이란 것은 허상이라고 생각했다. 완벽하고 아름다운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어쨌거나 미오가 알렉세이에게 버림받은 숱한 여인 중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창에서 몸을 돌린 지오프리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관심 거두게.’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이쯤 되면 물러설 법도 한데 그 밤 알렉세이는 내내 완강했다.
잠시 생각을 더듬던 지오프리가 천천히 창틀을 두드렸다.
“미오는 내 사람이다.”
그때 알렉세이에게 해 주었던 말을 다시 읊조리는 그의 얼굴이 묘하게 밝았다.
열에 시달리는 그의 얼굴을 쓸어 주던 작은 손을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를 지켜 주겠다고 샴페인 분수대에 뛰어든 작은 어깨가 바들바들 떨리던 것이 눈앞에 생생했다. 목을 조이던 셔츠의 단추를 완전히 풀어낸 지오프리의 검은 눈 안에 소유욕이 어른댔다.
“그래. 내 것이야.”
안개 낀 정원에서 내내 미오의 이름을 불러 대는 붉은 머리 사내를 향한 그의 눈빛이 매서웠다.
* * *
따뜻한 난롯불이 타들어 가는 주방, 기다란 탁자에는 말린 꽃잎과 이파리가 가득했다. 로렌과 마주 앉은 미오가 집게로 꽃잎을 유리병에 조심스레 넣고 있었다.
“직접 딴 꽃잎을 말려서 이렇게 유리병에 넣어 두면 일 년 내내 향긋한 차를 마실 수 있답니다.”
“……네.”
말린 꽃은 향기가 근사했지만, 미오는 다른 생각에 푹 빠져 있었다. 한 병 가득 꽃을 채운 그녀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미오. 그러다 땅 꺼지겠어요.”
로렌이 한숨을 내쉬는 그녀를 걱정스레 바라봤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건가요?”
“……그게.”
입술을 달싹대던 미오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고민은 누구에게 털어놓을 만한 것이 못 되었다.
‘사실 내가 여우 수인이라고 말하면 로렌은 기절할지도 몰라.’
지오프리가 숲에서 돌아오지 못했을 때도 로렌이 잠시 기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크림을 듬뿍 곁들인 핫초코를 만들어 줄게요. 우울할 때는 달콤한 것을 먹어야 기운이 나는 법이랍니다.”
벌떡 일어난 로렌이 작은 밀크 팬에 우유를 데우기 시작했다. 콧노래를 부르는 로렌의 등을 바라보던 미오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로렌.’
이렇게 잘해 주는데 상대를 속인다는 기분에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이 편안한 분위기를 온전히 즐길 수 없었다.
“그나저나 참 이상한 일이죠? 영지를 샅샅이 뒤졌는데도 강아지를 찾을 수가 없으니까요.”
“……네?”
로렌의 말에 놀란 그녀가 집게를 탁자에 떨어뜨렸다. 누군가 아직 작은 여우를 찾고 있을 줄은 몰랐다.
“공작님이 데려온 하얀 강아지 말이에요. 미오는 우르체카 공국에 있어서 못 봤을 거예요. 엄청나게 작고 귀여운 녀석인데,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요. 공작님이 애타게 기다리고 계신데…….”
이제 로렌은 적당히 데운 우유에 초콜릿을 넣고 휘젓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오프리의 침실에 있는 강아지 쿠션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그걸 치우지 말라고 하시더라니까요. 꽤 마음에 드셨나 봐요.”
어릴 때야 강아지나 고양이를 예뻐했지만, 커서는 짐승 자체를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했다.
“근래에는 후원에 있는 그 무서운 녀석이랑 강아지가 전부였어요. 그런데 찾을 수가 없으니 내가 다 속이 타네요.”
‘로렌, 공작이 찾는다는 그 강아지는 바로 저예요.’
“……하.”
여우로 변했을 때 그가 유독 다정하게 굴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다.
‘지오프리가 내게 왜 이러는 거지?’
혼란스러운 표정의 미오 앞에 로렌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핫초코를 가져다주었다. 하얀 머그잔 바깥으로 흘러내리는 크림과 초콜릿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진짜 기가 막히게 만듭니다. 어릴 때 주인님도 퍽 좋아하셨답니다.”
“정말요?”
핫초코를 마시는 지오프리의 모습이 어쩐지 상상되지 않았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후후 불어서 식힌 핫초코를 반쯤 먹었을까.
눈치를 살피던 로렌이 슬쩍 입을 뗐다.
“아니겠지만 말이에요. 설마 대공님도 좋아져서 고민하는 건 아니죠?”
아까 오전에도 미오를 찾는 그의 음성이 카스피언 공작 성에 가득 울렸었다. 친척을 챙기는 것치고는 과한 그의 관심에 모두가 관심을 기울였다.
‘미오 님이 과연 누구를 선택할까.’
카스피언 공작과 우르체카 대공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미오의 이야기로 성은 연일 시끌벅적했다. 돈을 걸고 내기도 한다고 했다. 로렌은 그런 소문은 전혀 믿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우르체카 대공의 적극적인 애정 공세에 약간 불안한 나머지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
캑캑.
예상도 못 한 질문에 입에 머금고 있던 핫초코가 주르륵 흘렀다.
“에구머니나, 내가 놀라게 했네요.”
서둘러 흰 손수건을 꺼내 든 로렌이 그녀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자연스러운 로렌의 보살핌에 미오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정을 주지 말자 했는데, 카스피언 공작 성의 식솔에게 마음을 뺏겼다. 그뿐인가.
정말 미웠던 지오프리지만, 이제는 그가 좋아서 죽을 것 같았다.
“……흑.”
작은 흐느낌은 곧 큰 울음으로 번졌고, 어깨가 들썩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이렇게 그녀를 챙겨 주는 일은 너무 낯설고 이상했다.
‘이런 일 생각도 못 했는데…….’
따스한 시선과 그윽한 음성, 다정한 손길.
언젠가 모두 사라지면 더는 원래의 생활을 견딜 수 없을까 봐.
이 모든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 두려웠다.
‘모든 게 엉망이야. 엉망.’
이곳에 적응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데 자꾸만 미련이 생겼다. 지오프리를 향하는 이 마음이 깊어져만 갔다.
“괜찮아요. 괜찮아.”
펑펑 우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려 주는 로렌의 음성에 미오의 울음소리는 커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