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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79)화 (79/123)

79화 거슬리는 사람

승자의 미소를 장착한 알렉세이가 은근히 지오프리를 도발했다. 그러자 등을 바로 세운 지오프리가 찻잔의 손잡이를 매만지면서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질투 안 납니다.”

“설마! 공작은 다들 무서워만 하지, 팬은 없지 않나?”

“아! 팬 말입니까?”

“그래. 우르체카를 비롯한 네 개의 제국에는 나의 팬이 넘쳐나지. 자네는 아마 이런 경험이 없어서 생소할 테지만.”

거들먹대는 우르체카 대공의 말에 미오는 입술을 세차게 짓이겼다.

‘하필 대화가 그쪽으로 흘러갈 게 뭐람.’

팬이라는 단어에 온몸이 한기가 든 것처럼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맞은편에 앉은 지오프리를 향해서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미오와 그의 관계를 굳이 우르체카 대공에게 알릴 필요까지는 없었다. 팬이라고 고백했던 때만 생각하면 수치스러워서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그러니 제발 그냥 넘어가 줘. 지오프리.’

두 손을 모으지는 않았으나 속으로 열심히 기도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하늘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미오의 간절한 눈빛을 훑던 지오프리가 천천히 입을 뗐다.

“대공 각하, 저도 최근에 그런 팬이 생겼답니다.”

지오프리의 말에 대공은 곧장 관심을 가졌다.

비단 카스피언 제국이 아니라 어디에도 공식적으로 그를 추종한다고 말하는 여인은 없었다. 평판도 평판이거니와 그런 말을 했다가는 지오프리의 검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근래 라비니아나 돌로레스 같은 여인이 그의 곁을 맴돌기는 했으나, 지오프리는 그들을 인정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감히 아무나 나를 마음에 담게 둘 수야 없지.’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군. 그래서 그 귀한 팬은 어디에 있는 거지?”

대공의 질문에 미오는 두 손으로 드레스의 무릎 부분을 힘주어 구겼다.

“멀리 있지 않습니다.”

찻잔을 우아하게 쥔 지오프리가 미오를 향해서 턱짓하자, 대공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큰 소리를 냈다.

“미오? 미오! 정말입니까? 당신이 이렇게 재미없는 냉혈한의 팬이라는 건가요? 어째서죠?”

“……하.”

우습게도 대공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오히려 우르체카 대공을 좋아했으면 어땠을까. 상냥한 미소와 다정한 말은 기본이요, 한 아름 안겨 주는 선물은 덤이었다. 그는 애정을 표현하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 지오프리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야.’

지오프리는 그녀에게 호감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처음에 경멸하는 시선을 보내던 것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어쨌거나 대공처럼 다정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어리석은 가슴이 대공이 아니라 지오프리를 향해서만 뛴다는 것이다.

그녀의 침묵에 대공이 미오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미오?”

분명 얼마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말인데, 입을 떼기 힘들었다. 잠시 머뭇대다 그녀가 대공을 향해서 입을 열었다.

“네. 저는 공작님을 좋아해요.”

그녀의 말에 대공이 꽤나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설마 나를 바로 차 버리는 건가요? 우리는 아직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잖아요?”

“……?”

대번에 울상을 짓는 대공 때문에 그녀는 당황했다.

‘우리가 언제 뭘 했다고, 이러는 건지.’

“하지만 이건 불공평합니다. 분명 내가 먼저였는데…….”

울먹거리는 대공에게서 고개를 돌린 미오는 이번에는 지오프리와 눈이 마주쳤다. 분명 오만한 표정이라도 짓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는 무척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만족스러운 듯 느릿하게 찻잔을 매만졌다.

‘저 반응은 뭐, 뭐야?’

그때 대공이 벌떡 일어나더니 그녀의 곁에 와서 바짝 다가앉았다.

“……대공 각하.”

“그런다고 내가 포기할 줄 알았나요? 나는 포기를 모르는 남자랍니다.”

대공이 느긋하게 미소 지으면서 그녀를 향해서 한쪽 눈을 깜빡댔다. 방금까지 울던 사람이 이러니까 조금 두렵기까지 했다.

‘아니, 그러니까 왜 이렇게까지 내게 매달리는 거지?’

미오는 이 붉은 털의 레트리버 같은 남자의 속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그녀에게 반한 걸까.

미모라면 무도회에서 만났던 아름다운 여인 쪽이 더 빼어났다. 그건 비교해 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럴 만한 여지를 그녀가 준 기억도 전혀 없었다.

“……하.”

미오가 긴 한숨을 내쉬는데, 지오프리와 알렉세이의 시선이 날카롭게 엇갈렸다.

* * *

홀로 숲을 거닐던 남자의 입에서 한숨이 연신 터져 나왔다.

“……하.”

알렉세이 우르체카는 인기가 차고 넘쳤다. 권력과 재력을 겸비한 잘생긴 그를 거부할 사람은 네 개의 제국 어디에도 없었다.

‘타고난 기품이 느껴져.’

‘우르체카 대공님은 남들과 다른 기운이 느껴진다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네 개의 제국(키에트, 도르프, 카스피언, 에카라오)이 세워지기도 전부터 이 땅에 존재했으니까.

“얼마나 살았는지를 헤아리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야.”

처음에는 수인이 인간보다 훨씬 많았다. 하지만 대다수 수인은 생을 달리하거나, 능력을 거의 잃었다. 다시는 인간이 되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주 오랜 세월 알렉세이는 그 모든 것을 지켜봐 왔다.

“삶이란 것은 아주 덧없는 거야.”

우르체카와 카스피언 경계에 있는 숲에 선 그가 중얼댔다. 그는 이렇게 아무도 없는 숲을 서성이는 것을 좋아했다. 대외적으로 여흥을 즐긴다는 것과는 상반되는 일이었다.

“우르체카 대공이라…….”

사실 공국의 대공 자리에도 별로 미련이 없었다. 그를 부르는 이름은 황제가 될 수도 있었고,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었다.

“이렇게 걷다 보면 저 흩날리는 민들레 홀씨처럼 내 몸도 소멸할까.”

제국을 건설한 수인인지라 그에게는 엄청난 영력이 있었다. 어떤 조건 없이 인간이 될 수도 있었고, 본체로도 변할 수 있었다.

이런 무한한 능력은 가끔 독처럼 느껴져서 그는 심한 권태를 느꼈다. 그런 날이면 아무도 찾지 않는 숲을 찾아서 미친 듯이 달렸다. 심장이 터질 만큼 달리고 나면 살아 있다는 게 실감 났다.

턱을 매만지던 그가 과거의 어떤 날을 떠올렸다.

겨울 하늘이 시리도록 푸른 날이었다.

크하아앙!

숲을 달리던 잘생기고 체격 좋은 남자는 온데간데없고 새하얀 몸을 한 거구의 곰이 괴성을 질렀다. 모처럼 본체로 돌아온 알렉세이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몸을 문질러 댔다. 인간일 때는 절대 느끼지 못하는 시원한 감각에 동그란 귀가 팔랑댔다.

크헝?

그때 멀리 덤불 속에서 작은 생명체가 포착되었다. 알렉세이는 쿵쿵대면서 몸을 움직여 눈 쌓인 덤불을 걷어 냈다. 거기에는 죽어 가는 작은 여우가 한 마리 있었다.

‘이 숲에 내가 모르는 짐승이 있었나.’

이곳은 황량해 보여도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짐승과 수인, 허락된 소수의 인간만이 발을 들일 수 있었다.

‘그럼 둘 중 하나라는 말인데…….’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그의 눈이 여우를 훑었다. 그리고 이내 여우의 정체를 파악했다.

‘너도 우리와 같구나.’

새로이 태어나는 수인은 이제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내 사람으로 변한 그가 여우를 품에 안았다. 모처럼 그의 흥미를 끄는 짐승이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너는 운이 좋구나.’

마침 여우를 돌봐 주는 데 적합한 이가 이 숲에 있었다. 그리고 사슴의 간호로 여우는 간신히 기운을 차렸다. 여우의 호박색 눈에 깃든 두려움이 퍽 귀엽다고 생각했다. 알렉세이는 사슴에게 이 여우가 숲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도와줄 것을 청했다.

“……그랬는데.”

다친 미오를 제일 처음 발견해서 도움을 준 것은 그였는데.

상념에서 벗어난 알렉세이가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왜 그녀는 지오프리에게 각인한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몇 번이고 말이야.”

이제까지는 욕심을 부려 본 적이 없었다. 미오의 선택과 감정을 존중해 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손을 놓고 있을 수가 없군.”

왜냐면 이야기의 끝은 늘 불행했으니까.

슬픈 사랑 때문에 망가지는 두 사람을, 아니 미오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기억 못 하는 일을 나만 기억하는 것도 그만두고 싶다.’

태초에 이 땅에 발을 딛고 섰을 때부터 많은 것을 책임져 온 그였지만, 처음으로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느꼈다.

‘옆에 있어도 얼마나 소중한지도 모르는 저 등신한테 우리 미오를 넘겨주고 싶지 않다.’

지오프리가 손수 우르체카 공국에 와서 그녀의 신분 증명서를 부탁했을 때 이미 결심했던 일이다. 지오프리는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미오를 곁에 두고,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을 사로잡힌 어리석은 지오프리에게 그녀를 맡길 수 없었다.

“내가 더 미오를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있어.”

아직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은 없지만, 그는 하는 데까지 해 볼 작정이었다.

‘물러나지 않을 거야.’

그래서 무언의 압박에도 우르체카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오래 머물고 있었다. 어차피 그가 없어도 공국은 잘 돌아갔다. 그리고 그깟 공국 하나 망한들 무슨 상관이 있을까. 계절은 변할 테고, 새로운 공국이나 제국이 만들어질 테니까.

‘끝까지 버티면 결국, 내 진심을 그녀도 알게 될 테지.’

매번 그는 미오와 엇갈려서 해 주지 못한 게 많았다. 그래서 미오에게 해 주고 싶은 것이 한가득하였다.

우르체카로 데려가서 매일 공연을 함께 보고 싶었고, 옷장이 터질 정도로 드레스를 맞춰 주고 싶었다. 몇 단의 보석함에 눈부신 보석을 채워 주고 싶었다.

“그래. 전부 해 주면 되는 거지.”

카스피언 공작 성의 후원에서 한참 홀로 거닐던 그는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장 달려서 누군가의 창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아 입에 가져갔다.

“……미오! 미오! 날씨가 좋습니다!”

하늘은 몹시 흐렸지만, 그의 마음만큼은 더없이 맑고 푸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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