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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78)화 (78/123)

78화 단 하나의 팬은 너야

―끼잉.(이게 또 무슨 헛소리야?)

마치 물에 빠진 사람 도와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내가 그 위험을 무릅쓰고 약초를 구해서 돌봐 줬지. 밤새 경비 서서 저를 지켜 줬는데!’

그때 얼마나 피곤했는지 털이 뭉텅뭉텅 빠졌고, 발톱도 죄다 상했었다.

‘오늘도 그 미친놈한테서 구해 주려고 술을 뒤집어썼는데, 무슨 책임을 지라는 거야!’

지금 그는 그녀를 한입에 삼키려는 구렁이처럼 굴었다. 날카롭게 빛나는 지오프리의 눈을 보면서 미오가 외쳤다.

‘나 맛없어!’

정말이었다. 여우 고기는 맛도 없고, 양도 적어서 인기가 없었다.

“겁을 먹은 건가.”

미오의 호박색 눈에 두려운 기운이 어른대자 지오프리의 손길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는 짧은 숨을 내뱉은 후 비밀 이야기를 하듯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짐승을 좋아하지 않는데, 너는 썩 마음에 들어.”

지오프리의 기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촉촉한 코를 살짝 건드렸다. 갑작스러운 친밀한 손짓에 놀란 미오가 고개를 뒤로 뺐다.

‘아무래도 술을 너무 마신 게 분명해.’

평소보다 배는 다정한 데다, 짐승인 그녀를 마치 사람 대하듯 하고 있으니까.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으니 그 책임을 지라는 거다.”

―낑.(들을수록 더 모르겠거든?)

그녀가 그를 대체 어떻게 만들었고, 또 무슨 수로 책임을 질 수 있다는 걸까.

미오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그대로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피곤할 테니 한숨 푹 자도록 해. 자고 일어나면 집에 도착해 있을 테니까…….”

―끼이잉.(그런 말 하면 바로 잠이라도 잘 것 같아?)

하지만 등을 토닥이는 그의 손길과 귓가에 울리는 지오프리의 심장 소리에 미오의 몸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그렇게 물먹은 솜처럼 여우가 축 늘어지자 지오프리는 의자에 놓인 망토 위에 조심스레 내려 뒀다.

“진짜 귀엽군.”

도무지 지오프리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저 작은 몸으로 나를 살려 보겠다고…….’

약초를 가져와서 먹여 준다고 털이 제법 상했었다. 그런데도 쉬지 않고 계속 동굴 밖을 경계하고, 그를 보살펴 주었다. 그런데도 지오프리는 끝까지 경계를 풀지 않았었다.

‘나를 자꾸 이상하게 만드는 게 수상해.’

하지만 이제 버티는 데 한계가 왔다.

벤과 나란히 앉아서 그의 치졸한 수작을 받아 주면서도 지오프리는 미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자꾸 닿는 곳에서 벤이 숨겨 둔 궁수를 발견했다.

‘내가 화살에라도 맞을까 봐 걱정하는 건가?’

또 그녀는 그가 술을 들이켤 때마다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게 재미있어서 술을 더 마셨다.

‘또 무슨 말썽을 부리려는 거지.’

잠시 자리를 비운 미오를 찾는데, 연회장에 큰 소란이 일었다.

와장창.

수천 개의 샴페인 잔이 깨졌고, 술이 사방에 흘러넘쳤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고개를 푹 숙인 미오가 있었다.

“……아.”

그녀가 왜 그랬는지 이유를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걱정되어서.’

그동안 억누르고 있던 묘한 감정이 가슴속에서 들끓었다. 연회장을 가득 채운 미오를 비웃는 음성에 그는 잔 속 가득 찬 술을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지오프리는 곧장 미오를 향해서 걸어갔다.

어떤 소음도 시선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의 눈에는 오직 미오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녀를 안아 들었다. 모처럼 맞춘 옷이 샴페인으로 젖었지만, 상관없었다.

“정말이야.”

그의 품에서 곤히 잠든 은여우의 털을 가만 쓸어내리는 지오프리의 얼굴에 낯선 미소가 드리워졌다.

* * *

이튿날 오후 늦게 눈을 뜬 미오는 머리가 띵했다.

“아이고, 왜 이렇게 어지럽지?”

기지개를 켜는데 온몸이 고장 난 것처럼 삐걱댔다. 두 손이 침대 헤드에 닿자 화들짝 놀란 그녀는 용수철처럼 허리를 벌떡 세웠다.

“……뭐야. 내가 언제 변했지?”

피곤한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마차에서 여우가 되었던 장면이다. 그리고 술에 취한 지오프리가 잠에서 깨는 바람에 깜짝 놀랐었다. 하지만 그다음 기억이 묘연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지오프리의 목을 맹렬히 노려봤던 것도 같다.

“……제발 아니라고 해 줘.”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는데, 그녀의 입술에서 희미하게 참나무와 과일 향기가 느껴졌다.

“이걸 어디서 맡았더라?”

분명 익숙한 냄새였다.

갑자기 희미하게 웃던 지오프리의 검은 눈이 떠올랐다. 그녀를 쓰다듬던 부드러운 손길이 주던 감각이 생생했다.

“아니야. 지오프리가 나한테 웃어 줬을 리가 없잖아.”

그가 그녀에게 그렇게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면 분명히 기억했을 것이다. 끊겨 버린 기억 앞에서 미오는 애꿎은 손톱을 열심히 튕기었다.

‘쉬. 그냥 자.’

그런 낯 뜨거운 속삭임이 떠올라서 그녀는 흠칫 놀랐다.

“이게 진짜 있었던 일이야? 내 상상이야?”

연신 떠오르는 이상한 기억의 파편에 미오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나는 여우였는데 지금은 사람이잖아. 그러면 분명 뭔가 접촉이―.”

그녀가 완전히 술에 취한 지오프리의 입술을 훔치는 데 성공했던 걸까.

“어째서 이렇게 중요한 게 생각이 안 나지?”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 봐도 그녀가 입술을 내밀었던 기억은 없었다. 머리를 잔뜩 헝클어뜨려 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니면 뭐, 지오프리가 나한테 입을 맞췄다는 거야?”

무심결에 툭 꺼낸 말에 미오의 볼과 귀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니야.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잖아.”

하지만 어깨의 자잘한 떨림이 쉬이 멈추지 않았다.

* * *

떠오르지 않는 기억의 파편을 맞춰 보던 미오는 병을 핑계로 종일 방에서 버텼다. 하지만 우르체카 대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가 몇 번이고 고용인을 보내서 방문하겠다고 전갈을 보냈던 탓이다. 흔들리는 머리를 짚은 채 층계를 내려오는데, 우르체카 대공이 울먹이고 있었다.

“미오! 정말 어쩜 그럴 수가 있나요?”

“대공 각하를 뵙습니다.”

“입장할 때도 날 버리더니, 돌아갈 때도 날 까맣게 잊은 거예요? 어쩜 나를 버릴 수가 있죠?”

그의 넓은 어깨가 가늘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우르체카 대공에게 두 번째 춤을 약속했던 것이 뒤늦게 떠올랐다. 어쩌다 보니 눈앞의 이 남자를 바람맞힌 꼴이었다.

‘내가 어쩌다 대공 각하를 까맣게 잊어버렸지?’

물론 잊을 만큼 강력한 사건들이 연달아 있었지만, 그에게는 변명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죄, 죄송해요.”

그때 누군가 층계에서 내려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왜 아픈 사람을 괴롭히는 겁니까. 대공 각하.”

지오프리의 손길에 오후 내내 겨우 진정했던 그녀의 가슴이 다시 세차게 날뛰었다. 우르체카 대공은 미오가 아프다는 말에 울음을 그치고 큰 소리를 냈다.

“어디, 어디가 아픈 겁니까? 내가 우르체카에서 유명한 의원을 데리고 왔으니 어서 진료를 받읍시다! 가뜩이나 몸도 약한데…….”

“그게, 좀 쉬어서 이제 괜찮아요.”

지오프리에게 잡힌 어깨를 슬쩍 비틀면서 미오가 입을 뗐다. 그제야 대공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입니다. 그럼 다 같이 차나 한잔하면서 이야기 나눌까요? 급하게 왔더니 목이 타네요.”

응접실에 마주 보고 앉은 세 사람은 천천히 차를 음미했다. 따뜻한 차를 마시자 속은 좀 풀리는 것 같았지만, 미오는 이 자리가 불편해서 견딜 수 없었다. 찻잔 표면을 어루만지는데, 대공이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제 내가 달려가다가 누군가와 부딪치지만 않았으면, 당신을 구하는 건 나였을 겁니다.”

사실 이건 살짝 거짓말이 더해진 것이었다.

미오가 곤경에 처한 것을 가장 먼저 본 것은 알렉세이였지만, 그는 지오프리가 다가서는 것을 보고 한발 물러섰다.

‘이번 무도회에서 미오의 짝은 지오프리니까, 아무래도 그가 도와주는 게 더 보기가 좋지.’

모두 미오의 체면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렇게 두 사람이 무도회장에 그를 내팽개치고 가 버릴 줄은 몰랐다.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구두가 작아서 헛발을 디딘 것 같아요.”

어제 일을 떠올린 미오의 양쪽 볼이 시뻘게졌다.

샴페인 분수대에 풍덩 빠지던 순간이 너무나 생생해서, 아직도 술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애써 지우려고 했던, 마차에서의 지오프리 눈빛과 손길, 그윽한 음성이 되살아났다.

난감한 기색의 미오가 드레스 자락을 만지작대자, 지오프리가 알렉세이를 향해서 몸을 틀었다.

“대공 각하, 각하를 따르는 수많은 팬은 어쩌고 연회장을 떠나셨습니까.”

약간 비꼬는 말투였지만, 대공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하하.”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올린 알렉세이가 호탕하게 웃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쑥스럽지만 말이야.”

황실에서 주관하는 무도회는 어제부로 끝이 났지만, 크고 작은 사교계 모임은 몇 달 내내 이어질 예정이었다. 알렉세이는 그 모든 모임에 초대를 받았지만, 그것을 죄다 뿌리치고 카스피언 공작 성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지금 내 인기는 카스피언에서 최고일 거야. 아마 황태자를 능가하려나? 젊고 잘생긴 데다 부유한 미혼의 대공은 나 하나니까.”

각진 턱을 매만지던 그가 지오프리에게 가볍게 눈웃음을 쳤다.

‘……우와!’

미오는 방금까지 그녀 걱정에 물기 어린 눈을 했던 대공의 뻔뻔스러운 모습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하지만 신기하게 저렇게나 잘난 척을 하는데 그렇게 밉지 않았다.

“미오, 제가 가진 것을 이야기한 적이 있던가요?”

우르체카 대공은 마치 남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자랑스레 그의 잘난 점에 대해 늘어놓았다. 이미 여러 번 들었던 공국의 성과 온천, 광산, 드넓은 농장…….

“……음.”

지오프리는 아예 눈을 가린 채 소파에 등을 깊게 묻었다. 침을 튀겨 가면서 열정적으로 자랑하던 그가 물을 마신 후 마지막으로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나를 질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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