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여우, 그리고 미오
독한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신경 쓰였고, 혹시 황태자가 해코지는 하지 않았을까 걱정되었다.
흘러내린 술로 엉망이 된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본 지오프리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거지?”
“저, 저는 괜찮아요.”
사실 괜찮지 않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더 비참해질 것 같았다.
“술통에 빠진 쥐 꼴을 하고서?”
그녀의 몸을 감싼 천도 금방 술로 흠뻑 젖어 버렸고, 바닥에 굵은 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건가요?”
아직 무도회는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먼저 자리를 뜨는 것은 크나큰 실례라고 들었다. 미오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그가 살짝 이마를 찌푸렸다. 지오프리는 그녀를 꼭 안은 채 황태자 앞으로 다가섰다.
“제 파트너가 다쳐서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사실 미오는 딱히 아픈 곳은 없었다. 굳이 꼽으라면 창피해서 가슴이 따끔거리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귀와 코, 입으로 술이 들어가서 아까부터 몸이 달떴다.
“좋아. 허락해 주지.”
벤은 할 수 없이 허락해야만 했다.
‘……젠장.’
오늘 밤 두고두고 지오프리를 괴롭혀 줄 작정이었지만, 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지오프리는 천천히 몸을 돌렸고, 연회장을 가득 메운 인파는 한중간에 길을 내 주었다. 그가 연회장 입구를 벗어나자, 미오는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어디로 가나요?”
“카스피언 공작 성으로 간다.”
그녀의 발그스름한 볼을 확인한 지오프리가 작게 속삭였다.
“……아.”
미오는 카스피언 공작 성이라는 단어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종일 굶은 데다, 샴페인을 뒤집어써서 술기운이 오르기도 했다. 그래서 입이 제 맘대로 움직였다.
“로렌이 만들어 주는 고기파이를 먹고 싶어요.”
“훈제 고기로 말인가?”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지오프리의 한쪽 입술이 슬쩍 올라갔다. 그가 어쩐지 비웃고 있는 것 같아서 미오는 고개를 홱 돌렸다.
‘훈제 고기를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아는 거지.’
“그냥 못 들은 거로 해 주세요.”
수치심에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이자, 그가 작게 대꾸했다.
“도착하면 로렌에게 부탁해 보도록 하지.”
미오는 아까부터 가슴이 간질간질해서 견딜 수 없었다. 항상 그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지오프리가 나타났다. 일전에 라비니아 때문에 숲을 헤맸을 때도, 미로에서 황태자를 만났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이건 정말 이상해.’
지오프리가 그녀를 해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켜 주고 있으니까.
그의 단단한 팔이 걸쳐 준 재킷 아래 미오의 허리를 단단하게 감쌌다. 의식하지 않으려 애써도 뒷머리에 닿는 그의 어깨와 커다란 손의 감촉이 생생했다.
‘지오프리의 품이 싫지 않아.’
두 사람 사이에 풍기는 달콤한 샴페인 향기에 미오의 가슴이 울렁댔다.
“조금 기대.”
무뚝뚝한 어투였지만 그녀의 머리를 살짝 당기는 그의 손길은 퍽 부드러웠다. 레일란디 나무 사이로 낭만적인 밤이 저물고 있었다.
* * *
지오프리가 위기의 순간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것까지는 낭만적이었다. 하지만 잠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순간부터 고통의 연속이었다.
‘……하. 답답해 죽겠네.’
마차 안은 그녀가 뒤집어쓴 샴페인과 지오프리가 마신 술 냄새로 머리가 아찔할 정도였다. 정말이지, 술독에 빠졌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토할 것 같아.’
덜컹대는 마차에 앉아 있자니 속이 출렁거려서 미칠 것 같았다. 미오는 아직 걸치고 있던 그의 재킷으로 코를 막아 봤다. 하지만 여기에는 술 냄새보다 더 강력한 지오프리의 체향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하, 더 어지럽네.’
머릿속이 구름 속을 걷는 것처럼 몽롱했다. 눈을 끔뻑대자 그녀의 앞에 눈을 감은 지오프리가 잠을 청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술기운에 그의 체향까지 더해지자 미오는 심한 갈증을 느꼈다.
‘저기에서 더 달콤한 냄새가 나.’
지오프리의 품에 고개를 푹 박은 채, 그의 어깨를 잔뜩 깨물고 싶었다. 본능만 남은 사람처럼 미오의 호박색 눈이 묘한 빛을 발했다.
‘조금만 말이야. 정말 조금만.’
흐리멍덩한 시야 때문에 창밖의 달빛이 수천 갈래로 부서지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미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데 바닥으로 재킷이 툭 하고 떨어졌다.
‘……아.’
드레스가 헐렁하게 느껴지는가 싶은 순간 미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오프리와 단둘이 있는 마차에서 여우로 변한 것이다.
‘아까 변하라고 할 때는 꼼짝도 안 하더니…….’
허탈한 웃음 대신 기묘한 울음소리만 목구멍에서 번졌다.
‘빨리 그에게 입을 맞추어야 해.’
운 좋게도 그가 지금 눈을 감고 있으니, 서두르면 여우로 변한 것을 감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오는 서둘러 지오프리의 다리 근처로 다가갔다.
‘다리가 진짜 길어.’
작은 짐승의 눈에 그는 거인처럼 느껴졌다. 목을 쭉 빼자 그의 가지런한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그 아래로 날카롭게 뻗은 코, 선이 분명한 입술, 툭 불거진 목젖. 무엇하나 미오의 눈을 사로잡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냥 외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나를 구해 주었을까.’
그녀가 뛰어들었을 때는 무언가를 기대하고 한 일은 아니었다.
그냥 이상한 소유욕이 들끓었던 결과였다.
황태자가 지오프리를 못살게 구는 꼴을 가만 지켜볼 수가 없었다.
‘괴롭혀도 내가 괴롭히고! 복수해도 내 손으로 할 거야! 지오프리는 내가 침을 발라 뒀으니까 아무도 못 건드려!’
진지해진 눈으로 다리를 쭉 뻗었는데, 지오프리가 앉은 의자에 발이 닿지 않았다.
‘……젠장.’
낑낑대면서 용을 써 봤지만, 역시 올라갈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지오프리의 다리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한잠이 들었는지 그녀가 매달렸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끼이잉.(힘들어.)
간신히 그의 허벅지에 올라오는 데 성공한 미오가 그녀도 모르게 작은 소리를 냈다.
‘이제 조금만 더 힘내자.’
잠시 숨을 고른 후 그녀는 재킷을 걸치지 않은 그의 붉은 웨이스트코트 가슴 부분에 몸을 기댔다. 그의 어깨에 주둥이를 걸치자 한결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지오프리의 전신에서 꿀처럼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빌어먹을 각인 때문이야.’
욕을 하면서도 기분이 좋은 터라 눈이 잔뜩 휘었다. 얼른 입을 맞춘 후 달아나야 하는데,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
몸이 노곤해지는데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그의 목이었다. 어깨와 목이 연결되는 그곳을 지나는 혈관이 팔딱대는 것이 보였다. 입맛을 다시던 그녀가 자꾸만 삐져나오려는 송곳니를 간신히 밀어 넣었다.
‘이건 본능이라서 그래.’
한참 지오프리의 목덜미만 노려보고 있는데, 그녀가 밟고 있는 몸이 꿈틀거렸다.
“……으음.”
그에게 매달린 채 지오프리와 눈이 마주쳤다.
‘아, 망했다.’
본능에 눈이 멀어서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른 것이다. 하지만 이 좁은 마차에서 일어난 일은 수습할 수 없었다.
―끼이잉.(이게 말이야. 무슨 일이냐면…….)
말을 할 수 없는 그녀가 연신 뭔가를 설명하려고 애썼는데, 지오프리가 잔뜩 혀가 꼬인 발음을 했다.
“술을 많이 마셨더니 헛것이 보이는군. 뭉치가 마차에 있을 리가 없는데 말이야.”
그의 말에 미오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댔다.
‘그래! 이건 꿈이야! 네 눈에는 내가 안 보이는 거야!’
술을 많이 마셔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런 좋은 점도 있었다. 미오가 실실 웃으면서 그의 가슴에서 발을 떼려는데, 지오프리가 우악스레 그녀의 등을 움켜잡았다.
“……자꾸 어디로 달아나려고? 가능할 것 같아?”
그녀의 얼굴을 그의 입술 가까이 당긴 후 지오프리가 속삭였다.
‘이것부터 좀 놓고 이야기해.’
아까부터 진땀이 나서 눈이 따가웠다.
가뜩이나 마차 안의 공기가 탁한데, 지오프리가 눈을 뜨는 바람에 숨이 턱턱 막혔다. 그녀는 주둥이를 벌린 채 간절한 소원을 빌었다.
‘그냥 다시 잠들어.’
누군가 그녀의 기도를 들었는지, 그녀를 움켜잡은 손에서 힘이 조금 풀렸다.
‘휴. 다행이다. 하마터면 심장이 터질 뻔했어.’
이대로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지오프리가 그녀를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미오가 공중에서 강한 뒷발질을 하면서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지오프리가 그녀를 눈앞에 대더니 숨을 후 불었다.
―깽.(술 냄새!)
미오가 오만상을 찌푸리는데 그가 눈을 깜빡대면서 물었다.
“나를 구해 준 건가?”
미오는 순간 멍해졌다.
‘이게 지금 여우한테 하는 질문이 맞아?’
아까 위기에 처한 그를 구하려고 샴페인 분수에 빠진 건 지오프리는 모를 것이다. 게다가 그때의 그녀는 인간의 몸이었으니까.
‘설마 동굴에서 그를 구해 줬던 것을 기억하는 걸까.’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를 지켜 주려고 하는 사람은 말이다.”
한숨과 함께 지오프리의 커다란 손이 미오의 정수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리웠던 그의 손길에 눈을 지그시 감은 미오는 자장가 같은 지오프리의 음성에 젖어 들었다.
“이제 없을 줄 알았는데…….”
입을 열 때마다 단내가 풍겼다. 지오프리의 촉촉한 눈이 그녀의 호박색 눈을 그윽하게 응시했다. 마치 그 너머의 뭔가를 보는 사람처럼…….
‘뭐야. 내 몸을 보는 거야?’
여우는 원래 옷을 입지 않기는 해도 지오프리 앞에 맨몸으로 있는 게 갑자기 의식되었다. 버둥대던 미오가 앞발로 눈을 가리려고 들자 그가 피식 웃었다. 지오프리는 한 손으로 크라바트를 거칠게 풀어 헤쳤다.
“나를 구해 줬으니, 책임을 져야 할 거야.”
혀로 붉은 입술을 핥는 지오프리의 모습에 그녀가 경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