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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76)화 (76/123)

76화 당신에 취해 버린 밤

미오는 밤하늘 아래 펄럭이는 그의 코트 자락을 넋 놓고 바라봤다.

‘뒷모습도 아름답구나.’

어쩐지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까 눈가가 시큰댔다.

“왜 이러지?”

얼른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친 그녀는 아닌 척하면서 지오프리 쪽을 염탐했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대공 각하.”

“미오, 이제야 우리가 편하게 대화를 하는군요.”

지친 얼굴로 손을 뻗은 그가 잔을 들어서 물을 들이켰다.

“대공 각하, 그건 제 잔입니다.”

“그런가요?”

우르체카 대공은 미오의 말에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조리 마셨다.

“제가 목이 너무 말랐습니다.”

싱긋 웃는 우르체카 대공의 얼굴에 미오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피곤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알렉세이 우르체카는 이 무도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명사 중 하나였다. 다정하고 친절한 태도로 우르체카 대공은 어디를 가나 환영받았다.

‘지오프리와 정반대의 사람 같아.’

우르체카 대공이 환한 낮이라면, 지오프리는 어두운 밤 같았다.

“나를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십니까?”

우르체카 대공은 덩치는 컸지만, 눈치는 엄청 빨랐다.

“아니에요.”

남몰래 지오프리 생각을 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비밀이었다.

“참, 이거 먹어 봐요.”

대공은 품속에서 꾸러미를 꺼내 들더니 미오에게 건넸다. 손수건을 펼치자 그 안에는 앙증맞은 색색의 과자가 들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대공은 항상 그녀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다. 먹지 않고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자 그가 환하게 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미오는 너무 말랐으니까요.”

언제 봤다고 옛날까지 들먹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먹을 것을 챙겨 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과자를 하나 집어 들고 오물거리는데, 대공이 황태자 쪽을 흘끗 바라봤다.

“황태자 전하가 모쪼록 공작을 오래 붙들고 있으면 좋겠네요.”

“……네?”

대공도 분명 지오프리가 일전에 기습당했던 일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직접 병사를 이끌고 숲에 와서 그 밤에 황태자를 데리고 나갔으니까.

‘지금 지오프리는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이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미오가 과자를 만지작대자 그가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채 속삭였다.

“그래야 내가 미오랑 오붓하게 있을 수 있지 않겠어요?”

상냥하게 웃는 대공의 비취색 눈이 어쩐지 위험한 빛을 띠었다.

‘……뭐야.’

우르체카 대공의 의미심장한 말을 외면한 채 미오는 과자를 잔뜩 집어 먹었다. 곤란할 때는 모른 척하는 게 최고였다.

“먹는 것도 참 복스럽기도 하죠. 이래서 자꾸 챙겨 주고 싶다니까요.”

아예 꽃받침을 만든 대공이 그녀가 먹는 것을 빤히 지켜봤다.

“하지만 역시 드레스가 좀 아쉬워요.”

“아, 어울리지 않나요?”

이렇게 맞춤 드레스를 입은 것도, 무도회에 온 것도 처음이니까 아무래도 어색하기는 했다.

그녀의 말에 대공이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설마요. 당신은 내 눈에 이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인걸요. 다만 이 드레스가 카스피언 공작의 옷과 너무 비슷한 게 마음에 안 듭니다.”

대공은 질투를 감출 생각이 전혀 없는 듯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고스란히 내보였다.

“……아.”

그는 미오가 흘린 과자 부스러기를 손끝으로 훑으면서 투덜댔다.

“그렇게 입고 있으면 꼭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있는 것 같으니까……. 꼭 카스피언 공작가의 안주인 같기도 하고.”

“대공 각하, 그런 말씀 마세요. 옷은 그냥 우연히―.”

듣기만 해도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면서도 억지스러운 구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도회 첫날부터 그녀의 모든 드레스는 지오프리와 짝을 이루었다.

그것이 영 불만스러운지 대공은 짜증스레 입을 열었다.

“나도 미오와 커플 의상을 많이 지어 왔는데, 입어 보지도 못하고…….”

비가 내리던 날 돌아온 대공이 잔뜩 싣고 온 것 중에는 그녀의 드레스, 장신구, 구두가 한가득하였다. 미오는 괜히 미안한 마음에 과자를 더 열심히 먹었다. 양 볼이 불룩해진 그녀가 슬쩍 지오프리 쪽을 훔쳐보았다.

‘저런, 술을 계속 권하고 있잖아.’

몸이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독한 술을 마시는 것은 건강에 무리를 줄 것이다. 가뜩이나 얼굴이 창백했는데…….

그녀가 연신 황태자와 지오프리 쪽을 살피자, 대공이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미오. 지금은 내게 집중해 줄 수 없나요? 지오프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 큰 어른이 저 정도 일은 알아서 이겨 내야죠.”

대공의 말에 미오가 얼른 시선을 거두었다.

‘아무래도 대공은 지오프리의 친구가 아닌 것 같아.’

그때 멀리서 그가 콜록대는 소리가 들렸다. 지오프리는 피를 쏟기 전에 늘 저렇게 기침을 하고는 했다.

‘신경 쓰지 않아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어.’

어쨌거나 그는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존재니까…….

창백한 얼굴에 흐르던 피는 묘하게 아름다웠지만, 그러다 지오프리가 죽어 버리면 곤란했다. 그때 미오의 날카로운 시선에 이상한 것이 포착되었다. 정원수 위, 검은 무복을 입은 궁수가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황태자가 있는 쪽을 겨누고 있어.’

경호 목적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은밀해 보였다. 무도회장에는 누구도 무기를 지니고 들어올 수 없었다. 그리고 무도회에 참석한 귀족의 보호라는 이름 아래 무도회장 중간중간 병사가 무장하고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미오는 가장 끔찍한 상상을 해 봤다. 술을 많이 마신 지오프리가 그대로 탁자에 쓰러지면 그의 등에 화살을 쏠지도 모른다.

‘아마 누구도 지오프리가 죽었다는 것을 모를 거야.’

아직 지오프리가 죽는 것을 볼 때가 아니었다.

‘누구도 그에게 손을 댈 수 없어.’

나무 위 궁수와 황태자를 이글대는 눈으로 노려봤다. 대강의 계획을 세운 미오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대공 각하!”

“……미오. 표정이 왜 그렇죠?”

주먹을 꽉 쥔 미오의 얼굴을 살핀 대공이 걱정스러운 음성을 냈다.

“저기, 공작님을 좀 부탁할게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뭘 하려고 그래요. 앉아서 내게 말해 봐요.”

이 일은 누구의 힘을 빌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반드시 그녀의 손으로 해결해야 했다.

“부탁할게요.”

그리고 파우더 룸을 찾은 그녀가 두 손을 모아 쥐었다.

계획은 간단했지만,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일단 여우로 변해야 했다.

“변해라. 변해.”

미오는 간절하게 기도해 봤다.

여우 사냥을 즐기는 이들이니 그녀가 무도회장에 나타나면 분명 분위기가 어수선해질 것이다. 그러면 그 틈을 타서 대공이 지오프리를 구해서 공작 성으로 데려간다는 계획이었다.

“……얼른.”

두 손을 모아 기도하며 빙글빙글 방을 돌았지만, 등에 땀만 잔뜩 났다. 아까운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이건 포기해야겠어.”

여우로 변하지 못했을 때를 대비한 계획이 하나 있었다.

미오는 문을 벌컥 열고 나가서 그대로 작은 분수대로 돌진했다. 그 앞에 샴페인 잔이 탑처럼 쌓여 있었는데, 그것을 그대로 통과했다. 샴페인 잔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와장창.

곧 그녀의 몸이 분수대에 처박혔고 사방으로 샴페인이 비처럼 내렸다.

요란한 유리 깨지는 소리에 연회장을 메우던 부드러운 음악이 멈추었다. 많은 사람의 이목이 한순간에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머리부터 샴페인에 푹 젖어서 술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애써 입은 드레스와 머리는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유리 조각이 스쳤는지 볼도 따끔거렸다.

‘아무래도 성공한 것 같아.’

미오는 손을 들어서 상처를 쓸어내리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항상 일을 저지르고 나면 이렇게 후회라는 감정이 밀려들었다.

‘지오프리는 내가 이렇게 저를 위하는 것도 전혀 모르는데…….’

나만 이게 뭐람.

알아 달라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동굴에서 죽어 가는 그를 간호한 것은 라비니아가 아니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춥다고 울먹대는 너를 안아 준 것도 나야.’

먹기 싫다고 고개를 젓는 그의 입 안에 약을 넣어 준 것도 전부 그녀였다.

‘지금도 네가 죽을까 봐 이렇게 몸을 던졌어.’

그때 사방에서 수군덕대는 소리가 귀를 찔러 댔다.

뒤늦게 찾아온 수치심에 미오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우르체카에서는 저런 식으로 무도회를 즐기나 보죠?’

‘관심 끄는 방법이 참 독특하네요.’

‘하필 카스피언 공작은 왜 저런 파트너를 택했을까요? 아마도 대공의 부탁이었겠죠?’

‘술에 젖은 은발은 정말이지, 끔찍하네요.’

달빛 아래 거미줄처럼 반짝대는 미오의 은발을 두고 비난을 퍼부었다. 카스피언 제국에 존재하지 않는 머리카락 색이라는 이유로 그들은 그녀를 야만인 취급했다.

“다 들린다고…….”

어깨를 으쓱한 미오가 힘없이 중얼댔다. 저 사람들은 사람을 앞에 두고 저렇게 욕을 해 대는 것이 교양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이제 슬슬 퇴장한 차례인가.’

무거워진 치맛단을 쥐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다리가 풀렸는지 쉽지 않았다.

‘……절대 울지 않을 거야.’

미오가 손을 들어서 눈가를 훔치는데, 지오프리가 채워 줬던 팔찌가 잘그락거렸다. 다시 울컥 차오르는 감정에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때였다.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그녀의 머리 위로 뭔가 내려와서 미오의 몸을 감쌌다. 누군가의 옷이었고, 고개를 들지 않아도 그녀는 이 옷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익숙한 체향에 미오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확실히 구두가 작았나 보군.”

그대로 그녀의 몸을 번쩍 안아 든 지오프리가 속삭였다.

“……아.”

머리까지 덮어쓴 재킷 사이로 그의 얼굴이 얼핏 보였다. 지독하게 날카로운 지오프리의 눈매가 무도회장의 군중에게 향해 있었다. 미오는 아주 작은 소리로 물었다.

“공작님. 괜,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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