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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75)화 (75/123)

75화 짝사랑의 밤이 깊어 가고

‘……뭐야. 내가 언제 그런 약속을 했다고 그래!’

물론 지오프리가 저런 속물에게 이용당하는 모습을 두고 보지는 않을 작정이었지만.

‘이건 또 다른 문제잖아.’

갑자기 사냥 대회에서 두 사람을 묘하게 바라보던 황후의 미소가 어른거리더니, 사방에서 그녀를 보면서 수군덕대는 소리가 들렸다.

“우르체카 대공과의 친분 때문에 함께 온 게 아닌가 본데요.”

“카스피언 공작이 저렇게까지 나올 때는 뭔가 있는 거죠.”

“비밀리에 약혼이라도 한 걸까요?”

맙소사! 말은 점점 부풀려지더니 끝에는 지오프리와 그녀가 우르체카 공국에서 비밀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이것 봐요. 다 들리거든요?’

미오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았다. 점점 멀어지는 새로운 인연에 그녀는 다급해졌다.

“공작님. 뭐라고 정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러다가 무도회가 끝나고 돌아가면 제국에 카스피언 공작가에 공작 부인이 들어왔다는 소문이 날 것이다. 그녀는 어차피 목적을 달성하면 언제고 떠나야 하는 몸인데, 이런 헛소문은 사양이었다.

“……글쎄.”

그의 느긋한 답에 미오가 눈을 위로 치켜떴다.

‘저놈의 글쎄!’

듣기만 해도 속에서 열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지오프리는 정말 속에 능구렁이 열댓 마리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화가 잔뜩 난 미오는 그의 입가가 살짝 휘어졌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또 왜 저렇게 심통이 난 거지.’

옆에서 씩씩대는 미오를 바라보던 지오프리의 고개가 살짝 갸우뚱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누군가의 첩자 노릇을 제대로 할 자질이 별로 없는 게 확실했다.

‘저렇게 얼굴에 감정이 모조리 드러나니까.’

지오프리는 왜 미오를 보면서 이렇게 흐뭇한 기분이 드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씩씩거리는 모습도, 입을 삐죽 내민 얼굴도 나쁘지 않았다.

‘참 변화무쌍한 얼굴이라니까.’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이러면 카스피언 공작 부인을 찾을 수가 없잖아요.”

“……아?”

그제야 미오가 하는 말을 이해한 지오프리의 얄따란 입술이 못마땅한 듯 가늘게 떨렸다.

‘공작 부인이라…….’

지오프리는 무도회에 참석했던 또 하나의 이유를 떠올렸다. 이곳에 오기 전 우습지도 않은 카트리나 황후의 서신을 받았다.

「친애하는 지오프리.


형인 카스피언 공작부터 혼인하는 것이 순리겠죠. 이번 무도회에서 베일가의 라비니아와 약혼 발표라도 하는 게 어떨까 싶네요.


사랑을 담아서 카트리나.

그 서신은 읽자마자 찢어서 난로에 태웠다.

마음대로 변방에 보내더니 이제 결혼까지 정해 준 이와 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야 목줄을 쥐고 흔들기가 편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어차피 죽일 생각이면서 굳이 결혼을 강행시키려는 이유가 궁금하군.’

카트리나는 복수에 미친 그조차도 도무지 가늠하기 힘든 사악한 인간이었다.

‘뭐, 상관없나.’

그들이 저지른 죄나, 지금 그가 하려는 복수나 똑같이 더러우니까.

일단 이번 무도회는 조용히 넘기고 싶었다. 지오프리는 슬쩍 고개를 들어서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붉은 기운이 살며시 번져서 마치 피에 물든 것 같았다.

‘카스피언 제국이 끝나는 날 하늘도 이렇게 붉을까.’

때를 기다리고 있는 그의 수하들을 떠올리자 복수심에 울렁대던 속이 더 뒤집히는 것 같았다. 피가 거꾸로 솟고, 심장을 뜯긴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공작님. 괜찮아요? 쉬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가 짧은 한숨을 내쉬자 미오의 작은 손이 망설임 없이 지오프리의 이마를 향했다. 그가 살짝 허리를 숙여 주자 익숙한 손길이 피부에 닿았다. 서늘한 그의 이마에 미오의 따뜻한 손이 닿자 지오프리의 혈관 속 피가 자연스레 돌기 시작했다.

“아까 말이야. 질투했나?”

지나치게 얼굴을 가까이 맞댄 채 지오프리가 낮게 속삭였다. 그의 말에 화들짝 놀란 미오가 얼른 손을 떼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무슨 말씀인지.”

“아까 그 버드만 후작가의 영애가 오늘 밤에 만나자고 하더군. 나한테 꼭 할 말이 있다고 하던데.”

지오프리가 말끝을 흐렸고, 미오는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는 아직 돌로레스 버드만의 정체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지오프리는 원작에 나온 것처럼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녔다.

‘하지만 그는 온갖 여인을 유혹하고, 울려 대는 그런 남자가 아니야.’

그건 이제까지 그녀가 직접 지켜봤으니 확실했다. 오히려 여인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지오프리는 검과 서류 더미에만 흥미가 있었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지오프리를 그 여자에게 내줄 수야 없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오프리의 마음을 붙잡아야 했다. 수치심을 잠시 잊고 그녀가 입을 뗐다.

“솔직히 질투가 났어요.”

“그렇겠지. 나를 그토록 좋아하니까.”

“그래서 그분과 따로 만나실 건가요. 네?”

손가락만 튕기던 미오가 절박하게 외쳤다. 그녀의 다급한 눈빛을 확인한 지오프리가 허리를 곧추세우더니 가볍게 웃었다.

“……글쎄. 나의 팬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아프다고 해서 지오프리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사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가까운 사이처럼 보이라는 말이지.’

화끈대는 얼굴을 갈무리한 미오가 얼른 지오프리와 팔짱부터 꼈다. 이곳에 와서 미오가 먼저 그의 몸에 손을 댄 것은 처음이었다. 미오는 혹시 사람들이 지오프리와 그녀 관계를 오해라도 할까 봐 몸을 사려 왔으니까.

‘금발 미남은 아무래도 포기해야 하나.’

그녀의 입술로 짧은 한숨이 터졌다.

* * *

무도회의 밤이 깊었고, 미오는 지오프리의 곁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어때요. 이만하면 충분하죠?”

그의 팔짱을 낀 채 무도회장을 누비던 미오의 물음에 지오프리가 만족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이제 아무도 내 곁에 오지 않을 정도인 것 같군.”

지오프리의 말에 그녀가 화들짝 놀라서 주변을 살펴봤다. 그러자 두 사람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는 귀족과 어렵지 않게 눈이 마주쳤다.

‘돌로레스 같은 나쁜 여자에게 그가 당할까 봐, 걱정했었는데…….’

이 무도회에서 그에게 이용당한 것은 그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했던 걱정이 전부 바보 같다고 느껴졌다.

“그대도 나와 같은 생각일 줄 알았는데, 아닌가?”

분홍빛이 도는 술을 한 모금 들이켠 그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이렇게 기분이 엉망이라도 지오프리의 팬인 것처럼 굴어야 했다.

‘아, 진짜 짜증 나.’

그때 그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황제 폐하가 나를 베일가나 버드만가에 줘 버리면 어쩔 셈이지?”

“……아. 저는.”

그냥 순수한 팬이라서 그런 생각까지는 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하려고 했다. 융통성이라고 전혀 없는 지오프리는 그녀의 말을 그대로 믿어 버릴 게 분명했다.

‘하필 골라도 저런 사람들이야? 살인을 서슴지 않고 행하는 라비니아에 남자 사냥꾼 돌로레스라니…….’

그들과 목가적인 느낌의 공작가 정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나저나 내가 왜 이런 걱정을 하고 있지?’

베일가도 버드만가도 엄청나게 부유하다고 했으니까 꼭 나쁜 일이 아닐지도 모르잖아. 카스피언 공작 성이 풍족해지고, 지오프리도 지금보다 더 멋지게 꾸밀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도회 참석으로 이번에 새로운 옷을 많이 맞췄는데, 볼 때마다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정면으로 쳐다보지를 못하겠어.’

오늘 지오프리는 남색의 테일 코트에 붉은색 웨이스트코트를 맞춰 입어서 한층 미모가 돋보였다. 그리고 미오는 레이스가 풍성한 붉은색 드레스에 남색의 허리끈을 매달았다.

‘묘하게 비슷하잖아.’

커플 의상이 주는 묘한 느낌에 미오의 볼이 확 달아올랐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쓱쓱 비비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사실 누가 공작 부인이 되든지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냥 지금은 내가 그를 이용해야 하니까, 이렇게 신경 쓰이는 것뿐이야.’

이렇게 마음을 다잡는 그때였다.

무도회에서 한참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벤 황태자의 입장을 알리는 나팔이 울렸다. 모두가 그를 향해서 허리를 조아렸고, 미오도 얼른 예를 갖추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녀를 알아볼까 봐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제발, 제발.’

다행히 황태자는 그녀의 옆을 아무 말 없이 지나쳤고, 그제야 미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렇게 멀어지는 황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지오프리가 하늘을 보면서 혼자 중얼댔다.

“느낌이 좋지 않군.”

별이 하나도 없는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본 미오가 인상을 찌푸렸다.

‘명심해라. 별이 하나도 없는 밤은 재수가 없어. 그런 날에는 싸돌아다니지 말고 굴에서 꼼짝도 하지 마.’

이것도 까마귀가 알려 준 것이었다.

그와 성격은 맞지 않았지만, 까마귀의 말은 대부분 들어맞았기 때문에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하필 마지막 밤에 이럴 게 뭐람.’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오늘 밤만 버티면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미오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하고, 벤의 동태를 살폈다. 그는 오자마자 술을 몇 잔 연거푸 들이켰다. 벤 황태자와 눈이 마주친 것은 찰나였다.

‘……헉.’

미오가 재빨리 딴청을 부렸고, 다행히 황태자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 버렸고, 황태자의 시종이 지오프리에게 전갈을 전달했다.

“금방 다녀올 테니 내가 보이는 곳에 있도록 해. 저번처럼 엉뚱한 데 가지 않도록.”

“내가 무슨 어린아이인 줄 아나.”

지오프리의 잔소리에 그녀가 아주 작게 투덜댔다.

어쨌든 황태자가 그를 부른 것은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지오프리가 품속에서 약통을 꺼냈다. 물도 없이 알약을 삼킨 그의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공작님. 괜찮겠어요?”

“뭐가 걱정이겠어. 여차하면 날 구하러 올 거지?”

“……에?”

그는 어울리지 않게 실없는 농담을 던진 채 그렇게 황태자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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