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이용해도 내가 이용하고, 버려도 내가 버려
바로 코앞에 색색의 샴페인이 분수처럼 쌓여 있는 것을 확인한 미오가 조용히 입을 뗐다.
“공작님, 마실 것 좀 가져올게요.”
그녀가 슬쩍 일어나는데도 지오프리는 전혀 미동이 없었다.
미오가 음료수를 가져가다가 반가운 얼굴을 발견했다. 사무엘이 벽에 딱 붙어 서서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사무엘 님!”
“미오 님, 필요한 게 있으면 저를 부르지 그러셨어요.”
샴페인 잔을 쥐고 있는 미오를 확인한 사무엘이 얼른 다가와서 그것을 받아 들었다.
“어때요. 무도회에서 마음이 통하는 분을 찾았나요?”
미오가 아주 작게 속삭이자, 사무엘이 수줍게 웃었다. 흰색 재킷에 붉은 웨이스트코트, 흰색 바지를 갖춰 입은 사무엘은 오늘따라 더 귀여워 보였다. 귀 끝이 붉어진 사무엘이 입을 열었다.
“저는 이틀 내내 월 플라워였답니다.”
“……월 플라워요?”
“그게, 저처럼 파트너 없이 벽에 붙어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랍니다.”
연회장 동쪽에는 남자들이, 서쪽에는 여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파트너와 함께 온 사람은 남쪽에 휴식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파트너를 구하지 못한 남녀는 벽에 기대고 서서 언젠가 다가올 상대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운이 나쁘면 춤 한번 춰 보지 못하고 돌아갈 수도 있단다.
“아직 5일이나 남았으니까요.”
미오의 위로에 사무엘이 빙긋 웃어 주었다.
“얼른 돌아갈까요. 공작님이 조금 피곤해 보였어요.”
“네. 미오 님.”
그렇게 두 사람이 막 자리에 돌아왔는데, 지오프리의 곁에 낯선 손님이 있었다.
“……아.”
붉은 머리를 하나로 묶고 몸에 딱 붙는 은색 드레스를 입은 굉장한 미인이었다. 드레스에는 인어의 비늘 같은 장식이 달려서 무도회장의 조명 빛을 여러 가지 색으로 반사했다.
‘……아름다운 분이로구나.’
화려한 차림의 미인을 보자 괜히 미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녀가 우물쭈물하는데 사무엘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
“버드만 후작가의 돌로레스 양이 왜 공작님 옆에 있는 건지…….”
“……유명한 분이에요?”
“네. 이야기를 조금 들었습니다.”
이틀 내내 벽에 기대서 있던 사무엘은 멍하니 구경만 한 것은 아니었다. 여러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놓치지 않고 기억해 뒀다.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여인의 이름이 돌로레스 버드만이었다. 그녀는 이번에 결혼 상대 찾기를 작정했다고 했다.
‘지참금도 아주 많이 가져온다고 하지?’
‘후작가의 장녀라면 신부로 아주 적격이지.’
아름다운 돌로레스는 이번 시즌에 가장 인기 있는 여인 중 하나임이 분명했다.
미오 역시 후작가의 영애인 미인과 지오프리가 퍽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자리를 피해 드리는 게 낫겠네요.”
여전히 지오프리는 한 손으로 눈을 가린 채였고, 옆에 앉은 돌로레스가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 중이었다. 미오가 막 몸을 돌리려고 하는데, 지오프리가 허리를 세워서 앉더니 팔을 내렸다.
“……뭐야.”
미오와 눈이 마주친 지오프리의 표정이 험악했다.
“마실 것을 가지러 갔는데, 사무엘 님을 만나게 되어서요.”
정리되지 않은 말이 입 밖으로 마음대로 흘러나왔다.
‘마치 내가 와서는 안 되는 곳에 온 것 같아.’
이 무도회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된 기분에 미오의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하지만 곧 그녀는 턱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니야!’
사실 돌로레스 버드만이 그의 옆에 앉아 있는 모습이 거슬렸다. 지오프리 카스피언과 함께 온 것은 그녀였다. 게다가 사무엘의 이야기를 듣자니 버드만 영애가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해마다 데이트 상대를 갈아 치우는 거로 유명하답니다. 남자 사냥꾼이라고 부르더라고요.’
그해 가장 인기 있는 남자에게 접근해서 연애하지만, 막상 청혼하면 거절한다는 것이다. 돌로레스 버드만이 원하는 것은 외모와 돈과 권력을 모두 가진 남자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런 남자와 결혼하기 전에 우리 지오프리와 또 연애하겠다?’
하긴 지금 지오프리의 얼굴을 보면 욕심을 안 내기도 힘들기는 했다. 피곤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아찔한 분위기를 풍겼다. 긴 다리를 꼬고 앉은 그의 모습은 살아 숨 쉬는 조각상처럼 보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지오프리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야.’
누구도 그의 곁에서 저런 수작을 부릴 자격이 없다.
‘남자 사냥꾼이라니…….’
당장 나서서 돌로레스를 떼어 내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했지만, 보는 눈이 많아서 간신히 참았다. 미오가 속만 끓이는데, 지오프리가 차갑게 입을 뗐다.
“버드만 후작 이야기는 충분히 들었으니 이제 좀 비켜 주겠나?”
“……네?”
돌로레스는 그녀가 거부당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운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무도회장에서 그녀와 이야기 한번 해 보려고 줄을 선 남자가 한가득하였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남녀 간의 관계라면 꽤 노련한 편이었고, 당황한 표정도 잘 감출 줄 알았다.
“그럼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아주 우아하게 드레스 자락을 감아쥔 돌로레스는 미오에게 인사도 없이 그대로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게 분명한 돌로레스의 태도에 미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왜 거기서 멀뚱대고 있는 거지?”
지오프리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미오를 응시했다.
“공작님, 미오 님이 이렇게 마실 것을 챙겨 주셨습니다.”
사무엘이 잔을 건네자 지오프리는 고마워하기는커녕 인상만 써 댔다.
“쓸데없는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군.”
미오는 손가락으로 애꿎은 드레스 자락만 꽉 움켜잡았다.
‘잘해 주려고 해도 진짜 예쁜 구석이 있어야 말이지.’
하지만 지금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했다.
‘자칫하면 지오프리를 뺏길지도 몰라.’
이 넓은 연회장에 그를 노리는 것으로 추정되는 여인이 둘이나 확실해지자 미오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 * *
사무엘 베일은 아까부터 누군가를 찾아서 연회장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다 파우더 룸에 홀로 있는 라비니아를 발견했다.
소리 지르면서 방으로 달려든 그는 얼른 라비니아에게 다가섰다.
“라비니아! 이게 다 무슨 꼴이야!”
라비니아가 카우치에 거의 쓰러지다시피 기대 있었다. 바닥에는 독한 술병이 마구 굴러다녔다. 사무엘은 그녀의 머리를 똑바로 세운 후 물을 한 잔 가져다줬다.
“하녀도 없이 왜 혼자야? 게다가 술을 이렇게 많이 마시면―.”
사무엘의 얼굴이 몹시 일그러졌다.
일전에 미오와 나눈 이야기로 그는 오래 품고 있던 마음을 접고, 새로운 시작을 할까 했다. 그래서 연회에 참석한 많은 여인을 바라봤지만, 그 누구도 그가 찾는 얼굴이 아니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라비니아, 너를 연모해 왔어.’
“이게 누구야. 사무엘 아니야?”
풀린 눈을 한 라비니아가 손을 뻗어서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왜, 내게 알려 줄 고급 정보라도 있는 거야? 그 망할 계집이라도 죽었어?”
“라비니아, 오늘은 우리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
“……우리 사이에 무슨 이야기?”
라비니아는 마신 물잔을 내밀면서 한껏 비웃었다. 익숙한 그녀의 모습에 사무엘은 용기를 잃지 않으려 애썼다. 오늘이 아니면 영영 고백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내가 네 짝으로 부족한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나 너를 좋아해.”
얼굴이 시뻘게진 그의 고백에 라비니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봐. 사무엘. 부리던 하인이랑 결혼하는 귀족을 본 적 있어?”
“하지만 나는 귀족―.”
“아! 작위도, 재산도 하나 없는?”
라비니아는 그를 마치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개를 보듯 했다.
“…….”
그녀가 그의 마음을 받아 줄 거라는 기대는 애당초 하지 않았다. 다만 이런 멸시를 당할 줄은 미처 몰랐다.
가슴이 쪼개질 것 같아서 사무엘은 심장께를 꽉 움켜잡았다.
“꺼져. 사무엘. 나는 술이나 더 마실 테니까.”
라비니아가 들고 있던 물잔을 그의 발치로 집어 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유리처럼 사무엘의 첫사랑이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이었다.
* * *
“무도회가 아니라 살얼음판이 따로 없구나.”
황태자가 며칠째 모습을 비치지 않고 있지만 불안했다.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 데다 혹 그녀가 했던 말이나 행동을 기억하면 어쩌나 싶었다. 게다가 무도회장의 귀족 누구도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지 않은 게 분명했다. 남자들은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고, 여인들은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실컷 뒷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그래도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까…….”
조금만 버티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집?’
미오는 혼자 했던 생각에 깜짝 놀랐다. 어쩌다 카스피언 공작 성을 집이라고 생각하게 된 거지.
“공작님. 오늘 저와 한 곡 추시겠어요?”
미오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다가온 돌로레스가 공작에게 고혹적인 미소를 건넸다. 얼마 전 그의 거부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신기한 광경에 주변의 이목이 한 번에 집중되었다.
‘아주 자신만만하네.’
돌로레스의 몸에 딱 붙는 붉은 드레스는 가슴을 절반은 내어놓고 있었다. 머리에는 커다란 붉은 꽃을 장식해서 전체적으로 화려하면서도 관능적인 느낌을 주었다. 솔직히 외모는 여자가 봐도 반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보석으로 치장한 한쪽 팔을 허리에 댄 채 웃는 그녀의 얼굴은 상대에게 거절당한다는 생각이 아예 없는 것 같았다.
“……음.”
샴페인 잔을 쥐고 있던 지오프리가 느릿하게 상대를 향해서 몸을 돌렸다. 그는 돌로레스를 바라보는 대신 미오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네?”
아무 말은 없었지만, 그의 눈빛이 분명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 당황한 미오가 큰 소리를 내자 지오프리가 싱긋 웃었다.
“미안하지만 이번 무도회의 춤은 전부 이분과 약속이 되어 있어서…….”
그가 돌로레스에게 한 말에 얼굴이 붉어진 것은 미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