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질투라는 감정
이런 건 연인이나 가족 사이에나 할 법한 친밀한 행동이었다.
게다가 이런 오해나 자꾸 하는 그녀가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절대 입고 싶지 않았지만, 지오프리의 뜻이 완강해서 거절할 수 없었다.
“가만있어.”
커다란 손이 재킷의 앞을 단단히 여며 주는데, 미오는 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파르르 떨리던 어깨에 따스한 기운이 전해지자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의 다정한 손길을 조금 더 느끼고 싶었다.
‘이건 다 지오프리가 나빴어. 나를 자꾸 이상하게 만드니까…….’
그녀의 허리를 가벼이 잡은 지오프리가 미오에게 눈을 맞춰 왔다.
“나를 이런 곳에 가둔 이유가 혹시…….”
지오프리가 한 손으로 그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면서 말끝을 흐렸다. 그의 묘한 눈빛에 미오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가뜩이나 어둡고 좁은 공간인 데다 그의 재킷까지 걸치고 있어서 어지러운데…….
“오해예요. 그게, 아까 미로에서 뭔가 위험한 것을 본 것 같아서요.”
술 취한 벤은 맹수보다 위험한 존재였다.
그녀의 말에 지오프리가 허리에 찬 검을 매만지면서 빙긋 웃었다.
“나를 구해 주려고 그랬다?”
오늘 밤에는 어떤 짐승도 그를 해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미오는 어설픈 변명을 이어 나갔다.
“그냥 공작님 몸이 다 낫지도 않으셨고…….”
“……아.”
지오프리는 그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미오는 아직 그가 회복하지 못했다고 믿고 있다는 것을.
“그건 그렇지. 무도회의 음악 때문에 두통이 심하거든.”
웃음을 참느라 그의 턱이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미오의 눈에는 고통을 참는 모습으로 비쳤다.
“힘들면 잠깐 앉아서 쉬실래요?”
그녀가 지오프리 뒤에 있는 돌을 깎아 만든 의자를 권하자 그가 살짝 비틀댔다. 지오프리를 붙잡으려던 미오와 그는 함께 의자에 주저앉게 되었다. 그의 품에 파묻힌 미오가 얼른 몸을 세우려는데, 지오프리가 손을 뻗었다.
“……잠시만.”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고 있던 미오의 두 눈이 혼란에 빠졌다.
‘절대 오해하지 마. 이건 지오프리가 아파서 그런 거니까.’
단단히 되뇌었지만, 사실 이런 착각에서 헤어 나오고 싶지 않았다. 밤의 기운이 사방에 자욱했고, 이 좁은 공간은 완벽히 두 사람의 것이었다. 서로의 얼굴이 스칠 것처럼 가까워졌을 때, 마침내 그의 손가락이 미오의 귀를 건드렸다.
“……아.”
지오프리의 손끝에는 작은 잎사귀 하나가 들려 있었다.
“자꾸 이러니까 눈을 뗄 수가 없잖아.”
나지막한 그의 음성이 밤공기와 어우러져서 미오의 귀를 간지럽혔다.
“공작님, 제가―.”
뭐라고 말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입만 벙긋댈 뿐이었다.
‘도무지 모르겠어.’
생각을 정리하려고 그에게서 달아났는데, 이렇게 지오프리의 손아귀에 사로잡히고 나니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그때 그녀의 허리를 잡은 그가 미오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이제 슬슬 무도회장으로 돌아가자.”
‘미오, 정말 나를 좋아하나.’
아까 그의 물음에 아직 답하지 못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등나무의 늘어진 가지를 걷고 나온 미오가 뭉그적대자, 그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아까 질문에 대한 답은 들은 거로 하지.”
“……네?”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모든 것이 반짝댔고, 혼란스러운 밤이었다.
* * *
이튿날 오후 늦게 무도회가 열렸다. 밤새 떠들고 놀던 귀족이 잘 차려입고 다시 모여드는 모습을 지켜보던 미오는 벌써 질렸다.
‘피곤하지도 않은 건가?’
무도회도 딱히 흥미가 없었는데 황태자와의 일 때문에 마음이 더 어수선했다.
‘술에 거나하게 취해 있었으니까 기억을 못 하겠지.’
그래도 혹시나 해서 그녀는 무도회 내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다행히 황태자는 오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제발 병이라도 난 거면 좋겠다.’
황태자는 없었지만, 멀리서 라비니아가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저 정도면 참사랑인가.’
지오프리가 대놓고 면박을 줬는데도 그를 포기하지 않는 모습에 미오는 감탄했다. 그녀가 라비니아 생각을 하느라 미적대자 지오프리가 미오의 손목을 세게 잡아당겼다.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말도록.”
“여기에서 길을 잃을 일은 없는데요.”
아픈 손목을 어루만지던 미오가 울상을 지으면서 투덜댔다. 지오프리는 보통 남자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서 멀리서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유난을 떠는지 모를 일이다.
“기억력이 썩 좋지 않나 보군?”
“……아.”
그제야 어제의 작은 소동을 떠올린 미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가느다란 그녀의 목덜미를 내려다보던 지오프리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또 어디서 험한 꼴을 당하려고…….’
어제의 일을 떠올린 지오프리의 인상이 살짝 구겨졌다. 그는 춤을 추다 말고 달아난 미오를 천천히 쫓았다.
평소보다 날 선 감각에 주변의 모든 것이 지나치게 생생하게 다가왔다. 밤바람이 이마를 스쳤고, 둥근 달이 그의 앞에 펼쳐진 미로를 비추고 있었다.
‘이곳도 오랜만이군.’
레일란디 나무 울타리를 따라 걷는데 불쑥 옛 추억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살아 계시던 시절, 이곳에서 함께 숨바꼭질을 하고는 했었다.
‘내게도 모든 게 평범하던 날이 있었구나.’
어머니의 웃음소리가 이곳 미로에 꽃을 피웠었는데…….
과거를 떠올리는 것은 늘 두통을 불러일으켰다. 거친 손길로 앞머리를 쓸어 넘긴 그가 잔뜩 인상을 썼다.
‘쓸데없는 감상 따위는 집어치워.’
지금 그는 미오를 찾는 데 집중해야 했다. 이번 무도회를 조용히 보내려면 미오가 꼭 필요했다.
‘그것뿐이야.’
그렇게 애써 알 수 없는 기분을 갈무리하는데 누군가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설마.’
미로의 구석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분명 벤과 미오의 목소리야.
그것을 확인한 그의 이마가 한없이 구겨졌다. 처음 미오를 황후가 보낸 첩자로 오해했었다. 그리고 다친 그녀를 간호해 주었던 것이 한꺼번에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끙끙 앓는 그의 이마를 더듬대던 작은 손도.
‘사실이라면 용서하지 않겠다.’
오래 별러 왔던 일이지만, 지금만큼은 분노를 억제하지 못할 것 같았다. 주먹을 부들대면서 미오가 있는 곳 가까이에 다가서자, 벤의 음성이 또렷하게 들렸다.
‘……나와 밤을 함께하자.’
그의 예상과 전혀 다른 대화였다. 벤은 미오에게 보석을 줄 테니 그의 밤 시중을 들라는 명령을 내렸다.
‘……감히.’
아무리 가면으로 얼굴을 감추고 있다지만, 미오는 그가 데려온 파트너였다. 벤의 파렴치한 수작에 가면 너머 지오프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도회 중 미로에서 만난 남녀가 사랑을 속삭이는 일은 흔하지만 저런 식은 아니었다.
‘벤, 저 새끼부터 죽여 버릴까.’
궁지에 몰린 게 분명한 미오의 숨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쳤다. 당장 뛰어나가려고 하는 순간, 누군가의 신음이 미로에 퍼졌다.
‘……윽.’
‘밤길 조심해요. 황태자 전하. 나쁜 짓 많이 하면 유령이 그렇게 많이 꼬인다고 하더라고요.’
보지 않아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미오는 벤을 손쉽게 제압한 후 조롱하고 있었다.
‘……아.’
검술을 알려 주었던 어린 병사가 한 사람의 몫을 해낼 때 느꼈던 감정과 비슷했다. 아까부터 어지러웠던 머리가 점점 더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벤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인 미오가 기특했고, 고마웠다. 그리고 그런 그녀 때문에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미오의 발소리에 그는 재빨리 왔던 길을 돌아가서 마치 우연히 그곳에 들른 것처럼 굴었다. 씩씩하게 벤을 손봐 줄 때는 언제고 그녀는 남몰래 울고 있었다. 입술을 세차게 짓이기는 바람에 연지가 입 주변에 잔뜩 번졌다. 촉촉한 두 눈이 오직 그를 향해 있었다.
“공작님. 손 아파요.”
미오가 잡힌 손을 내려다보면서 속삭이는 바람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지오프리는 그녀의 손목을 잡은 손에서 힘을 조금 풀었다.
“저쪽에 가서 앉아 있도록 하지. 오늘 인사는 대충 한 것 같으니까…….”
저 멀리 사람들 틈에서 큰 소리를 내는 우르체카 대공을 뒤로한 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을 찾았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무도회장에 모인 사람을 바라봤다.
“무도회라는 게 생각하고는 매우 다르네요.”
아픈 다리를 가만 두드리던 미오가 아주 작게 속삭였다. 그녀의 말에 한쪽 눈을 찡그린 그가 짜증스레 입을 열었다.
“……아주 성가신 일이야.”
“사람이 너무 많아요.”
“그래야만 하거든.”
소파에 깊숙하게 등을 묻은 지오프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한 손을 들어서 눈을 살짝 가렸다. 무도회에서 춤과 음악을 즐기는 사람은 없었다.
이곳은 아주 규모가 큰 시장에 가까웠다.
결혼 적령기 영애는 신랑감을 물색하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고, 더 큰 부를 얻고 싶은 이들은 세력가의 비위를 맞추느라 여념이 없었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화려한 이곳은 잘 차려입은 귀족이 서로 가진 것을 사고파는 공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공작님, 저기 다른 영애와 춤을 추거나…….”
미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과장을 보태자면 무도회장의 여인 대부분이 그녀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다들 지오프리를 꺼리면서도 탐하는 느낌이었다.
‘누구나 카스피언 공작 부인이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지금 그녀 때문에 다른 사람이 지오프리의 곁에 아예 다가오지 못하는 게 신경 쓰였다. 하지만 그녀의 제안에 지오프리는 콧방귀만 뀌었다.
“내가 함께 온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
“지금 내 파트너는 그대니까 본분에 충실하도록.”
남들 보기에 그럴듯한 한 쌍처럼 보여야 한다는 그의 요구를 기억해 냈다.
“……음.”
그때 지오프리가 미약한 신음성을 내면서 이마를 찡그렸다.
‘피곤해 보이네.’
미오는 창백하게 질린 지오프리의 얼굴을 살폈다. 그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 있는 곳에서 편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멀쩡한 척하고 있지만, 그는 몰래 약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도 한가로이 춤을 춰야 한다니.’
어쩌면 지오프리는 그녀만큼 힘든 인생을 사는 건지도 모른다. 오늘따라 애처로운 그의 모습에 미오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