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미워해야 하는 이름 하나
무도회에서 다른 사람과 정을 통하는 일은 허다했다. 특히 카스피언 제국의 황태자인 벤을 노리는 여인은 대륙을 가득 덮고도 남았다. 과음한 벤의 눈에 이 여인도 그런 부류로 보일 뿐이었다.
“나를 따라 나오다니, 그 정성이 갸륵하군.”
“아닙니다.”
미오는 강하게 부정했지만, 그는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지금 여기에서 그런 말을 하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나?”
“오해가 조금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는 그녀가 먼저 와 있었는데, 그를 따라 나오다니 전혀 말이 맞지 않았다.
“음전한 척 구는 건 너무 진부하군. 요즘은 솔직한 게 대세라고 하던데.”
“정말 아닙니다.”
벤은 그녀가 정말로 그를 유혹하려고 나온 여인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
‘워낙 미친놈이라서 상대하기가 만만찮아.’
미오는 불안한 눈빛을 감추려 애쓰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춤을 추다 잠시 쉬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렇다고 쳐 주지. 그럼 내게 반한 것은 인정하는 건가.”
막무가내로 덤벼드는 그의 입에서 독한 술 냄새가 풍겼다.
“이러지 마세요.”
“내가 뭘 어쨌다는 거지?”
그를 피해서 뒷걸음질하다 보니 레일란디 나뭇가지가 등에 콕콕 박혔다. 눈물이 쏙 날 만큼 아픈데도 벤 황태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집요하게 손을 뻗어서 미오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손목이 가느다란 것을 보면 미인이 틀림없을 거야. 그렇지?”
붉은 입술을 핥으며 벤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술기운에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여인이 누구인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지금은 그저 짓밟을 상대가 필요했다. 오늘 밤을 버틸 재간이 없었기에.
‘그 새끼가 살아 돌아왔잖아요!’
‘황태자, 내가 다 처리할 수 있어요.’
흥분한 벤을 달래던 황후의 다급한 음성이 귓가를 스쳤다.
분명 사냥터에서 거의 숨통을 끊어 두다시피 했었다. 말에 제대로 앉아 있지도 못할 만큼 지오프리는 죽은 목숨이었는데…….
‘여기 멀쩡하게 살아서 춤을 추고 있잖아.’
지오프리의 건재함에 다른 귀족들 눈에 일종의 경외감이 어렸다.
‘내가 황태자인데? 오늘 무도회도 내 공을 치하하는 자리라는 것을 모두 잊은 얼굴인데?’
카스피언 제국을 발밑에 두었어도 벤의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지오프리가 같은 하늘 아래 숨 쉬는 한 절대 행복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 오늘 나는 꼭 너를 취할 것이다. 누구도 내 명을 거역할 수 없을 거야.”
급하게 목구멍으로 들이부은 술이 역류하는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미로에서 사냥하기 좋은 작은 사슴 하나를 찾았으니까.
“분명 너도 좋아하게 될 거야.”
이토록 고귀한 황태자의 밤 시중을 드는 거니까.
벤의 푸른 눈이 추악한 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지오프리 카스피언과 경쟁해야 했다.
‘저는 왜 카스피언이 아니에요?’
분명 황제의 아들이 분명했지만, 그는 황족의 성이 아니라 카트리나의 성을 따랐다. 그렇게 물을 때마다 슬픈 눈을 한 어머니는 그를 꼭 안아 주었다.
‘뭐든 열심히 하면 좋은 일이 있을 거란다. 벤.’
황태자인 지오프리를 능가하려고 벤은 뭐든 죽기 살기로 했다. 검술이나 철학, 역사 공부를 하느라 어린 시절 단 하루도 제대로 쉰 기억이 없었다. 어린아이가 의례 할 법한 칼싸움이나 숨바꼭질 같은 것은 구경한 게 전부였다. 하지만 노력한 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또 2등인가.’
죽을힘을 다해도 지오프리의 벽을 넘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을 해도 돋보이는 것은 지오프리지, 그가 아니었다. 굳건하게 서 있는 장벽에 맨몸으로 부딪치는 기분은 절망적이었다. 몸이 천 갈래, 만 갈래 찢겨 나가고, 심장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불륜의 증거.’
황태자가 되기 전 황제의 배려로 카트리나는 힘없는 귀족과 혼인하여 후작 부인이 되었을 뿐 그녀가 황후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런 이유로 카트리나의 아들인 벤 역시 반쪽짜리 황족이었다.
그러다 카트리나와 벤에게 엄청난 행운이 찾아왔다.
두 사람이 황후와 황태자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 것이다. 황태자가 되었으니 모든 것을 손아귀에 넣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불행 끝, 행복의 시작인 줄로만 알았다.
‘지오프리! 지오프리!’
심지어 변방으로 쫓겨난 주제에 지오프리는 그곳에서 온갖 공을 세워 댔다. 황태자는 그였지만, 백성은 지오프리를 칭송했다. 황후는 별별 수를 다 써서 그를 제거하려고 했지만, 지오프리는 정말이지 소문처럼 저주라도 받은 건지 절대 죽지 않았다.
‘지오프리가 사라지지 않는 한 나는 카스피언 제국의 황태자로 존재할 수 없다.’
고통스러운 기억에 벤은 숨통이 콱 틀어막히는 것 같았다. 그때 그의 품에서 자그마한 여인이 버둥대는 바람에 오래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황태자 전하, 그만 놔주세요.”
미오는 최대한 상대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상대의 번들거리는 눈을 보니 틀린 것 같다.
“나와 밤을 함께하자. 값진 보석을 내릴 테니까.”
“……하.”
“운이 좋으면 내 아들을 가질 수도 있지 않겠느냐? 응?”
‘아들은 무슨 아들이야!’
미오는 미친 소리를 늘어놓는 황태자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여우로 변할 수 있다면 앞발로 저놈의 얼굴을 죄다 할퀸 다음에 다리를 물어뜯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술에 취한 저런 남자를 상대하는 건 지금도 충분해.’
속이 메슥거리는 것을 겨우 참은 채 구두 신은 발로 상대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윽.”
불시의 공격에 나가떨어진 벤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흘렀다. 미오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차갑게 입을 뗐다.
“이봐요. 황태자 전하. 보석을 산처럼 준다고 해도 그쪽이랑은 손도 잡기 싫거든요.”
사실 지오프리와 그녀를 죽이려고 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정강이가 아니라 다른 데를 걷어차야 마땅했다. 다만 그냥 문제를 일으키기 싫어서 꾹 참았다.
“너 내가 누구인 줄 아냐. 끄응.”
아직 아픈지 낑낑대던 벤이 제대로 서지 못한 채 그녀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미친 새끼. 이번에 또 나를 붙잡으면 정강이로 안 끝나.”
미오가 음험하게 웃으면서 벤의 허리 아래를 노려보자 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작고 가냘픈 몸 어디에서 저런 기운이 솟아나는지 가만 서 있는데도 왠지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밤길 조심해요. 황태자 전하. 나쁜 짓 많이 하면 유령이 그렇게 많이 꼬인다고 하더라고요.”
그녀는 벤의 옆을 지나면서 팔꿈치로 옆구리를 강하게 가격했다.
“아이고! 거기 서 계신 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나한테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끙끙대면서 벤이 크게 휘청거렸다.
“글쎄요. 설마하니 나처럼 작고 약한 여자한테 당했다고 떠들고 다닐 셈인가요?”
“……으.”
만취한 벤이 그대로 털썩 쓰러지더니 먹은 것을 토하기 시작했다. 웩, 하는 소리에 미오는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용감한 척 굴었지만, 모퉁이를 돌자 다리 힘이 죄다 풀렸다.
‘그가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였다면, 지금과는 다른 상황이 되었을지도 몰라.’
원하지 않는 상대에게 잡혀서 꼼짝할 수 없는 상황은 생각보다 끔찍했다. 그대로 끌려가서 그에게 몹쓸 짓이라도 당했다고 상상하면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지오프리.”
손이 덜덜 떨리고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데 생각나는 이름은 하나뿐이었다. 그의 이름을 외면서 두려움을 떨쳐 보려고 애쓰는데, 미오의 앞에 다시금 긴 그림자가 늘어졌다.
‘혹시 황태자가 쫓아온 거야?’
이번에는 그를 떨쳐 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두려움에 미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
눈물범벅인 얼굴을 들자 그녀의 앞에 익숙한 남자가 서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무감한 표정이었지만, 흐트러진 앞머리와 살짝 붉어진 볼이 급하게 온 느낌이 역력했다.
‘황태자가 아니라 지오프리였어.’
안도감에 이대로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나는 지금 황태자를 때리고 도망 왔으니까…….’
괜히 그에게 불똥이 튈지도 모른다.
“저기, 공작님. 여기 있으면 안 돼요.”
다급한 마음에 미오는 그의 손목을 움켜잡고 서둘러 걸었다. 여기서 무조건 멀어져야 했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으슥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을 살피던 미오가 얼른 등나무가 우거진 공간으로 지오프리를 밀어 넣었다.
“이게 도대체 다 무슨 일이지?”
일방적으로 끌려와서 은밀한 곳에 갇힌 지오프리가 느긋하게 입을 뗐다. 그제야 그가 오해할 만한 상황이라는 생각에 미오의 볼이 붉어졌다.
“……그게, 공작님은 여기 무슨 일이세요.”
“나는 너를 찾으러 왔지. 여기서 혼자 다니면 위험하니까 말이야. 더욱이 이런 미로라면…….”
“……아. 몰랐어요.”
뜨거운 애정 행각을 기대하는 남녀가 미로에 숨어든다는 것은 전혀 몰랐다. 알았더라면 절대로 이곳에 몸을 숨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황태자가 헛소리를 한 게 그런 이유였구나.’
그나저나 지오프리는 언제부터 그녀를 보고 있었을까.
‘설마 황태자와의 일을 다 본 건 아니겠지.’
거친 숨을 고르는 미오가 초조한 눈빛을 하는데, 지오프리가 그의 재킷을 벗었다.
‘왜 옷을 벗는 거지.’
그의 가벼운 몸짓에 가슴이 속절없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설마 여기서…….’
크림색 웨이스트코트 위로 진주 장식이 달린 크라바트가 등나무 사이로 비친 달빛에 반짝였다.
입술을 둥글게 모은 미오가 턱을 앞으로 빼는데, 천천히 그녀의 어깨에 재킷이 덮였다. 입맞춤이 아니라 그저 옷을 벗어 주려던 것이었다.
“괜찮아요.”
춥기는 해도 그의 옷을 입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