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71)화 (71/123)

71화 음악은 멈추지 않아

지오프리의 제안에 미오는 카우치 뒤로 몸을 물렸다. 그녀는 그의 허벅지에 발을 올리는 일 따위는 죽어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요. 그건 정말 아니에요.”

“뭐가 아니지?”

질겁하는 미오의 얼굴을 올려다본 그가 무심한 얼굴로 되물었다.

‘내가 아무리 연애 경험이 없지만, 발을 허벅지에 올리는 게 그렇게 평범한 일이 아니란 것 정도는 알거든?’

하지만 그녀의 거부에도 지오프리는 완력으로 미오의 발을 그의 허벅지 위에 올렸다. 스타킹 너머로 닿는 탄탄한 허벅지의 열기는 머리가 어질해질 만큼 자극적이었다.

“가만 보면 말을 참 안 들어.”

지오프리는 손에 힘을 잔뜩 주더니, 상처를 자세히 확인했다.

“……진짜.”

그제야 체념한 미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반으로 찢었다. 그는 그것을 미오의 발뒤꿈치에 조심스레 감아 주었다.

“이제 구두를 신어 봐.”

지오프리의 손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춤이라도 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오는 얼른 구두로 발을 밀어 넣었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보다 훨씬 덜 아파요.”

그녀가 신기한 눈으로 구두를 쳐다보자 지오프리가 남몰래 싱긋 웃었다.

천천히 몸을 세운 그가 미오를 향해서 손을 내밀었다.

“이제 나가서 춤을 출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태연한 모습에 미오는 분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 * *

해가 질 무렵 본격적인 무도회가 시작되었다.

부드러운 곡이 연주되었고, 지오프리와 미오는 자연스레 춤을 추는 무리에 섞여 들었다. 그의 춤은 오늘도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고, 지오프리의 손만 꼭 잡고 있으면 모두 괜찮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완벽한 상황에도 미오의 심장은 아까부터 주체 못 할 정도였다.

‘진짜 지오프리가 왜 이러는 거지?’

발뒤꿈치에 천을 감아서 통증은 줄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아까 지오프리의 허벅지에 닿았던 발바닥부터 열기가 퍼져서 몸 전체가 화끈거렸다.

‘왜 저번부터 자꾸 의원 행세야.’

그가 냉랭하게 굴 때는 그렇게 밉더니, 친절하게 행동하자 그건 그것대로 신경 쓰였다.

“오늘 우리만큼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또 있을까.”

한참 춤을 추던 지오프리가 뱉은 의외의 말에 미오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잘 어울린다니 이건 또 무슨 말이지?’

미오가 도전적으로 눈을 치켜뜨자, 그가 작게 속삭였다.

“둘 다 죽은 사람들이니까 말이야. 안 그래?”

아무래도 그는 라비니아와 그녀가 주고받은 말을 들은 게 틀림없다.

……죽은 자의 춤이라.

황태자와 라비니아가 두 사람을 죽이려고 들었으니까, 그들에게 잘 어울리는 말이기는 했다.

미오가 희미하게 웃자, 무도회장의 하얀 대리석 벽 위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시꺼멓게 드리워졌다.

지오프리의 손을 잡고 몸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도는 그때 부들부들 떨고 있는 라비니아와 눈이 마주쳤다.

‘어쩌면 죽이는 것보다 이게 나은 복수일지 몰라.’

라비니아에게 가장 끔찍한 일은 지오프리를 다른 사람에게 뺏기는 것일 것이다.

‘지금 저 얼굴 혼자 보기 아깝네.’

라비니아는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인생의 목표였던 남자가 미오의 차지가 되었으니까.

‘얼마나 화가 날까.’

왜 마음을 나쁘게 써서 화를 자초하는지 모를 일이다. 가만있으면 그녀가 알아서 빠졌을지도 모르는데…….

‘조금 더 울려 줄까.’

저렇게 괴로워하는 표정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그녀가 지오프리의 목에 두 손을 감았다. 놀라는 그의 시선을 느꼈지만 미오는 하던 것을 멈추지 않았다.

“사이 좋게 보여야 한다고 했잖아요.”

“……아.”

그의 품에 깊숙이 안긴 채 미오가 연회장을 어지럽게 돌았다. 반짝이는 샹들리에의 불빛이 담긴 지오프리의 그윽한 눈동자에 취해 버린 것 같았다.

‘……어지러워.’

라비니아에게 보여 주려고 했던 행동이지만, 어느새 이 상황에 푹 빠졌다. 한참 그의 가슴만 응시하던 그녀가 고개를 치켜들자, 사방에 세워진 기둥 위에 마정석 등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반딧불 같아.’

밤하늘로 피어오르는 불빛의 잔상을 좇노라니 지오프리의 턱에 시선이 닿았다. 그리고 이내 미오의 시선은 그의 가늘고 붉은 입술에 이르렀다.

“미오, 정말 나를 좋아하나.”

“……?”

예상치 못한 그의 진지한 질문에 미오는 곧장 답을 할 수 없었다. 좋아한다고 백 번도 넘게 말했으니 그냥 입만 열면 그만이었다.

‘당신의 팬이에요! 좋아해요! 당신이 제일 멋져요!’

숨 쉬듯이 고백해 왔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 조금 망설여졌다.

그 말이 진짜 지어낸 것인지, 그녀의 진심인지 구분이 되지 않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으니까.

‘아마 지금 입을 열면 여우의 마음이 아닐지도 몰라.’

쉼터에서도 여우가 하고 싶어 했던 말이라고 핑계를 댔던 건지도 모른다. 사실 지오프리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물론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정원에 시체를 파묻거나 전장에서 수많은 피바람을 몰고 다녔으니까.

‘하지만 다친 나를 염려해 주고 돌봐 주었어.’

로렌이나 집사, 사무엘의 맹목적인 충성은 그냥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카스피언 공작 성의 고용인 대부분은 지오프리를 존경했다.

‘이게 뭐야.’

공작가 고용인의 생각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왜 자꾸 지오프리 카스피언을 옹호하려 드는지 모른다.

‘정신 차려. 너는 지오프리 카스피언을 이용하려는 것뿐이야. 그는 잘생긴 악당에 불과해!’

속으로 강하게 외쳐 봤지만, 불빛 어린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기 어려웠다. 지오프리의 품에서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체향이 풍겨 왔다. 두통은 점점 더 심해졌고, 벗어나기 위해서 미오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대답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그제야 지오프리가 했던 질문을 떠올릴 수 있었다.

“……대답이야 늘 같―.”

“그러니까 그 대답을 직접 듣고 싶은 거야.”

거의 이마가 맞닿을 것처럼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무도회장의 모든 시선들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오랜만에 지오프리 카스피언이 참석한 무도회인 데다, 상대가 우르체카 대공의 친척이라는 것은 모두의 흥미를 사기에 충분했다.

“……어서.”

지오프리의 나지막한 음성이 그녀의 고막에 파고들자, 미오는 도무지 견뎌 낼 수 없었다.

“잠시만, 잠시만요.”

마침 음악이 끝나 갔고, 그녀는 그대로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 * *

왁자지껄한 무도회장을 벗어나자 멀지 않은 곳에 꼬불꼬불한 미로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키보다 큰 레일란디 나무 울타리가 펼쳐져 있었다.

미오는 일단 지오프리에게서 최대한 멀어질 목적으로 그곳으로 달려갔다. 기다란 드레스 자락이 자꾸 밟혀서 넘어질 것 같았지만,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하아. 하아.”

울타리에 기대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갑작스레 눈물이 터졌다.

지금 그녀는 비겁했다.

불편한 진실을 인정하는 것이 두려워서 달아났으니까.

‘그의 물음에 차마 답을 할 수가 없었어.’

거짓말도 진심도 아닌 이 마음을 뭐라고 형언할 수 있을까. 그녀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 지오프리에게 마음을 뺏겼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렇게 피하고 싶었던 일인데…….”

원작의 여우처럼 비참한 엔딩을 맞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했는데, 어째서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는지 모른다. 아름다운 선율이 귓가에서 재생되었고, 그의 흑요석 같은 눈이 오직 그녀에게만 닿는 순간이 반복되었다.

‘당신을 좋아하냐고? 좋아한다는 단순한 말로 이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미오는 그의 물음에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지오프리가 죽는 게 싫었다. 다치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고, 그의 우울한 표정을 보는 것도 슬펐다.

‘그래서 동굴에서 기를 쓰고 살리려 했지.’

밤이 깊었고, 미로 안으로 찬 바람이 가벼이 불었다. 급하게 오느라 걸칠 것을 챙기지 않은 탓에 미오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그녀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던 그의 손길이 그리웠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절대 들키지 않을 거야.’

지오프리는 절대 그녀를 사랑해 주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보답받지 못할 사랑에 평생 고통받다가 이 삶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힘들겠지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조금은 나은 끝을 맺고 싶었다.

‘암수가 한번 짝은 지으면 말이야. 평생 함께하는 거야.’

까마귀의 저주 같은 말이 귓가에 맴돌았지만,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그와 짝을 지은 것도 아니잖아.’

지오프리에게 각인했지만, 그와 한 것은 고작해야 입맞춤뿐이다. 그런 건 가까운 사람끼리도 하는 인사니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각인이란 그것보다는 조금 더 은밀한 행위라고 들었다. 어깨에 이를 박아 넣은 후…….

각인 행위를 떠올리자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찬 바람에 볼을 식힌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돌아가서 평소처럼 그의 팬이라고 하는 거야.’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이다.

그에게 그렇게 말하기로 마음을 먹자, 가슴의 두근거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한 손으로 드러난 어깨를 살짝 매만지는데, 누군가 풀 밟는 소리가 났다.

‘……지오프리일까.’

놀란 그녀가 얼른 표정을 갈무리하려는데 기다란 그림자가 울타리에 드리워졌다.

“……아.”

미오 앞에 나타난 것은 지오프리가 아니었다.

보석이 박힌 화려한 금색 가면을 쓴 남자가 몸을 심하게 비틀댔다.

‘벤 황태자잖아.’

오늘 무도회에 참석한 사람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가면이라서 그를 기억했다.

“……나를 기다린 건가?”

황태자는 술을 얼마나 마셨던지 그녀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전하.”

미오는 일단 고개를 숙여서 예를 갖추었다.

복잡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술에 취한 황태자를 내버려 두고 무도회장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나를 기다렸냐고 묻잖아! 같은 말을 두 번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달빛을 받은 금발이 살랑거렸고, 가면 너머 보석 같은 푸른 눈이 그녀를 향해서 웃고 있었다.

‘아름답지만 두려워.’

말에 매달려 있던 숲속 친구들의 사체는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채였다. 주먹을 꽉 쥔 미오가 제법 강단 있게 입을 열었다.

“전하를 기다린 것은 아닙니다.”

“저런, 그런 변명은 숱하게 들었지.”

벤의 입술이 비릿하게 호선을 그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