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70)화 (70/123)

70화 카스피언 제국 가면무도회 (3)

제법 깡다구 있게 소리는 질렀지만, 미오는 라비니아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나쁘지 않아.’

꼭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을 본 사람처럼 파랗게 질린 라비니아의 얼굴을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미오가 다리를 꼬면서 태연스레 입을 뗐다.

“뭘 물어. 무도회에 왔으니 여기 있겠지.”

당황한 것은 라비니아 쪽이었다.

“그게 아니잖아. 너는, 너는…….”

“왜 말을 못 해. 목에 꼭 벌이라도 쏘인 사람처럼.”

더듬대는 라비니아를 보면서 미오가 실컷 비웃었다. 그녀의 말에 라비니아의 눈이 분노로 물들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카스피언 공작 성에서 일어난 일을 내가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너는 그때 없었는데…….”

무도회에 참석하겠다는 일념이 강했는지 라비니아는 뱀과 벌의 공격에도 퍽 멀쩡해 보였다. 허리까지 흐르는 금발 머리에는 작은 티아라가 장식되어 있었다. 그녀는 연보라색 시폰 드레스로 풍만한 몸매를 제대로 드러냈다. 팔과 목에는 보석 장식품으로 휘감아서 밤에도 번쩍번쩍할 것 같았다.

“아니, 그건 됐고, 너는…….”

라비니아가 충격으로 말을 연신 더듬어 댔다. 미오는 저렇게 악독한 인간도 놀라기는 한다는 게 신기했다. 그녀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면서 입을 뗐다.

“아, 왜 아직 살아 있냐고?”

미오의 말에 라비니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독이 든 쿠키를 먹는 걸 내 눈으로 확인했어.”

“그래. 그것뿐이겠어? 자루에 넣어서 내다 버렸잖아.”

자루에 갇힌 채 눈을 떴을 때가 떠올라 미오의 입매가 꽤나 뒤틀렸다. 최악의 순간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절대 최악이 아니었으니까.

미오가 읊어 대는 그녀의 범죄 행적에 라비니아가 천천히 카우치 쪽으로 다가섰다.

“그건 진짜 구하기 힘든 독이야. 살아난 사람이 없다고 했어.”

복어의 알에서 추출해서 만든 것으로 무색, 무취라서 누구든 속일 수 있었고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확신했다.

“그러면 그 장사치가 널 속였나 보지, 뭐.”

라비니아의 말에 미오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녀 역시 독에서 살아난 이유는 잘 알지 못했다. 내내 불운한 시간을 보내는 미오를 동정한 신의 자비인지, 수인이라는 특이 체질 때문이었는지, 매일 괴상한 약을 먹인 로렌 덕분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내가 죽지 않았고, 앞으로는 그런 식으로 어이없게 당하지 않을 거라는 거야.’

“말도 안 돼!”

라비니아는 심혈을 기울여서 짰던 살인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 마음대로 생각해.”

잔뜩 꼬인 마음에 미오의 입에서 퉁명스러운 음성이 튀어나왔다. 어떻게든 라비니아를 울리고 싶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내가 공작님과 무도회에 와서 퍽 속상하겠네.”

미오가 활짝 웃으면서 상대를 살살 자극했다. 라비니아는 발끈하면서 소리를 높였다.

“너랑 왔어도 나는 당장 그의 마음을 돌릴 자신이 있어. 카스피언 공작은 너 따위가 아니라 나에게 걸맞은 남자야.”

맞는 말이다.

여우 수인이 아니라 베일 백작가의 딸이 그에게 더 어울린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어쩌지? 공작님은 나를 좋아하는데…….”

“헛소리 집어치워!”

역시나 라비니아는 그녀의 도발에 걸려들었다. 길길이 날뛰기 시작하면서 애써 차려입은 드레스가 몹시 흐트러졌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약한데…….’

카우치에서 등을 세운 미오는 뭘 할까 궁리하다 깜짝 놀랐다. 열린 파우더 룸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언뜻 엿보였다. 그리고 아주 사소한 일부분뿐이었지만,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언제부터 저기에 서 있었던 거지.’

가면을 손에 쥔 지오프리가 천천히 파우더 룸에 들어서더니 문을 닫았다. 그의 등장에 놀란 라비니아가 얼른 가면을 썼다. 그녀가 떨리는 음성을 냈다.

“카스피언 공작님을 뵙습니다.”

벌에 쏘인 흉한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은밀히 베일 영지로 돌아갔던 라비니아다. 그동안 카스피언 공작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그리고 오늘 그의 모습은 그녀가 상상하던 그대로였다.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인제 그만 나가 주겠나.”

“……네?”

“내가 내 파트너와 단둘이서만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공작은 평소 서늘하기는 했어도 별 감정을 담지 않은 얼굴로 그녀를 대했었다. 하지만 오늘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징그러운 벌레라도 본 것처럼 일그러지는 공작의 입매에 라비니아는 충격받았다.

“……아. 네.”

흔들리는 눈을 한 라비니아를 지나친 그는 미오가 앉은 카우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구두가 작은 건가.”

구두를 벗어 두고 있었던 탓에 실크 스타킹에 밴 핏물이 그의 눈에 띄었다.

“그게, 제가 이런 구두가 익숙하지 않아서요.”

미오는 내놓고 있던 두 발을 드레스 안으로 숨기려고 꿈틀댔다.

‘혹시 내가 한 말을 들은 건 아니겠지.’

그가 미오를 좋아한다는 말을 큰 소리로 내뱉은 것을 생각하자, 온몸이 떨렸다.

지오프리의 등장에 방금까지 라비니아와의 다툼이 잊힐 정도였다.

마치 이 공간에 두 사람만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라비니아가 소리를 내 이를 부득 갈자, 지오프리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아직도 안 나갔나?”

공작의 축객령에 라비니아가 패잔병처럼 힘없이 문을 닫고 사라졌다.

* * *

파우더 룸에 간 미오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지오프리는 그녀를 찾아 나섰다.

‘저는 공작님의 팬이랍니다!’

처음 지오프리는 허무맹랑한 말만 늘어놓는 그녀를 조금도 믿지 않았다. 그를 사랑한다는 사람은 전부 거짓말쟁이였거나 죽어 버렸다. 황태자의 자리에 있을 때 시도 때도 없이 날아오던 연서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지오프리를 원하는 자는 둘 중 하나였다.

그가 가진 권력을 원하거나, 잘생긴 얼굴을 탐하거나.

‘그러니 너도 거짓말을 하는 거겠지.’

황후의 첩자로 생각하고 곁에 두고 감시할 작정이었다. 첩자를 역이용하는 것도 썩 괜찮은 방법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그가 오래 지켜봐 왔지만, 미오는 첩자를 하기에는 부족했다. 진심인지는 확신하지 못할 그녀의 애정은 딱히 상관도 없었다. 하지만 첩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자, 조금 다르게 보였다.

‘상사병으로 죽는 사람을 직접 보게 될 줄이야.’

그가 사랑에 응해 주지 않는다고 호수에 뛰어들고, 2층에서 뛰어내리려고 들었다.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을 경멸하는 지오프리로서는 이해해 줄 수 없는 행동들이었다.

‘그냥 당신이 좋을 수도 있잖아요. 잘 웃지 않지만, 가끔 보이는 미소가 아름답고. 무뚝뚝하고 매정한 것 같아도 다친 짐승 하나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는 다정한 당신을 마음에 담을 수 있죠.’

다친 미오를 쉼터에 데려갔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이 내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냥 나를 좋아한다…….’

아닌 줄 알면서도 어쩐지 그녀의 고백이 자꾸 꽉 닫힌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인상을 쓴 지오프리가 파우더 룸 근처에 도착했을 때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날카로운 음성이 들렸다. 그는 그것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베일 영애가 미오와 할 이야기가 뭐지.’

고개를 갸웃하는데 라비니아의 입에서 이상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 독을 먹고도 안 죽은 건 너뿐이야.’

라비니아가 미오를 죽이려고 들었단 건가.

‘그래서 그 모양을 하고 서 있었구나.’

숲에서 곧 쓰러질 것 같았던 미오의 모습이 생생했다. 하지만 그녀는 왜 그런 꼴을 하고 있는지 끝까지 털어놓지 않았다.

‘어째서였을까.’

독에 당하고 그곳에 버려진 거였는데, 왜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았지.

지오프리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그리고 라비니아에게 맥없이 당하는 미오의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감히 내 것에 손을 댔어?’

의심하는 것도, 추후 그녀의 죄가 드러났을 때 처벌하는 것도 모두 그의 소관이었다. 라비니아 따위가 함부로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상대를 향한 분노에 그의 주먹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공작님, 저 진짜 괜찮아요.”

그녀의 발을 더듬는 지오프리를 향해서 쩔쩔매는 음성이 흘렀다.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은 지오프리가 고개를 들었다.

‘도대체 그 속에 뭘 더 숨기고 있는 거지.’

그의 손길에서 벗어나려고 바르작대는 미오의 발목을 세게 잡았다.

“괜찮은지는 내가 판단해.”

미오의 발목은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져 버릴 것처럼 정말 가늘었다. 커다란 손으로 거침없이 그녀의 발목을 더듬던 지오프리가 긴 한숨을 쉬었다. 이상하게 자꾸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꼴 보기 싫고…….’

라비니아에게서 그런 일을 당한 것도, 그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는 것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끝까지 그를 좋아한다고 우겨 대는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하지만 이런 모든 이유에도 미오를 외면하지 못하는 그가 제일 짜증 났다.

“다행히 발목을 다친 것 같지는 않군.”

묘하게 간호를 해 주는 것 같은 분위기에 두 사람은 일전의 쉼터를 떠올렸다.

타들어 가는 장작불 소리와 좁은 공간을 가득 메우던 숨소리. 엉켜 들던 시선과 뜻 모를 진심.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잔뜩 찡그렸던 이마를 펴면서 지오프리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게 낫겠다고 했었는데…….”

보답받지 못할 마음은 비참하니까.

미오가 그에게 품은 마음을 포기하기를 바랐다.

그때는 그랬었다.

“……그러셨죠.”

“그 마음, 허락해 주지.”

“……네?”

미오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지오프리 때문에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좋아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게 무슨 뜻이지?’

그 와중에도 지오프리의 손은 그녀의 발목을 떠날 줄 몰랐다. 혼란에 빠진 미오가 멍해 있는 사이 그가 발목을 잡아당겼다.

“발을 여기에 올려.”

지오프리가 가리키는 곳은 무릎을 꿇어서 팽팽해진 그의 허벅지 위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