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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69)화 (69/123)

69화 카스피언 제국 가면무도회 (2)

상념에서 벗어난 지오프리는 얼른 미오의 손목을 놔주었다. 풀려난 손목에는 그가 만든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위로 진주 팔찌가 달랑댔는데, 지오프리의 시선이 그의 크라바트 진주 장식에 이르렀다.

‘이런 짓을 하다니…….’

하지만 그와 세트로 진주 장식을 단 미오를 보자 시선을 거두기 힘들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에 지오프리의 눈이 잠시 탁해졌다.

“들어가지.”

금방 감정을 추스른 지오프리가 앞장섰고, 두 사람은 천천히 무도회장으로 들어갔다.

“공작님, 저게 다 진짜일까요?”

야외에 마련된 무도회장은 입구부터 화려했다. 덩굴이 타고 올라간 아치 너머로 온갖 귀한 조각상이 늘어서 있었다. 개중에는 보석이 박히거나 금박이 씌워진 것도 있어서 휘황찬란했다.

“촌스럽게 굴지 마.”

입을 떡 벌린 미오가 사방을 둘러보는 것을 본 지오프리가 딱딱하게 지적했다. 하지만 그의 말에도 그녀는 두리번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때 어디선가 여인의 웃음소리가 분수처럼 귓가에 쏟아졌다. 그제야 미오는 이곳이 그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뭐가 신기하다고 구경하는 거야.’

어차피 그녀는 원래의 세계에서도 이곳에서도 이방인에 불과했다.

‘내가 여우 수인인 것을 알면 전부 다 달아나겠지.’

미오는 답답한 마음에 가면을 매만졌다. 오늘 그녀는 검은색 벨벳 가면을 썼는데, 눈만 가리는 형태였다. 지오프리와 같은 가면에 비슷한 의상까지 입은 게 신경 쓰였다.

“추운가. 내 팔을 잡아.”

“아니요. 괜찮아요.”

옆에서 바들바들 떠는 미오를 확인한 지오프리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이건 부탁이 아니야.”

미오가 더듬더듬 그의 손목에 손을 올렸다. 단단한 그의 팔에 몸을 의지하자 혼란스러움이 조금 가셨다. 지오프리는 그녀의 손등을 살짝 두드리면서 속삭였다.

“오늘 기억해야 할 것은 단 한 가지야.”

“…….”

“다른 사람 눈에 우리가 조금 친하게 보여야 해.”

“……에?”

하지만 지오프리는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고, 영문도 모른 채 그녀는 무도회장 입구에 들어서게 되었다.

나팔을 든 시종이 그들의 도착을 알렸다.

“카스피언 공작 전하와 동행인 드셨습니다.”

카스피언 공작이라는 말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이미 한번 경험한 바는 있지만, 이런 기분은 별로였다.

“역시 숲에서 죽어 버렸어야 했을까.”

그녀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음성이었다. 지오프리는 그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비웃고 있었다.

‘지금 지오프리는 화를 내는 거야.’

평소보다 더 침착해 보이는 그의 옆모습을 보면서 미오는 확신했다. 지오프리는 화를 낼 때면 이렇게 더 차가워지니까.

그에게 인사를 건네는 인파를 헤치고 나자 무도회는 본래의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찾았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벤과 함께 가벼이 대화를 나누던 황제 일행은 지오프리의 등장에 모두 무덤덤해 보였다. 세 사람은 부를 과시하듯 깃털과 보석으로 장식한 순금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곧 황후가 지오프리를 향해서 인자한 미소를 보냈다.

“어서 와요. 카스피언 공작.”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지오프리의 정중한 인사에 카트리나가 긴 손톱으로 손등을 두드렸다. 그러다 짜증스러운 기운을 간신히 참은 그녀가 다정한 말을 건넸다.

“오늘은 혼자가 아니군요?”

황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푸른색 재킷과 흰 바지를 갖춰 입고, 검은 부츠를 신은 벤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형인 지오프리는 무시한 채 곧장 미오에게 알은체를 했다.

“당신이 공작의 동행인가요?”

푸른 눈을 활짝 휘면서 벤이 인사를 청했다.

뭐야. 왜 지오프리를 두고 나한테 인사를 하는 거지?

그에게 손을 잡힌 미오의 등이 삽시간에 굳었다. 상대에게서 피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그건 사냥이나 다를 바가 없었어.’

지오프리를 죽이려고 했던 놈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미오가 더듬대며 예를 갖추자 벤이 피식 웃었다.

“그게 뭐예요. 우리는 제법 가까운 사이일 수도 있는데, 안 그래요?”

은근한 말은 꼭 미오와 황태자 사이에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주었다.

‘제정신이 아니야.’

그의 외모를 보고 천사라고 생각했던 것은 취소한 지 오래였다. 벤은 그녀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저열한 축에 속했다.

“그러면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미오의 허리를 감싼 지오프리의 팔에 이끌려서 두 사람은 그곳에서 벗어났다.

“왜 이렇게 떠는 거지?”

그녀의 몸을 꽉 붙든 지오프리의 속삭임에 미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황태자를 이렇게 무서워할 이유가 없지 않나?”

그의 의미심장한 말에 미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니면 된 거지. 왜 화를 내지.”

벤이 지오프리를 죽이려 드는 것을 목격했을 때는 여우였다. 그러니 지금의 두려움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설마 지오프리에게 들킨 것은 아니겠지.’

그의 의심병이 전염이라도 된 건지 머릿속 온갖 생각이 점점 몸집을 키웠다.

‘저 성격에 그걸 알았으면 가만있었겠어?’

그를 속인 것을 알게 되면 미오를 들들 볶아 댔을 것이다.

‘원래 이상하니까 그냥 한번 해 본 소리일 거야.’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자 떨림이 금방 잦아들었다.

그때 인파 사이로 대공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가 쓴 하얀 가면 위로 드러난 눈썹을 보자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두 사람. 나를 두고 가면 어쩌자는 거지?”

우르체카 대공은 두 사람이 그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입장한 것에 분노했다.

“미오를 중간에 세우고 나란히 들어가려던 계획이 엉망이 되지 않았나.”

“누가 그런 계획을 세웠나요. 대공 각하.”

날카로운 지오프리의 대꾸에 알렉세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공작 자네는 정말 예뻐해 주기 힘든 사람이야.”

“대공 각하. 원하는 바입니다.”

아주 가까이 선 두 사람의 신경전에 미오는 조마조마했다.

‘도대체 무슨 사이인 거야.’

친구인 것도 같고, 원수인 것 같기도 한 두 사람은 이곳이 어디인지를 잊은 것 같았다.

‘여기는 무도회 한가운데라고!’

하지만 미오의 걱정과 달리 두 사람이 마주 선 모습은 여인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어쩜 좋아. 두 분이 함께 서 있으니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아.’

‘저렇게 아름다운 그림이 또 있을까.’

말랐지만 탄탄한 몸을 가진 지오프리의 날카로운 시선이 건장한 대공의 비취색 눈을 강하게 응시했다.

“공작. 여기는 보는 눈이 많군.”

우르체카 대공이 먼저 주변의 시선을 알아챘다. 그는 공작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그들에게 손 키스를 날렸다. 사방에 꺅꺅대는 여인의 비명이 울렸다.

“저기, 저는 화장을 좀 고치고 와야겠어요.”

손에 든 작은 가방을 흔들어 보인 미오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까부터 미오는 딱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생경한 무도회장의 커다란 음악 소리나 살을 에는 것 같은 날카로운 시선, 지오프리와 대공의 유치한 신경전 모두가 질색이었다. 얼른 파우더 룸을 찾은 그녀는 기다란 카우치에게 대충 기대앉았다. 가면부터 풀어서 집어 던졌고, 구두를 신은 발목을 주물렀다.

“발이 너무 아파.”

새 구두를 처음 신어서인지 발뒤꿈치가 다 까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건 뭐지.”

미오는 로렌이 챙겨 준 가방을 열어 보았다. 거기에는 작은 사탕과 연지 통이 들어 있었다. 로렌은 이런 것을 챙겨 주기만 한 게 아니라, 무도회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에게 이것저것 알려 주었다.

‘조금 쉬고 싶을 때는 파우더 룸을 찾으면 된다고 했어.’

로렌은 함께 오고 싶어 했지만, 관절이 안 좋아서 그러지 못하는 것을 무척 아쉬워했다. 로렌의 조언을 떠올리자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가셨다.

미오는 사탕을 까서 입에 밀어 넣었다. 레몬 향이 입 안 가득 번지자, 경직되었던 어깨도 느슨해졌다. 하지만 그녀에게 주어진 평화는 아주 짧았다.

“누가 여기를 쓰라고 했지?”

파우더 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은 한 패거리의 여인들이었다. 다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치장을 해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들은 팔짱을 낀 상태로 미오 주변을 동그랗게 둘러쌌다.

“이곳은 우르체카 공국이 아니니까, 얼른 나가 봐. 내가 쉬어야겠으니까.”

불꽃이 새겨진 가면을 쓴 여인의 음성에 미오는 상대가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라비니아 베일.’

베일 백작의 권위를 등에 업은 라비니아가 손짓하자, 그녀의 친구들이 한마디씩 보탰다.

“공국에는 저런 드레스가 유행인가 봐. 10년 전쯤 본 것 같은 디자인 아니야?”

“게다가 티아라나 화려한 보석도 하나 없잖아.”

그들의 노골적인 말은 예전에도 지겹게도 듣던 것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때와는 다른 기분이 들었다.

‘고아에 헌 옷을 입던 그때랑은 조금 달라.’

이 옷은 지오프리가 특별히 맞춰 준 데다, 그가 준 팔찌를 차고 있었다. 게다가 현재 그녀는 서류상이긴 해도 우르체카 대공의 친척이며, 카스피언 공작의 손님이었다.

‘하나 꿇릴 것도 없잖아?’

카우치에 기대 있던 미오가 피식 웃자, 라비니아가 날카로운 음성을 냈다.

“야! 너 지금 웃은 거야?”

“그럼 웃지. 울까요?”

주먹을 어루만지던 미오가 이런 시시한 말장난은 그만두기로 했다.

“망신당하기 싫으면 친구들은 나가라고 해요. 얼굴 보면 한마디도 못 할 사람들이 말이야.”

가면을 썼다고 모르는 사람을 비난하는 행태가 비열했다.

“……뭐?”

“그럼 그냥 말할까요? 쿠키―.”

미오가 독살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자, 라비니아는 몹시 당황했다.

“다들 먼저 나가 있어. 나도 금방 갈 테니까.”

라비니아의 지시에 일행은 모두 나갔고, 이내 파우더 룸에 정적이 흘렀다. 라비니아는 가면을 풀어서 바닥에 패대기쳤다. 그녀의 푸른 눈에 분노가 넘실댔다.

“네가 왜 여기에 있냐고 묻잖아.”

송곳처럼 날카로운 음성이 미오를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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