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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68)화 (68/123)

68화 카스피언 제국 가면무도회 (1)

무도회가 열리는 날이 밝았다. 사흘 전부터 잠을 설친 미오의 피부는 푸석푸석했다. 긴장하지 말아야지 마음먹었는데, 어째서 점점 초조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제부터는 신중하게 행동해야지.’

하지만 어쩐지 사냥 대회 아침과 비슷한 기분에 벌써 후회 비슷한 감정에 젖었다.

“얼른 서둘러야죠!”

하녀 두어 명을 데리고 온 로렌이 아침부터 명랑한 음성을 냈다. 입욕제를 푼 물에 목욕한 후 머리를 꼼꼼하게 말렸다. 그리고 머리를 말기 시작하는데, 이게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뜨겁게 달군 쇠꼬챙이로 머리를 마는데, 방 안에 거북한 냄새가 났다.

“꼭 머리를 구불구불하게 해야 할까요.”

미오가 작게 중얼대자, 로렌이 벽을 가리키면서 고개를 저었다.

“저거 보이죠? 피에르가 그려 준 그대로 꾸밀 거랍니다.”

재단사인 피에르는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정말로 스케치와 같은 드레스를 만들어 냈고, 거기에 어울리는 소품까지 챙겨서 성으로 보내 주었다. 그것으로 부족해서 머리 스타일이나 장갑의 색 같은 사소한 것까지 그림으로 그려서 보낸 것이다.

“간밤에 잠이 안 오는 거 있죠.”

콧노래를 부르는 로렌의 모습에 미오는 기시감을 느꼈다.

‘사냥 대회 때도 딱 저런 모습이었는데…….’

“공작님과 함께 무도회에 참석한다니 어쩜 좋아요.”

수선을 피우는 모습이 꼭 그녀와 지오프리의 결혼식이라도 치르는 사람 같았다.

‘굉장한 일이긴 하죠.’

숲에서 홀로 지낼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니까.

황실에서 주최하는 무도회에 공작의 파트너로 참석하다니 꿈만 같았다.

‘하지만 왜 이렇게 불안한 마음이 들지.’

“우리 공작님께서 정말 오랜만에 참석하시는 무도회거든요. 게다가 파트너를 대동하시는 건 처음이라서 의미가 깊죠.”

이야기하다 말고 가슴이 벅찬지 로렌이 눈가를 손수건으로 찍어 냈다. 점점 커지는 불안감에 미오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의미가 깊다고요?”

“아이, 참!”

로렌은 볼을 붉히면서 무도회 파트너는 주로 약혼자나 배우자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아.”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미오는 입술만 달싹였다. 함께 가는 것 자체에 집중하느라 그런 것은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지오프리의 약혼자처럼 보이면 곤란한데…….’

그녀가 무도회에 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원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지오프리를 위해서가 아니란 말이야.’

그녀의 옆에 서슬 퍼런 지오프리가 버티고 서 있으면 누구랑 눈길을 주고받냐는 말이다. 이런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로렌은 연신 싱글벙글 기분이 좋아 보였다.

* * *

카스피언 공작의 마차가 궁으로 경쾌하게 달리고 있었다. 며칠 쏟아진 비로 가뭄으로 신음하던 들이 푸른빛으로 반짝였다.

“미오. 아무 걱정 말아요. 내가 오늘 옆에 딱 붙어 있을 테니까. 알다시피 나의 영향력이란 정말이지 대단하니까.”

“네. 감사합니다.”

오늘 우르체카 대공은 자기 마차가 고장 났다면서 갑자기 지오프리의 마차에 올라탔다. 그 바람에 지오프리 옆에 앉은 우르체카 대공이 찰싹 달라붙어 앉았다.

건너편에 앉은 미오는 불편한 시선을 간신히 갈무리했다. 건장한 남자 둘이 앉기에는 턱없이 좁은 터라 두 사람의 허벅지는 거의 맞닿아 있었다. 짜증을 감추지 못하는 지오프리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파여 있었다.

“그나저나 내가 사 준 드레스를 입는 게 더 좋았을 것 같은데……. 물론 오늘 차림도 미오에게 퍽 잘 어울리지만 말입니다.”

미오는 레이스가 여러 겹으로 둘러싸인 하얀 드레스를 입었다. 가슴과 소매에 자잘한 진주 장식을 달아 마무리한 드레스는 그녀의 은발을 더욱더 신비롭게 만들었다. 소매가 아주 짧아서 어깨와 긴 팔이 드러나는 디자인은 미오의 가냘픈 몸매를 잘 드러냈다. 아침부터 로렌이 고생해 준 덕에 하나로 말아 올린 머리는 자연스럽고 우아해 보였다. 귀 옆으로 구불구불한 애교머리가 귀엽게 삐져나와 있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은근히 커플 의상이잖아.’

어깨에 달린 장식이 지오프리의 크라바트와 같은 형태라서 유심히 보면 두 사람이 맞춰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뒤늦게 그것을 깨달은 그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런 건 처음인데, 하필 지오프리와 함께라니…….’

어깨에 달린 리본을 만지작대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가 지오프리와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가 미오의 얼굴을 강하게 응시했다.

“공작. 사람 차별이 심한 거 아닙니까?”

대공이 큰 소리를 내는 바람에 미오와 지오프리의 묘한 기류가 깨어졌다.

“대공 각하,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새 드레스를 입은 미오는 그렇게 봐 주고, 나는 왜 안 봐 주십니까?”

알렉세이는 오늘 머리처럼 붉은 재킷에 샤프카라는 털로 만든 모자를 썼다. 털모자에는 붉은 보석이 장식되어 있는데 그는 연신 보석의 표면을 만지작대면서 투덜거렸다.

“…….”

마차 안의 어색한 공기가 더욱더 꽉 차올랐다.

‘이러다 숨을 못 쉬겠어.’

지오프리는 왜 그런지 잔뜩 화가 났고, 대공은 심통이 났으니까 말이다.

슬쩍 눈치를 살피던 미오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대공 각하. 오늘 굉장히 멋지세요.”

대공의 입이 헤벌쭉해지더니 곧 방긋 웃었다.

“특히 어디가 그런지 알 수 있을까요?”

듣고 싶은 말을 해 줬지만, 대공은 역시 쉽지 않았다. 미오는 조금 우물쭈물하다 입을 뗐다.

“모자가 굉장히 독특하고, 붉은색이 잘 어울리세요.”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모두 알아줬군요. 당신은 정말 천사예요. 미오. 빨리 우르체카 공국에 데려가고 싶군요.”

알렉세이의 말에 창밖만 응시하던 지오프리가 주먹을 꽉 쥐었다. 손목에 불거지는 핏줄을 확인한 알렉세이가 싱긋 웃었다.

“오늘 첫 춤은 나랑 추는 게 어때요? 미오. 나는 그랬으면 좋겠는데…….”

이제 아예 두 손으로 턱을 받친 대공이 미오를 향해서 눈을 반짝였다.

‘걸핏하면 우르체카 공국에 가자는 이야기네.’

그는 틈만 나면 우르체카 공국이 얼마나 아름답고 살기 좋은지에 대해서 늘어놓았다. 분명 그녀가 마음에 들어 할 거라고.

하지만 미오는 새로운 곳을 여행하는 것이나 춤에는 전혀 관심 없었다. 그녀는 차마 전하지 못하는 마음을 속으로 읊조렸다.

‘대공 각하, 미안하지만 무도회에 가면 우리는 모르는 사람인 거예요.’

최대한 이 두 남자에게서 떨어진 다음에 그녀의 이상형을 찾아볼 작정이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기분으로 임해야 했다.

‘희망찬 미래라는 건 분명 있겠지?’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녀의 시선은 창 너머 풍경을 감상하는 지오프리에게 죄다 가 있었다.

그의 숨소리와 은은하게 풍겨 오는 체향, 가끔 턱을 쓸어내리는 기다란 손가락, 깜빡대는 속눈썹을 지켜보는 게 좋았다. 지오프리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처지인지.

그렇게 지오프리를 훔쳐보는 사이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우르체카 대공은 창에 그의 모습을 비춰 보더니 기겁했다.

“이런, 꼴이 엉망이군. 나는 머리와 의상을 조금 손봐야 할 것 같군. 금방 끝내고 입구로 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 줘요. 미오.”

“……네.”

우르체카 대공이 내린 후 마차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지오프리는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주름진 드레스를 펼친 미오가 작은 목소리를 냈다.

“공작님. 도착했어요.”

“……음.”

도착했는데 내릴 생각을 하지 않는 지오프리를 보면서 미오가 이마를 찌푸렸다. 그는 또다시 미오를 강하게 응시했고, 지오프리의 시선에 그녀는 괜히 작은 손가방 끈을 매만졌다.

“팔을 내밀어 봐.”

“……?”

놀란 눈을 한 미오가 가만있자 지오프리가 팔을 뻗어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품에서 꺼낸 것을 그녀의 팔에 둘러 줬다. 미오는 손목에 채워진 진주 팔찌를 보면서 의아한 눈을 했다.

‘이런 걸 왜…….’

지오프리는 고개를 숙인 채 팔찌를 매만지는 미오의 동그란 머리꼭지를 보면서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이 마음을 뭐라고 해야 할까.’

지오프리 카스피언은 세상에서 인간을 가장 불신했다. 그와 어머니 앞에서 심장이라도 내어줄 것처럼 굴던 사람은 한순간에 안면을 몰수했다.

‘인간의 믿음이란 퍽 얄팍한 감정이다.’

황태자의 자리에서 밀려나 전장에서 매일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다.

‘권력이란 얼마나 덧없던가.’

그는 황태자나 황제의 자리에 아무런 욕심도 없었다. 하지만 덧없는 권력을 손에 넣어야만 했다.

‘힘이 없는 것들은 져 버리고 마니까.’

그를 지키기 위하여 희생한 어머니 생각을 하면 살아 있는 것이 죄스러웠다. 동시에 어머니가 지켜 준 지금의 삶을 그리 허무하게 저버릴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반드시 권력의 정점에 서서 나와 어머니를 비웃던 자들에게 웃어 보이겠습니다.’

셔츠 아래 손목에 뜨거운 기운이 감돌았다. 모든 문제는 카스피언 제국의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늑대가 세운 제국은 늑대의 손에 멸망할 것이다.

늑대 수인이 처음 만들었다는 카스피언 제국에는 더는 늑대 수인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카스피언 황족의 피에는 늑대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들 했고, 언젠가 늑대 수인이 나타날 거라는 불길한 예언이 있었다.

‘지오프리, 사랑하는 내 아들. 어미는 어차피 병들어서 오래 살지 못한다고 했으니까.’

지오프리의 어머니는 황제의 부정으로 마음에 중병을 얻었다. 그리고 타들어 가는 심장은 몸을 쇠약하게 했다.

‘정략혼이었지만, 나는 진심으로 그를 사랑했단다. 그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아. 다만, 이렇게 끝을 맺는 것이 씁쓸하구나. 너를 지켜 주지 못하는 것도 한스럽고.’

병든 황후는 부디 지오프리가 어떤 원한도 품지 않고, 평범한 삶을 살기를 소원했다.

‘가슴에 독기를 품으면 인생이 불행해진다. 지오프리.’

하지만 그는 이미 독기에 잠식된 지 오래였다.

그리고 복수에만 집착하던 그때, 눈앞에 여인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처음에는 당연히 그녀를 믿지 않았다. 지금도 믿느냐고 물으면 확신은 없었다. 다만 미오는 황후나 벤과 다른 존재일 거라는 믿음은 있었다.

‘죽지 마. 지오프리.’

그와 한 침대에서 잠들었던 밤 미오는 밤새 그렇게 중얼거렸다. 카스피언 제국에는 온통 그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뿐이었다.

‘죽지 말라고 해 준 건 네가 유일하다.’

처음으로 가지고 싶은 것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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