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이름 붙이지 못하는 마음
비가 와서 내내 방에만 있었더니 온몸이 근질거렸다. 망토를 덮어쓰고라도 정원에 나가 보고 싶었다.
‘뒷문으로 조용히 나가야겠어.’
누군가 그녀를 본다면 몸에 좋지 않다고 산책을 막을 게 분명했으니까.
층계를 내려와서 막 몸을 틀려고 하는데, 커다란 상자를 든 고용인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상자 뒤에서 비를 흠뻑 맞은 한 남자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미오, 내가 보고 싶어서 마중을 나온 거군요?”
전혀 아닌데?
비 맞은 어깨를 털어 내던 그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이리 와요.”
그녀를 안으려는 대공을 피해서 미오가 먼저 허리를 숙이자, 그가 울상을 지었다.
“우리 사이에 그런 인사는 옳지 않아요.”
우르체카 대공은 벌린 팔을 내리지 않았고, 주변의 고용인들은 그들을 힐끗힐끗 훔쳐봤다. 하는 수 없이 미오가 어정쩡하게 그의 품에 안겼다.
“우리는 사촌이잖아요. 안 그래요? 미오.”
그녀를 꼭 안은 대공이 아주 작게 속삭였다.
“하하. 그렇죠. 사촌.”
“오늘도 무척 아름답군요. 미오.”
방에서 종일 뒹굴뒹굴하다 검은 망토를 덮어써서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는데…….
‘그래도 아름답다는 말은 듣기 좋아.’
처음에는 이런 찬사를 들을 때면 속이 거북했는데, 자꾸 들으니까 제법 익숙해졌다. 그의 품에서 벗어난 미오가 망토의 모자를 뒤집어쓰면서 답했다.
“대공 각하도 멋지세요.”
이 말을 재빨리 해 주지 않으면 대공은 끝도 없이 미오에게 찬사를 늘어놓으리라. 귀는 요정 같다는 둥, 그녀의 눈에 달이 담긴 것 같다는 둥, 손발이 오그라드는 그런 말들 말이다.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제법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인데, 그렇죠?”
“……네.”
가깝지 않다고 하면 그녀를 귀찮게 할 게 뻔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답했다. 미오의 답이 만족스러웠는지 다시 한번 가볍게 그녀를 안아 주었다. 그러더니 대공이 신나게 입을 뗐다.
“내가 뭘 가지고 온 줄 알아요? 이럴 게 아니라 응접실에 가서 이야기하도록 하죠.”
대공이 손뼉을 치자 고용인 두 명이 작은 상자를 여러 개 꺼내 들었다. 상자를 마주 보고 앉았는데, 대공이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얼른 열어 봐요.”
“……네.”
“진짜 심혈을 기울여서 고른 거랍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요.”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상자는 풍성한 리본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흡사 반지나 목걸이가 담겨 있을 것 같은 아름다운 상자였다.
‘설마 아니겠지.’
하트로 변한 대공의 눈을 무시한 채 조심스레 리본을 풀었다. 거기에는 보석 대신 말린 고기가 쿠키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다행이랄까.
긴장이 풀린 미오는 선물을 보면서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굉장히 맛있을 것 같아요.”
“우르체카의 장인이 만든 거라서 더 맛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한테 이렇게 잘해 주시니까―.”
“그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나는 오랜만에 아주 즐거우니까.”
알렉세이 우르체카는 연신 싱글벙글한 표정이었다.
“얼른 맛을 봐요. 미오.”
“나중에―.”
미오가 사양하자 대공은 직접 입에 넣어 줄 것처럼 굴었다. 그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장인이 만들었다는 간식을 맛보았다. 별로 내키지 않았는데, 막상 간식을 입에 넣자 눈이 동그래졌다.
“카스피언의 음식과 다른 느낌이에요.”
간이 조금 더 셌는데, 그게 그렇게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식욕을 돋우는 느낌이었다. 미오가 퍽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자 대공은 그제야 목에 감고 있던 스카프를 풀어 내렸다.
“그나저나 보고 싶었습니다. 미오.”
대공의 그윽한 음성에 미오는 씹고 있던 말린 고기가 그대로 목에 걸려서 캑캑거려야 했다.
사무엘이 제때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면 아마 몇 시간은 대공에게 붙잡혀 있을 뻔했다. 간신히 그에게서 벗어난 미오가 툴툴댔다.
‘나한테 왜 자꾸 잘해 주는 거야.’
대공은 좀 부담스러운 성격이기는 했지만, 밉지는 않았다.
‘아무렴. 나를 죽이려고 드는 사람도 있는데, 선물 세례를 퍼붓는 이를 미워할 수야 없지.’
말없이 사무엘의 뒤를 따라서 온 곳은 공작의 집무실에 딸린 응접실이었다. 아무도 없는 내부를 훑어본 미오가 의아한 눈을 하자 사무엘이 앉을 것을 권했다.
“잠시 기다리면 공작님이 금방 오실 겁니다.”
“그런데 공작님은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나요.”
미오의 물음에 사무엘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미오 님을 모셔 오라고만 했습니다.”
“참! 내일 사무엘 님도 함께 가는 거죠?”
미오는 오늘이 무도회 전날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래서 슬쩍 그에게 한쪽 눈을 찡긋댔다. 그와 자주 대화를 나누었더니 사무엘이 제법 편하게 느껴졌다.
“네. 저도 참석하게 되었답니다.”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사무엘이 얼굴을 잔뜩 붉혔다. 뽀얀 피부 위에 떠오른 홍조가 어쩐지 돌봐 주고 싶은 느낌이라서 미오가 씩씩하게 입을 뗐다.
“내일 공작님은 제가 잘 보필할 테니까 사무엘 님은 괜찮은 분이 있는지 찾아보는 거예요. 알겠죠?”
“제가 말주변도 별로 없고 해서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없는지 고개를 푹 숙이는 사무엘을 보면서 미오가 싱긋 웃었다. 그녀보다 나이가 많지만 제법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사무엘 님은 성격도 좋고 얼굴도 잘생기셨으니까 분명 인기가 많을 거예요.”
그녀의 칭찬에 사무엘의 얼굴이 더욱더 붉어졌다. 그때 응접실 입구에서 누군가 인기척을 냈다.
“내가 두 사람을 방해한 건가?”
어쩐지 평소보다 더 차가운 얼굴의 공작이 사무엘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말씀을요. 저는 그냥 공작님 말씀대로 했을 뿐인데요.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본능적으로 주인의 심기가 불편한 것을 감지한 사무엘이 뒷걸음질 치는가 싶더니 곧 자취를 감추었다.
두 사람만 남자 괜히 어색해진 미오가 싱긋 웃었다. 하지만 지오프리는 이번에도 그녀의 애교를 대놓고 무시했다.
‘또, 또 왜 저래.’
말도 없이 그녀를 향해서 걸어오는 그의 모습이 꼭 짐승 같았다. 소파에 앉아 있던 미오가 긴장감으로 등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사이에 지오프리가 한 바퀴 돌아서 그녀가 앉은 소파의 등받이를 꽉 움켜잡았다.
“……아직 포기하지 않은 건가?”
몸을 숙인 그가 미오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낮게 잠긴 지오프리의 음성에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잘못한 일도 없는데, 왜 또 시비야.’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그러자 지오프리의 커다란 손이 이내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짓눌렀다. 다분히 감정이 실린 손길에 미오가 작게 신음을 뱉었다.
“……아파.”
“사람이 말을 할 때는 말이야.”
미오는 조금 억울했다.
눈을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그가 건너편 소파로 오는 게 더 빠를 텐데. 하지만 지금 그런 말을 하기에는 때가 좋지 않았다.
‘아프니까 내가 한번 봐주는 거야.’
미오가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녀의 목이 지오프리의 손목을 스쳤고, 두 사람은 드디어 눈을 마주했다.
“……아.”
지오프리는 평상시와 다른 차림이었다.
검은 테일 코트에 풍성한 크라바트를 맨 그의 얼굴은 우중충한 실내에서도 빛을 발했다.
‘살이 빠지는 바람에 눈빛이 더…….’
크고 깊은 눈매가 밤하늘을 품은 것처럼 고혹적인 빛을 냈다.
“그렇게 잘생겼나, 내가?”
뻔뻔하고 재수 없는 질문이었다.
당연히 화를 내야 했지만, 그의 눈부신 자태에 미오는 화내는 것도 잊었다. 그녀가 지오프리의 날카로운 턱선과 붉은 입술, 깊은 눈매를 뚫어지게 응시하자 그의 여유로운 표정이 미세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흠, 흠.”
시선을 먼저 거둔 지오프리가 그녀의 건너편으로 걸어갔다.
“무도회에서 입을 의상이 완성되었다고 해서 불렀다.”
여전히 멍한 얼굴의 미오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지오프리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완벽하구나.’
검은 부츠 위로 길고 날렵한 다리를 감싸는 크림색 바지 . 잘록한 허리를 감싼 벨트와 뒤가 살짝 더 긴 코트는 지오프리의 미모를 돋보이게 했다. 한참 멍하게 그의 연미복을 감상하던 미오는 뒤늦게 입가를 훔쳤다.
‘저 수상한 미소는 뭐야.’
의구심이 피어올랐으나 미오는 여전히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 미오를 지켜보던 그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내 파트너에게 가장 먼저 보여 주고 싶었거든.”
“……네?”
다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는 그의 말에 미오는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지오프리가 그녀에게 반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은 이제 그만하기로 했는데, 지금 그의 낮은 음성을 듣노라면 그게 절대 착각이 아닌 것 같았다.
‘왜 나한테 제일 먼저 보여 주고 싶었다는 거지.’
그만큼 미오가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입 안의 침이 죄다 마르고,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응접실을 가득 메운 그의 짙은 체향까지 느껴지자 소파에 앉아서 마차를 타는 기분이었다.
그때 지오프리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싱긋 웃었다.
“고칠 곳이 있으면 이야기해 달라고 부른 거였는데, 반응을 보니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군.”
“……아.”
달아오른 볼을 부여잡고 있던 미오의 두근대는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이 바보.’
완성된 옷의 수선할 부분을 찾을 요량으로 그녀를 부른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또다시 들떴던 것이 부끄러워져 미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오늘 일찍 자 두도록 해.”
지오프리는 짧은 인사를 남긴 후 그녀의 옆을 재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저벅저벅 울리는 그의 발소리에 미오는 곧장 고개를 푹 숙였다.
‘진짜 얼굴을 못 들겠어.’
늦은 오후, 내리는 비가 연신 창을 시끄럽게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