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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66)화 (66/123)

66화 마음을 두드리는 것은 또 다른 마음이다

계획대로라면 짠, 하고 나타나서 무도회에 함께 가 주려고 했는데, 일이 약간 꼬여 버렸다.

‘왜 대공과 지오프리 중에 선택하는 모양새가 된 거지.’

만일 그녀가 거절한다면 지오프리는 화를 낼까. 상처를 받을까.

갑자기 떠오른 이상한 질문에 미오는 그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남은 심각한데, 지금 웃음이 나와?”

그때 그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와서 미오의 드레스 사이로 무릎을 밀어 넣었다. 그 바람에 그녀는 더는 물러설 곳 없이 벽에 기대게 되었다.

‘또 어지럽다고 할 셈이야?’

창백한 얼굴을 보자니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빨리 대답을 해 주고 이곳을 벗어나야 해.’

조금만 더 같이 있다가는 심장이 너무 뛰어서 앙겔라스도 알게 될 것이다.

“크나큰 영광입니다. 공작님.”

최대한 정중해 보이려고 애쓰면서 단어 하나하나를 고심해서 답했다. 너무 기뻐 보이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기분이 나빠 보여서도 안 되니까.

그녀가 무도회에 함께 가겠다고 답하자 지오프리가 그제야 다가오는 것을 멈추었다.

“정말 다행이야.”

“…….”

지오프리의 얼굴에 작은 만족감이 스쳤다. 그는 허리를 곧추세운 채 미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돌아가서 차를 즐기면 좋겠군.”

방금과는 다른 느긋한 음성에 미오는 입술을 살짝 짓씹었다.

‘뭐야. 얼굴이 두 개인 것도 아니고…….’

그렇게 보채더니 이제는 다시 오만한 얼굴로 돌아온 게 아닌가.

정말이지, 알 수 없는 남자가 분명했다.

* * *

“무도회라니 정말 꿈만 같은 일이네요. 이제야 공작님이 돌아오신 게 실감 나는 거 있죠. 사실 사냥 대회는 처음부터 내키지 않았거니와 주인님이 크게 다치셔서 생각하기도 싫어요.”

로렌은 사냥 대회 때 지오프리가 보름 넘게 돌아오지 않았던 일을 언급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나저나 라비니아 아가씨께서 큰 도움을 주셨는데, 카스피언 공작 성에서 그런 불미스러운 일만 겪으셔서 마음이 쓰이네요.”

“아, 무슨 일이 있었나 보네요.”

팩을 올린 채 가만 누워 있던 미오가 입을 뗐다. 얼굴을 움직이지 말고 있으라고 주의를 들었지만, 라비니아를 생각하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뱀을 보고 기겁하는 얼굴을 못 봐서 아쉽지 뭐야.’

라비니아는 운이 좋기도 했다.

독사였는데 물리지 않았으니까.

재회의 인사를 제대로 못 한 것 같아서 영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혼자 피식대자 로렌이 툴툴거렸다.

“자꾸 움직이면 얼굴에 주름이 진다니까요. 공작님이랑 함께 갈 수 있어서 가만있어도 웃음이 나고 그렇죠? 한창 좋을 때라니까요.”

“……힛.”

꿀을 덧발라 주는 로렌에게 그녀는 실없이 웃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요즘 들어서 이상한 일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어요. 성에 뱀이나 벌이 나오질 않나, 공작님이 데려왔다는 작은 개도 사라진 거 있죠. 정말 작고 귀여운 개였는데, 어디 가서 굶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쯧.”

고개를 갸웃하던 로렌이 그녀의 얼굴에 얇은 천을 올리고 다시 꿀을 덧발랐다.

‘사라진 게 아니라 눈앞에 있는데요.’

로렌의 걱정에 괜히 가슴이 뭉클해진 미오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친해지지 않으려고 했는데, 여우로 있을 때는 인간 미오를 걱정해 주었다. 그리고 지금은 또 여우인 미오를 염려해 주는 것이다.

“카스피언 무도회는 처음이라 많이 떨리죠? 그래서 걱정 많은 거 잘 아는데, 자꾸 울면 얼굴이 못나져요. 무도회는 아무 걱정 하실 게 없어요. 우리 주인님이 춤을 아주 잘 추시니까.”

“……아.”

춤 생각을 하자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어쨌거나 앞으로 춤을 추고 싶을 때 나한테 이야기하도록.’

그때 사무엘과 춤을 추는데 쳐들어온 지오프리가 무섭게 굴었었다.

‘그와 춤을 추는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 생각을 하자 한숨이 절로 났다.

“그러고 보니 오늘 재단사가 성을 방문하는 날이네요. 아휴. 얼마 만에 드레스를 지어 보는지 내 가슴이 왜 이렇게 뛰나 몰라요.”

“……네? 드레스라뇨.”

“모르셨군요. 공작님이 특별히 새로 지으라고 명하셨답니다. 당연한 일이죠. 지금 아가씨 옷장에는 무도회에 입고 갈 만한 드레스는 없으니까요.”

사실이긴 했지만,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그에게 신세를 더 지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슬슬 정리해 볼까요.”

무도회 참석을 앞두고 로렌은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지 연신 콧노래를 불렀다.

재단사를 만나는 일은 난생처음이었다.

원래 그녀는 저렴한 옷을 몇 벌 사서 내내 돌려 입었다. 멋 부리는 데 딱히 취미도 없었고, 재주도 없었다. 이곳에 와서는 카스피언 공작 성에 원래 있던 여벌의 드레스를 얻어 입어서, 새 옷을 지을 필요가 없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피에르라고 합니다.”

전체적으로 마르고 키가 큰 재단사는 목에 줄자를 건 채 다채로운 색상의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그는 줄자로 미오의 치수를 재더니 꼼꼼하게 기록했다.

“일단 풍성한 스타일보다는 가냘픈 몸매를 부각할 만한 디자인이 좋을 것 같군요.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혼잣말을 연신 하던 그는 곧장 화첩에 연필로 무언가를 그렸다. 미오는 이런 일에 경험이 없어서 멀뚱멀뚱 서서 그를 지켜만 봤다.

“금방 끝난답니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의외의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카스피언 공작님을 뵙습니다.”

공작의 등장에 재단사는 곧장 예를 갖추었고, 지오프리는 그가 그리고 있는 디자인 쪽으로 다가섰다.

“나쁘지 않군. 치수는 쟀으니까 무도회용으로 서너 벌, 일상용으로 서너 벌 정도 지어서 이곳으로 보내도록.”

“여부가 있겠습니까. 어울리는 구두와 소품까지 갖추어서 완벽하게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미오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공작님. 저 드레스 한 벌만―.”

그녀의 말에 지오프리가 사나운 눈빛을 보내서 말을 채 맺을 수 없었다.

‘왜 화를 내는 거지?’

드레스를 짓는 데는 돈이 많이 들었다. 어쩌다 보니 카스피언 공작 성의 재정에 대해서 알게 되어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원작에서는 지오프리가 절대 권력의 소유자에 엄청난 재력가라고 했는데, 현실은 사정이 달랐다.

‘이래서 책은 제대로 끝까지 읽어야 하나 봐.’

요즘 그녀가 보는 지오프리는 약간 측은한 구석이 있었다.

‘다쳐서 엄청 아픈 데다, 황태자가 시시때때로 죽이려고 드니까.’

그것은 그녀가 직접 목격한 것이라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우리로 치면 몰락한 양반가의 자존심만 센 도련님 정도일까.’

엄청 거만하게 굴기는 해도 다정한 구석이 있었고, 그리 모질지도 못했다. 성의 고용인과 그의 관계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사무엘에게 늘 호통을 치는 것 같아도 공작이 누구보다 그를 아낀다는 것이 드러났으니까.

‘로렌의 잔소리에 인상을 쓰기는 해도 한 번도 싫다는 소리 하는 걸 못 봤어.’

게다가 집사의 말이라면 언제나 이유도 묻지 않고 도장부터 찍어 주었다.

‘내가 정말 지오프리를 완전히 잘못 알았던 걸까.’

처음 그녀의 머릿속 지오프리는 갑옷을 두른 채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미친놈이었다면, 지금 그는 기침만 하면 피를 토하는 병약한 미남에 가까웠다. 그런 주제에 자존심은 누구보다 센, 고결한 그런 남자 말이다.

‘내가 지금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사람이 많이 있는 곳에서 홀로 망상에 빠지다니.

그녀는 얼른 사방을 살폈다.

“재단사는…….”

“한참 전에 갔지. 도대체 뭘 하느라 아무리 불러도 대답도 안 한 거지?”

“……그게.”

차마 당신이 하얀 가운을 입고 피 토하는 처연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공작님과 무도회 갈 생각을 하니까 가슴이 떨려서요.”

정답에 가장 가까운 답을 내어놓은 그녀가 활짝 웃었다. 그러자 그 환한 미소를 마주한 지오프리가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어쩐지 바보 같군.”

애교를 떨었다가 거부당한 미오는 남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진짜 저놈의 성격.’

* * *

무도회가 열리기 사흘 전부터 비가 내렸다. 방에 꼼짝없이 갇힌 미오가 창을 활짝 열어 둔 채 비 냄새를 맡고 있었다. 숲에서 지낼 때는 비가 그렇게 싫더니,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듣는 것은 제법 운치가 있었다.

“굴에서 덜덜 떨고는 했는데…….”

그녀가 어설프게 판 굴에는 늘 비가 스며들었다. 운이 나쁠 때는 굴이 완전히 무너지기도 했다. 한밤중에 급히 달아나는데 서러워서 울기도 했었는데…….

손을 뻗어서 빗방울을 튕기는데, 한숨이 절로 났다.

“하지만 이 상태가 영원한 게 아니니까…….”

여전히 그녀의 인생은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과 같았다. 그때 비를 뚫고 카스피언 공작 성으로 짐이 한가득 실린 마차가 줄줄이 들어왔다.

“또 뭐지.”

손을 안으로 거둔 미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새로 와서 좋은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저렇게 라비니아가 나타나서는 그녀를 죽이려 했으니까.

‘그나저나 라비니아도 무도회에 오겠지.’

공작의 파트너로 그녀가 온 걸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때 독을 먹인 이후로 얼굴을 본 것은 한 번도 없었다.

“그나저나 벌한테 쏘인 건 좀 가라앉았을까.”

꼭 가라앉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다시 라비니아가 무도회에 참석할 테니까…….

“뱀이나 벌은 너무 유치해.”

그녀를 죽이려고 들었던 사람에게 하는 복수치고 너무 약했다.

“그만 괴롭히고 확 죽여 버릴까?”

손가락을 펼쳐서 창의 유리를 문질러 대던 미오가 긴 한숨을 쉬었다. 아마 그녀가 죽여도 상대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런 악독한 짓을 했으니까.

‘누가 날 비난하겠어.’

창을 닫으면서 등을 돌린 미오가 혼자 중얼댔다.

“방심은 한 번으로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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