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어제와 다른 오늘 (3)
지오프리와 함께 도착한 곳은 앙겔라스가 있는 한적한 후원이었다. 아픈 이마를 문지르는데 지오프리의 등장에 덩치가 큰 개가 몸을 납작 엎드려서 꼬리를 사정없이 흔드는 것이 보였다.
‘저러다 꼬리가 진짜 떨어지겠어.’
팔짱을 낀 미오가 뒤에서 지켜만 보는데 그가 팔을 잡아끌었다.
“이리 와.”
“저는 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게다가 저 개는 너무 크고―.”
미오가 뒤로 몸을 물리려는데, 앙겔라스가 먼저 그녀를 알아봤다. 첫 만남에서는 그녀를 잔뜩 경계했었던 것 같은데, 오늘은 달랐다. 냉큼 다가온 앙겔라스가 혀로 미오의 구두를 핥았다.
“왜 이래!”
놀란 미오가 질색하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오프리가 수상하다는 듯이 중얼댔다.
“앙겔라스는 나만 따르는 줄 알았는데…….”
그의 의미심장한 말에 미오가 뒤로 물러서면서 앙겔라스를 날카롭게 노려봤다.
‘외형은 달라졌어도 냄새로 기억하는 거야?’
미오가 왼쪽으로 움직이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그쪽으로 따라왔다. 드레스를 살짝 물고 늘어져서는 몸을 납작 엎드리는데 미칠 노릇이었다.
‘야! 저리 가! 저리 가라고!’
하지만 앙겔라스는 그녀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외면하는 게 오히려 어색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혼자 있어서 심심해서 그런가 봐요. 이걸 해 달라는 걸까요.”
미오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커다란 나뭇가지를 주워서 세차게 던졌다. 그녀의 몸짓에 흥분한 개는 펄쩍펄쩍 뛰더니 곧장 나뭇가지가 날아간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때 바람이 불더니 털 한 뭉치가 둥실 떠올라서 후원을 떠돌아다녔다. 반짝이는 은색 털이었다.
‘아, 갑자기 저게 또 왜 날아다녀.’
미오는 얼른 그녀가 있던 곳에 가서 지오프리가 눈치채지 못하게 발로 털 위에 흙을 덮었다. 털이 얼마나 빠져 댔는지 사방이 그녀의 털투성이였다. 손으로 부유하는 털을 잡아채는데, 그녀의 위로 길게 그림자가 늘어졌다.
“뭘 하는 거지?”
“의원이 이렇게 팔을 쭉쭉 뻗어 주면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요.”
바로 앞에 선 지오프리를 향해서 어색하게 웃으면서 그녀가 팔을 휙휙 돌렸다.
“참, 오늘 보자고 한 건 말이야.”
시간을 돌고 돌아서 드디어 본론인가.
“말씀하세요. 공작님.”
하지만 지오프리는 말없이 자꾸 그녀를 향해 다가섰다. 음산한 표정의 그를 피해서 미오는 자연스레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등에 벽이 닿았고, 이제는 물러설 데가 없었다.
‘거기서 말하면 어디가 덧나?’
“나한테 할 말 없나?”
“……네?”
그가 한쪽 팔을 벽으로 뻗은 터라 미오는 구석에 완전히 몰렸다. 지오프리의 질문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설마 내 입으로 여우 수인이라는 걸 고백이라도 하라는 걸까.’
그녀는 죽으면 죽었지 그러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몸이 안 좋은데 돌아가는 게 어떨까요.”
미오는 애써 그를 위해 주는 척 바닥을 살폈다. 그녀의 눈에 지오프리의 기다란 다리와 두 사람의 구두 끝이 맞닿은 것이 보였다. 바람이 불어서 그의 바지가 나풀대자 발목이 살짝 드러났다.
‘잘생겨서 발목만 봐도 심장이 뛰네.’
창백한 얼굴에 붉은 입술, 그윽한 눈매를 될 수 있으면 정면으로 보지 않으려고 애써야 했다.
“내가 뭐라고 했지?”
낮은 울림을 가진 그의 음성에 미오는 큰마음을 먹고 고개를 들었다. 눈을 보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지오프리의 말을 기억해 낸 까닭이었다.
“알렉세이가 그러던데, 무도회에 그와 함께 가기로 했다지.”
“……네?”
대공의 혼잣말을 듣고 무도회를 가야겠다고 계획하긴 했지만, 그와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 인간으로 변한 다음에 그를 만난 적도 없었다.
그때 지오프리의 입에서 깊은 기침이 터졌다. 급히 소매로 가린 다음에 쿨럭대는데 그의 온몸이 심하게 흔들렸다.
콜록콜록.
미오는 서둘러 팔을 뻗어서 그의 등을 두드렸다. 동굴에서 간호하던 것이 몸에 밴 건지 퍽 자연스러웠다.
“그러니까 몸도 안 좋은데 왜 나오셔서…….”
힘들게 치료했고, 사람을 불러서 성으로 보내기까지 했는데 왜 이렇게 회복이 더딘지 모르겠다. 혹시 이대로 그가 죽어 버리기라도 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피가 나요.”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침만 하면 그의 입가에 피가 흘렀다. 미오는 얼른 소매를 들어서 지오프리의 입가를 닦았다. 그는 퍽 깔끔한 편이라서 피나 오물을 묻히는 것을 질색했다. 까치발을 들고 열심히 그를 살피는데, 지오프리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이런.’
동굴에서 약을 먹이다 수도 없이 나누었던 시선이지만, 오늘은 느낌이 사뭇 달랐다. 지금 그녀는 작고 귀여운 짐승이 아니라, 그와 같은 손과 발을 가진 인간이니까.
지오프리를 의식하기 시작하자 심장이 거칠게 동요해 얼른 손부터 치웠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게 나섰네요.”
그녀는 처음에도 그랬고, 지금도 지오프리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를 걱정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복수하려고 접근했으면서 이게 무슨 꼴이람.’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 끝을 말아 쥐려는데, 그의 몸이 천천히 그녀 쪽으로 기울었다.
“……공작님, 제가 사람을 불러올게요.”
“잠, 잠시만.”
그대로 미오의 어깨에 이마를 묻은 지오프리가 힘겹게 속삭였다.
“……아, 정말.”
강한 힘에 밀려서 그녀는 더욱 벽으로 밀려 났고, 미오의 두 팔이 어쩔 줄 모르고 그의 허리 근처에서 멈칫댔다. 이제 두 사람은 꼭 안은 것처럼 보였다.
‘진짜 어쩜 좋아.’
아픈 사람을 두고 이런 생각 하는 것은 진짜 망측한 일이지만, 지오프리의 이마가 어깨에 닿는 순간 미오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진동하던 그의 체향에 오감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계속 여우로 지내다가 이제 간신히 인간의 몸이 되어서인지, 저항하기가 더 어려웠다.
“정말 대공과 함께 갈 건가.”
자기 몸이나 챙길 것이지, 왜 그런 걸 묻는 걸까.
‘공작님을 닮은 아이는 얼마나 예쁠까요.’
순간 로렌의 음성이 귓전에서 메아리치는 바람에 마음은 다시 흐트러졌다.
분명 후원에 바람은 불고 있었다. 여기저기 나부끼는 지푸라기와 털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너무 더워서 숨이 막혀.’
얼굴이 달아올랐고 미오의 등허리로 땀이 주르르 흘렀다. 이런 상태를 들키지 않으려고 숨을 참았더니,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제발 좀 떨어져.’
그는 말없이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가쁜 숨을 내뱉었다. 약한 지오프리의 모습을 보는 것은 싫었다.
‘그냥 평소처럼 오만하게 굴었으면 좋겠어.’
이런 건 너무 낯설었다.
“공작님. 진짜 사람을 불러오지 않아도 되나요.”
간신히 입을 연 미오가 속삭이는데, 그녀의 볼에 맞닿은 지오프리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갑자기 어지러워서 폐를 끼쳤군. 미안하다.”
지오프리가 겨우 몸을 일으켰고, 그녀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다리에 힘을 잔뜩 줘야 했다. 올려다본 그의 얼굴은 한층 초췌해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위태로운 표정에 미오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제가 뭘 하면 될까요.”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뭐라도 도움이 된다면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동굴에서 신음하는 그를 외면하지 못했던 그때와 같았다. 그녀의 말에 지오프리가 창백한 낯으로 속삭였다.
“우르체카 대공 말고 나를 선택해 주지 않겠어?”
“……아.”
묘하게 매달리는 그의 모습에 미오의 눈이 커다래졌다.
‘지오프리가 내게 사정하는 거야?’
기분이 이상해서인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녀는 애써 화제를 바꾸려고 했다.
“하지만 공작님 몸이 아직 낫지 않았잖아요.”
그녀의 말에 지오프리가 그의 입가를 손가락으로 더듬더니 한숨을 쉬었다.
“참석하지 않으면 반역죄로 이 성의 식솔 모두가 처형될지도 몰라.”
“……네?”
미오는 이런 사정은 전혀 알지 못했다. 무도회를 가지 않는 것이 반역에 해당하다니.
“그래서 함께하자고 하는 게 미안하기도 하지만.”
그녀가 위험할까 봐 조심스러워하는 얼굴이 그날 미오를 숲에 데려갔던 밤과 닮아 있었다.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지오프리는 그는 아무도 아니니까, 좋아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했다. 묘하게 상대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는 느낌이었다. 저런 나약해 빠진 지오프리의 얼굴은 정말 꼴불견이었다.
‘하지만 나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야.’
비록 부족한 게 많지만, 자랑스러운 여우 수인이었다. 그녀가 살짝 고개를 저으면서 입을 뗐다.
“얼른 회복하세요.”
“역시 나를 위해 주는 건 그대뿐인가.”
“……아.”
또다시 미오는 과거에 그녀가 했던 말에 발목이 잡혔다.
‘공작님의 팬이랍니다! 팬이랍니다!’
하도 메아리쳐서 귀에 피가 날 것만 같았다.
“건강이라면 상관없어. 어차피 한번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는 게 삶의 이치니까.”
“하지만 쉽게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을 경멸한다고…….”
몇 번이나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건 다른 문제지. 나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어서 하는 말이지만, 그대는 사랑받지 못한다고 목숨을 저버리려고 했으니까.”
“……하. 하.”
새삼스레 지오프리의 눈에 그녀의 존재가 얼마나 이상하게 보이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좋다고 가출해서 막무가내로 그를 안고, 달라붙고, 울면서 호수에 뛰어든 여자.
‘그것뿐인가.’
사냥 대회에 데려가 달라고 조르고, 걸핏하면 그의 침실을 습격하는 도둑고양이가 바로 미오였다.
“그래서 대답은……?”
대답을 종용하는 지오프리의 시선이 그녀의 여린 목을 꺾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