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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64)화 (64/123)

64화 어제와 다른 오늘 (2)

미오의 얼굴에 서린 긴장을 읽은 로렌이 한쪽 눈을 찡긋댔다.

“공작님 만날 생각에 떨려서 그러죠?”

그녀는 손수건으로 얼른 눈가를 정리해 주었다.

“지금이야 믿기 어렵겠지만, 저도 어린 시절에는 꽤 인기가 있었답니다. 공작님 생각만으로 가슴이 벅차고 그렇죠?”

로렌의 말에 미오는 희미하게 웃어 보았다. 엇비슷한 감정이기는 했다. 사랑해서 떨리는 게 아니라 두려워서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침울함을 삼킨 미오가 천천히 입을 뗐다.

“로렌도 연애해 봤어요?”

사실 미오는 연예인이나 좋아해 봤지. 현실에서 누군가를 깊게 사랑해 본 경험이 없었다. 밤새도록 고민해 봤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을 제대로 정의할 수 없었다.

로렌이 빗을 들어서 그녀의 머리를 정돈해 주면서 답했다.

“그럼요. 젊을 때는 매일 데이트를 했답니다. 그때 결혼했으면 지금쯤 손주가 여럿이겠죠.”

과거를 회상하는 로렌의 얼굴은 퍽 행복해 보였다.

“왜 결혼하지 않았어요?”

“우리 아가타 아가씨를 두고 결혼할 수가 없었어요. 사랑이냐, 일이냐.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거든요. 나는 사랑도 좋았지만, 내 일에 최선을 다하는 내 모습이 더 마음에 들었답니다.”

아가타 아가씨를 끝까지 모셨고 그 아드님인 지오프리 도련님까지 훌륭하게 키워 낸 로렌의 얼굴에는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자부심이 서려 있었다. 미오의 눈에 로렌은 그저 친절한 부인이 아니라 멋진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이고, 내가 또 주책을 부렸네요. 이러다 우리 공작님 목이 길어지시겠어요. 얼른 가요.”

탁자 위의 부채를 쥐여 준 로렌이 미오의 등을 떠밀었다.

* * *

유리 정원은 평소 누구도 출입할 수 없는 공작의 전용 공간이었다. 처음 가 보는 정원으로 향하는 길이 꼭 사형대로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로렌이 연신 날씨가 좋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다 왔어요.”

“……네.”

유리 정원은 말 그대로 유리로 만들어진 작은 온실이었다. 햇볕을 받아서 반짝반짝 빛을 내는 게 꼭 커다란 보석처럼 보이기도 했다.

“얼른 들어가 보세요. 공작님이 기다리실 겁니다.”

로렌은 마치 오늘 공작이 미오에게 청혼이라도 한다고 생각하는지, 몹시 흥분한 얼굴이었다.

“다녀올게요.”

로렌에게 인사를 건넨 그녀가 온실의 문을 열자 포근한 실내 공기가 피부에 와 닿았다. 일 년 내내 찬 바람이 부는 카스피언 제국과는 너무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저런 나무와 꽃은 숲에서 본 적이 없어.’

키가 크고 굵은 나무에는 주황색 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고, 나무 몸통을 타고 덩굴이 친친 감겨 있었다. 지나치게 훈훈한 공기에 숨통이 죄어 오는데, 모퉁이를 돌자 지오프리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정원에 무엇을 심었는지 한 손에는 기다란 삽을 쥔 채였다. 걷어붙인 소매 아래로 근육이 불거진 지오프리의 팔뚝이 보였다.

‘이대로 그냥 달아날까.’

걸어온 길을 슬쩍 돌아보려는데 발이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지오프리의 낮은 음성이 들렸다.

“이리 와.”

그가 삽을 땅에 질질 끌더니 의자에 턱 하고 걸터앉았다.

달아날 기회를 잃은 미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에 앉는 데 다리가 천근만근이었다.

“왜 그렇게 긴장하지?”

“……그게.”

그걸 몰라서 묻는 건가.

그녀는 여우 수인이고, 그에게 들켜 버렸을지 모르니까 긴장하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어제 입술도…….’

생각하지 않으려 고개를 세차게 흔드는데 목덜미가 발그스레해졌다. 긴장감에 드레스를 꽉 잡고 비트는데, 손을 씻은 지오프리가 손수건에 물기를 닦아 냈다. 그러고는 곧 레몬을 띄운 물을 건넸다.

“긴장 풀어.”

“……네.”

떨리는 손으로 크리스털 잔을 받아 드는데 얇게 저민 레몬이 흔들렸다. 정신없이 목을 축이는데 입술 사이에 레몬 조각이 걸렸다.

“……푸.”

꼴사납게 손가락으로 레몬을 떼는데,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해.’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그녀는 그가 빨리 용건을 밝혔으면 했다. 하지만 여전히 무감한 표정의 지오프리는 양손을 깍지 낀 채 그녀를 응시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그의 입술이 드디어 움직였다.

“돌아오는 길은 힘들지 않았나.”

“……그건.”

지금 지오프리의 반응은 진짜 모호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너는 여전히 카스피언 공작 성의 귀한 손님이니 편하게 지내도록 해.”

언제부터 그렇게 대접을 해 줬다고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걸까. 매번 그녀를 믿지 못해서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못했으면서.

“……그게 무슨 말…….”

“달라지는 건 없다는 말이다.”

미오는 그의 말을 듣고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거야?’

입만 벙긋대는 미오를 향해서 그가 가볍게 웃었다.

“사실 어제 일을 그렇게 부끄러워할 것도 없지 않나? 처음도 아닌데…….”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그의 음성에 미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웃는 얼굴이 더 무섭다는 걸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지금 지오프리의 표정은 정말 살벌했다.

“어제 일은 제가―.”

거짓말도 한두 번이지, 입이 잘 떨어지지도 않았다. 미오가 말을 머뭇대자 그가 가득 찬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대는 나의 열렬한 팬이 아니던가?”

인제 와서 아니라고 하면 그는 어떻게 나올까. 미오는 조심스레 그의 눈빛을 살폈다.

‘가짜로 팬이라고 한 걸 들키면 저 삽으로 판 구덩이에…….’

마침 탁자에 기대 세워 두었던 삽이 바닥으로 작은 소음을 내면서 넘어졌다. 분명 불길한 징조였다.

‘대답을 잘해야 해.’

등으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렀고, 속이 울렁거렸다. 미오는 최대한 떨지 않으려고 배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그녀는 지오프리를 향해서 웃으려고 애썼다.

“그럼요. 카스피언 제국에 공작님만큼 멋진 분은 없는걸요.”

어색하게 입을 떼자 지오프리의 눈매가 더욱더 날카로워졌다.

“여전히 나를 추종한다?”

“그럼요. 그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죠.”

미오는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은 채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게다가 말을 하다 보니 영 틀린 말도 아니었다. 카스피언 제국에 그만큼 잘생긴 남자는 없었다. 게다가 요즘의 그는 아주 가끔 다정했으니 말이다.

‘살인귀만 아니면 딱 내 이상형인데…….’

미오는 아쉬움을 감춘 채 남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도대체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지.’

불편한 시간이 이어지고 있었다. 정작 그녀를 불러 놓고 지오프리는 별로 말이 없었다.

‘성격이 진짜 이상해.’

미오는 마치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몸을 뒤틀었다. 평소처럼 가볍게 말을 걸어서 이 분위기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그의 얼굴만 보면 간밤의 일이 떠올라서 귀가 뜨거워졌다.

‘정말 모르는 건가.’

방에 같이 있던 여우가 사라지고 그녀가 나타난 것에 대해서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는 걸까.

그렇게 의심이 많으면서?

‘침대에 함께 있었던 게 여러 번이라서 그럴까.’

어쨌거나 그녀는 지오프리 카스피언에게 미쳐서 그를 호시탐탐 노리는 이미지로 굳어졌다.

‘……입맞춤은.’

그녀는 그렇다고 쳐도 지오프리는 왜 입맞춤을 한 걸까. 생각하면 할수록 이해되지 않는 일투성이였다. 두통이 다시 밀려들었고, 미오가 볼 안쪽 살을 짓이기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왜 식사를 안 하지?”

“아뇨. 맛있게 먹고 있어요.”

그녀는 얼른 음식을 먹는 척했다. 좋아하는 훈제 고기가 눈앞에 있었지만, 입맛이 없었다. 입맛이 없는 건 곧 죽을 징조라던 까마귀의 말은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카스피언 제국의 건국 전설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있나.”

“아니요.”

갑자기 식사 자리에서 전설을 들먹이다니, 미오는 도무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국사도 부족한 그녀가 카스피언 제국을 제대로 알 리가 없었다.

“수천 년 전에 수인이 제국을 세웠다고 하더군. 카스피언 쪽에 터를 잡은 것은 늑대 수인이라고 들었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는 왜 하는 거지?’

수인이라는 단어에 포크를 잡은 미오의 손가락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어제 그녀가 인간으로 변하는 모습을 들켜 버린 게 아닐까. 그녀의 당황하는 얼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오프리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곰 수인이 세운 곳이 키에트 쪽이라고 하더군.”

하지만 이미 미오의 귀에는 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다. 수인이라면 사실 이곳에 와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숲에는 짐승이나 사냥꾼, 먹을 것을 구하러 오는 인간 외에는 다른 존재는 없었으니까.

‘늑대 수인에 곰 수인이라니…….’

그들의 모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수인 이야기에 음식이 목에 턱턱 걸렸다. 미오가 포크로 애꿎은 고기만 쿡쿡 찔러 대자 그가 벌떡 일어섰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지.”

걷어붙인 소매를 내려서 단정하게 정돈한 지오프리는 의자에 걸쳐 둔 재킷을 갖춰 입었다. 미오는 먹던 것을 내려 두고 허둥지둥 그의 뒤를 쫓았다. 수인 이야기를 그만 듣게 된 것은 다행이었지만, 머리는 여전히 뒤죽박죽이었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어.’

지금 지오프리의 모습은 혼란 그 자체였다. 어제의 일을 따지지도 않았고, 그동안 그녀의 부재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내가 전혀 궁금하지 않았던 건가.’

하지만 그는 동굴에서도, 이곳에서도 그녀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부른 적이 있었다.

‘지오프리의 진짜 마음은 뭐지.’

한참 고민하면서 그의 뒤를 쫓다 그만 어딘가 이마를 부딪쳤다. 지오프리가 갑작스레 멈춰 서는 바람에 그의 등에 찰싹 붙은 미오는 얼른 몸을 뒤로 뗐다.

“……아, 이곳은.”

의외의 장소에 도착한 미오의 눈이 커다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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