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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63)화 (63/123)

63화 어제와 다른 오늘 (1)

경악으로 물든 미오의 속눈썹이 연신 파르르 떨렸다.

항상 도둑 입맞춤만 했던지라, 이런 식으로 제대로 입을 맞추는 것은 처음이었다. 서늘한 지오프리의 입술에 그녀의 몰캉한 입술이 부드럽게 비벼졌다. 겹친 두 입술이 춥춥 소리를 내면서 떨어질 줄 몰랐다.

“……으음.”

알 수 없는 흥분에 미오는 지오프리의 목을 세차게 붙들었다. 가슴에 휘몰아치는 폭풍우에 이대로 그녀는 부서질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의 숨소리가 점점 더 은밀하고 거칠어졌다.

“……안 돼.”

간신히 정신을 차린 미오가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었다.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묘하게 허전한 기분에 그녀는 입을 가렸다.

“이게 무슨, 무슨 일…….”

몽롱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데, 지오프리가 긴 손가락으로 촉촉해진 입술을 슬며시 매만졌다. 평소에도 붉디붉은 그의 입술이 오늘따라 이슬 내린 장미처럼 탐스러웠다. 멍하니 그의 입술에 집중해 있는데, 그 아름다운 입술이 열렸다.

“언제나처럼 네가 내게 입을 맞춘 거지.”

“아니, 아니―.”

입을 맞추려고 한 것은 맞지만, 인간으로 변하는 데 이렇게 오래 입술을 물고 빨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입맞춤은 전적으로 지오프리 탓이다.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어쩐지 그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기 힘들었다. 심장이 너무 심하게 날뛰어서 이대로 지오프리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의 품에 매달려 있던 미오가 그대로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다리가 비틀댔고 넘어지는 바람에 엉덩이가 화끈거렸지만, 지금 그런 고통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빨리 여기에서 사라져야 해.’

오랜만에 인간의 몸으로 변해서인지 몸이 또 말을 듣지 않았다.

“……제발.”

미오는 절뚝대면서 필사적으로 문을 향했다. 너무 황당한 마음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간신히 문을 열고 사라지자, 지오프리의 침실이 조용해졌다.

“……하.”

참고 있던 가쁜 숨이 지오프리의 입술을 타고 흘렀다. 심장이 요동쳐서 가만 앉아 있는데, 흡사 말을 달리는 것 같았다. 심장께를 세차게 부여잡은 지오프리가 천천히 침대에서 벗어났다. 거울을 볼 용기는 없었지만, 보나 마나 터질 듯 붉을 게 분명했다.

“알렉세이가 알면 실컷 비웃겠군.”

혼잣말하던 그가 긴 손가락 하나를 들어서 셔츠의 찢어진 틈을 쓸어내렸다. 아까 여우의 발톱에 쓸린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가슴에는 기다란 은발이 한 가닥 매달려서 달랑댔다.

“……미오.”

침대 곁, 쿠션에 달라붙은 흰 털을 보면서 지오프리가 희미하게 웃었다.

* * *

그녀의 침실로 돌아온 미오가 문 앞에 서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사색이 된 그녀가 손으로 얼굴과 어깨, 팔을 더듬었다.

“나 지금 들킨 거야? 아니겠지?”

지오프리가 아까 했던 말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입맞춤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미쳤어.”

문에 기댄 채 헉헉대던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한참 뒤였다. 창밖으로 희미하게 동이 터 올 때쯤 미오는 문에서 등을 뗄 수 있었다. 지오프리 때문에 밤을 꼴딱 새운 것이다.

“진짜 큰일이야.”

제국민들은 수인을 부정한 존재로 취급했다.

그리하여 처음 제국을 세운 것이 수인이라는 것조차 기록에서 지울 정도였다. 인간과 함께 이 땅을 꾸려 나가려고 했던 수인 대부분이 몰살당했다. 수인의 피로 물든 네 개의 제국의 땅은 붉디붉었다.

‘수인을 잡게 되면 지하 감옥에 가두고 관람객을 들일 거야. 그거야말로 금광보다 이윤이 나는 사업이라니까. 수인을 잡은 도르프 제국민이 그렇게 부자가 되었다잖아.’

사냥터에서 들었던 무시무시한 말이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아냐. 지오프리는 그러진 않을 거야.”

은여우인 그녀를 숨겨 주려고 개처럼 보이게 도와줬으니까.

‘하지만 이 세상에 가장 못 믿을 게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돼.’

지오프리는 원작에서 여우의 사랑과 희생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던 잔악무도한 자니까. 그는 미쳐서 닥치는 대로 살인하고 제국을 멸망에 이르게 했다.

“이래서 기를 쓰고 다른 각인 상대를 찾으려고 했는데…….”

각인 상대와 인연을 맺으면 언제 짐승이 될까 하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미오는 그렇게 짝을 만나서 남은 생을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었다.

“그게 그렇게 힘든 거야?”

평생 혼자였는데, 서로 의지할 사람을 만나서 평범하게 살게 해 주면 어디가 덧나?

눈이 시큰대더니 양 볼이 실룩댔다.

울지 않으려고 입 안의 살을 꽉 무는데, 그녀를 비웃던 까마귀의 말이 귓전에 스쳤다.

‘암수는 한번 짝을 지으면 말이야. 평생 함께하는 거야. 깍깍. 이 어리석은 것아.’

‘각인 따위는 나는 몰라. 난 내가 원하는 상대를 고를 거야!’

까마귀의 말에 호기롭게 답했지만, 아직 지오프리 말고 다른 대안을 찾지 못했다.

“그럼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까마귀의 말대로라면 운명의 상대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녀에게는 오직 지오프리만 허락되는 것이다. 그에게만 심장이 반응하고, 이렇게 인간이 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아무래도 그가 나를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아.”

아니, 그것보다 지오프리가 사랑할 만한 남자일까.

그녀가 온 마음을 다해서 지켜 줄 만한 상대일까.

“사랑이 뭐지.”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연신 던지던 미오가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해를 바라보았다. 밤새 서늘하게 잠들어 있던 대지에 붉은 기운이 스며들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서리가 잔뜩 낀 창에 더운 입김이 서렸다.

* * *

결국, 한숨도 못 잔 미오가 머리를 세차게 쥐어뜯고 있었다. 카스피언 공작 성에서 나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머무는 것이 괜찮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절망적인 몸부림을 치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미오 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눈물이 글썽한 로렌이 한달음에 와서 미오를 꼭 안았다. 마치 몇 년 만에 반가운 친구를 만난 사람처럼 구는데, 그녀는 어리둥절했다.

“공작님한테 전해 들었습니다. 어제저녁 늦게 돌아오셨다고요? 우르체카는 한겨울이라고 하던데, 몸은 좀 어떠세요? 사냥 대회에 참석했다가 바로 우르체카로 여행 가셨다는 말에 얼마나 서운했는지 모른답니다. 아이, 참! 공작님한테 큰 변고가 있었다는 말은 들으셨어요? 진짜 큰일 날 뻔했답니다. 그런데 얼굴이 무척 피곤해 보이시네요. 어서 이리로 오세요.”

“……아.”

미오는 그대로 침대에 눕게 되었다. 로렌은 쉴 새 없이 그동안의 일을 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정원에 새로 심은 꽃이며, 호수에 들른 철새의 이름까지 알려 주었다.

“그런데 많이 피곤하신가 봐요.”

‘네. 밤을 새웠거든요.’

게다가 아까부터 로렌이 계속 말을 하는 바람에 미오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반가워해 주어서 고맙긴 하지만 지금은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다.

‘나는 휴식이 필요해요.’

그녀가 간절한 염원을 담은 눈빛을 보내자 로렌이 이불을 덮어 주었다.

“오늘 아침은 조금 늦게 들일 테니 일단 쉬도록 해요. 남은 이야기는 차차 하도록 하고요. 알겠죠? 그리고 살이 조금 빠진 것 같은데, 그러면 못써요. 요즘 날씬한 숙녀가 인기라고 하지만 건강을 해친다고요.”

로렌이 다소 여윈 미오를 걱정스럽게 바라봐 주었다.

“……고마워요.”

평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그녀의 말과 눈빛이 고마웠다. 로렌이 문을 살짝 닫는데 미오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다.

“이게 뭐야.”

어쩐지 로렌의 잔소리가 계속 듣고 싶었나 보다. 이상하게 집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에 눈물이 연신 났다. 이내 축축해진 베개를 끌어안은 미오가 소매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렇게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이런 기분이라니…….’

그렇게 소매로 입을 틀어막고 울던 미오는 지쳐서 잠이 들었다.

* * *

“미오 님! 일어나세요. 해가 중천이랍니다.”

정오가 조금 되기 전에 그녀를 다시 찾은 로렌은 급하게 미오를 깨웠다. 미오가 입을 드레스를 벽에 건 다음에 로렌이 침대 근처로 다가왔다.

“에구머니나! 눈이 이렇게 부어서 어쩐대.”

울다가 잠든 미오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로렌. 미안한데 조금만 더 자고 싶어요.”

“그건 안 될 말입니다. 얼른 일어나세요. 좋은 일이 있답니다.”

신나서 준비하는 로렌의 입에서 노래가 절로 흘렀다.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쥐고 간신히 침대에 기대앉은 미오가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아까 마지막으로 봤을 때 해가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대략 다섯 시간은 흘렀을까.

‘……좋은 일이라.’

지금 그녀에게 좋은 일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다시 빙의하기 전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각인 상대가 지오프리가 아니라 다정한 미남으로 바뀌거나 혹은 지오프리가 갑자기 기억 상실증에 걸려서 어제 일을 잊는 것이다.

“얼마나 낭만적인지 몰라요. 공작님이 특별히 유리 정원에 초대하시다니…….”

“……네?”

멍하니 있던 미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유리 정원에 지오프리가 초대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오늘 두 분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데이트를 하는 거예요.”

한참 분홍빛 꿈에 부푼 로렌이 미오의 팔을 끌어서 옷을 갈아입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몸을 허우적대던 미오에게는 로렌의 말이 사뭇 다르게 들렸다.

‘드디어 날 죽이겠다는 건가?’

목격자가 없는 완벽한 밀실에서의 살인.

다시 그가 시체를 파묻던, 달빛이 어스름한 날의 기억이 그녀를 덮쳤다. 검붉은 것을 잔뜩 묻힌 지오프리의 손이 바로 그녀의 목을 노릴지도 모른다.

“자! 이제 거울을 좀 봐요.”

로렌은 퍽 솜씨가 좋아서 피곤했던 흔적을 분으로 완벽히 가려 주었다. 기름에 염료를 섞은 것을 볼과 입술에 발라서 적당히 생기 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하늘색 드레스는 그녀의 몸에 꼭 맞았고, 머리에 장식한 구슬 핀도 제법 잘 어울렸다.

“너무 예쁘네요.”

거울에 로렌이 활짝 웃는 얼굴이 비치는데, 어쩐지 서러운 감정이 치밀었다.

‘이렇게 예쁘게 꾸며 줬는데, 나는 죽으러 가는 걸지도 몰라요.’

로렌에게 제대로 보답도 못 하고 이렇게 헤어질 생각을 하니 다시 눈물이 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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