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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62)화 (62/123)

62화 비밀의 밤이 밝아 오고

미오는 침으로 흥건해진 앞발을 다시 핥으면서 씩씩댔다.

‘지오프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니 어쩐지 이상해.’

그는 동굴에서 구해 준 게 누군지도 모르는 천하의 멍청이니까 말이다.

“설마 대공에게 반해 버려서 돌아오지 않는 건 아니겠지.”

어쩐지 염려스러운 지오프리의 음성에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나도 취향이라는 게 있거든?’

물론 우르체카 대공이 체격도 좋고 미남자에 부유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의 가슴은 전혀 뛰지 않았다.

‘그건 내 짝이 아니라는 거야.’

가슴이 뛰는지를 확인하는 만큼 정확한 것은 없었다. 현재 그녀의 심장이 반응하는 것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거야.’

미워해야 하고 거리를 두는 게 맞는데, 어쩌다 보니 자꾸만 얽혔다.

“뭉치야. 뭉치 어때?”

미오는 그녀를 부른다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연신 지오프리가 괴상한 단어를 입에 담았다.

‘뭉치는 또 뭐야. 사고뭉치 이런 건가?’

“널 보니까 말이야. 솜뭉치처럼 하얘서…….”

검은색 비단 가운을 느슨하게 걸친 지오프리가 싱긋 웃는데 미오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름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구나.”

미오는 제멋대로 해석하는 그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다. 하얀 실타래 같은 작은 몸을 지켜보던 지오프리가 희미하게 웃었다.

‘웃기고 있어! 뭉치는 무슨 뭉치야.’

씩씩대는데 작고 하찮은 두 발에 미오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여우 사냥터에서 진짜 여우가 되어 버린 지 제법 시간이 흘렀다. 왜 이런 마음인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인간이 되어야겠다는 의욕이 별로 들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살아도 상관없지 않을까.’

폭신한 쿠션에 종일 제공되는 호화로운 식사가 만족스러웠다. 가끔 지오프리가 그녀를 괴상하게 부르는 것은 거슬렸지만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빙의한 이래 처음으로 아무런 고민도 없이 평화로운 날을 보냈다.

고민을 애써 억누르고 있다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지만…….

잠시 생각에 잠긴다는 게 살짝 졸아 버렸다. 그때 문이 부서질 것처럼 흔들리더니 활짝 열렸다. 꽃을 한 아름 안고 나타난 것은 우르체카 대공이었다.

“지오프리는 어디 갔지. 그 아픈 몸을 하고서 말이야.”

대공의 말에 미오가 얼른 사방을 살펴봤다.

‘정말 없네?’

창에 기대선 대공이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이군. 그 몸을 해서 황실 무도회에 참석해야 한다니…….”

그러고 보니 저번에 라비니아가 무도회와 드레스 이야기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미오의 쫑긋 선 귀가 대공을 향했다.

“이번에도 혼자 오면 그들이 공작을 가만두지 않을 텐데 말이야.”

쿠션에 얼굴을 묻고 있던 미오는 안 듣는 척하면서 귀를 쫑긋 세웠다.

‘아니! 저번에도 지오프리를 거의 죽일 뻔했잖아. 그런데 또 죽이려고 들지도 모른다고?’

황제는 분명 지오프리의 친아버지가 확실하다고 들었는데, 도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베일 영애도 위중한 병으로 영지로 돌아가 버린 지금, 우리 가련한 지오프리는 누구랑 같이 그곳에 가나! 내가 드레스라도 입어야 하는 걸까.”

우르체카 대공은 거대한 몸을 떨면서 가련한 여자 주인공처럼 연기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연기에 미오는 꼬리로 눈을 가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대공은 진짜 아니야.’

키가 2미터에 가까운 그는 골격 자체가 남달랐다. 외모 가지고 이런 이야기는 하기 싫지만, 그가 드레스 입은 모습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때 욕실 문이 열리더니 자욱한 수증기와 함께 지오프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만 오라고 하지 않았나. 알렉세이.”

“지금 미친 건가? 쓰러지면 어쩌려고 혼자 씻은 거야. 나를 부르지 그랬어. 내가 함께 씻어 줄 수 있는데 말이야.”

한달음에 달려간 대공이 지오프리의 어깨를 세차게 흔들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저러다 지오프리 상처가 덧나겠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오가 고개를 가만 흔들었다.

* * *

밤이 깊었지만, 미오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까 대공과 지오프리의 대화를 엿들었던 탓이다.

‘무도회에 참석할 건가?’

‘참석하지 않으면 반역 혐의를 받을 텐데, 어쩔 수 없지 않나.’

‘황태자는 자네를 죽이려고 했네.’

‘죽어 버렸으면 차라리 좋았을까?’

지오프리는 마치 지금의 그가 죽은 사람인 것처럼 굴었다.

‘이렇게 엄연히 살아 있지 않나! 도대체 요즘 자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군!’

‘……그러게.’

큰 위기에 처한 것은 지오프리였지만, 흥분한 것은 대공 혼자였다. 그는 밤새도록 무도회에 참석해서는 안 된다고 지오프리를 설득했다.

‘거긴 무도회가 아니라 전장이라고!’

‘전장이야말로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 아니던가.’

‘하면 누구와 함께 갈 텐가. 파트너도 없이 갈 생각인가?’

대공의 다그침에 지오프리가 쓸쓸하게 속삭였다.

‘글쎄. 나와 같이 갈 여인이 세상 어디에 한 명쯤 있지 않을까.’

‘아주 천하태평이군!’

대공은 화만 한참 내다가 방을 떠났고, 그때부터 미오는 발톱으로 쿠션을 벅벅 긁고 있었다.

‘가련한 지오프리라니…….’

평소처럼 오만하게 굴면 들은 척도 하지 않았을 테지만, 저리 나오는 것은 무시하기 힘들었다.

‘왜 나는 이렇게 지오프리의 말에 신경이 쓰이는 걸까.’

털로 눈을 아예 가린 미오가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머릿속에 너무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일단, 이 몸으로 너무 오래 지내기는 했으니까…….’

슬그머니 몸을 일으킨 미오가 침대 기둥을 붙잡고 동태를 살폈다.

지오프리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침대에 기대앉아서 잠깐 조는 게 밤잠의 전부였다. 그나마도 악몽을 꾸는지 몇 번이고 팔을 버둥대고, 어깨를 떨었다.

한편 미오의 마음을 움직인 일은 따로 있었다.

‘이제 다니는 동안 위험은 없을 거다.’

미오가 앞발을 한참 핥는데 그녀 앞에 앉은 지오프리가 중얼댔다.

‘마법을 썼으니까, 다른 사람 눈에는 네가 은여우로 보이지 않을 거야.’

그의 말에 미오는 일전에 들렀던 무시무시한 유령의 집에서 보았던 사람이 마법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오프리는 그녀가 희귀한 은여우라서 위험할까 봐 미리 손을 써 준 것이다.

‘완전 나쁜 놈일 줄만 알았는데…….’

보면 볼수록 짠한 구석이 있어서 마음이 쓰였다. 아버지는 그를 아들로 인정하지도 않았고, 죽을 위기에 처해도 외면했다. 새어머니와 이복동생은 시시때때로 지오프리를 죽이려 들었다.

‘나는 그런 건 하나도 몰랐어.’

지오프리가 왜 냉담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고,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처음 알았다.

‘차라리 날 때부터 혼자였던 내가 나을지도 모르잖아.’

가족을 가져 본 적이 없어서 그 소중함을 경험하지 못했다. 부모의 품이 얼마나 따뜻한지 상상만 해 볼 뿐이었다. 그러다 미오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무도회에 참석하면 어떨까?’

솔직히 사냥 대회에 가서 새로운 인연을 찾겠다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여우가 여우 사냥터라니 정말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그 바람에 엉뚱한 일에 휘말려서 한참 고생했었다.

‘무도회는 그런 피비린내 나는 일과는 거리가 머니까…….’

지오프리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그녀를 위해서 무도회에 가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자 조금 남아 있던 망설임은 사라졌다.

계획은 퍽 간단하였다.

‘잠든 지오프리의 입술을 얼른 훔친 후 바람처럼 달려서 내 방으로 가는 거야.’

체력도 회복되어서 달리는 것도 이제 자신 있었다. 그런 다음 지오프리 앞에 나타나서 기꺼이 무도회에 함께 가 주겠다고 말하면 작전이 성공리에 막을 내리는 것이다.

진지한 얼굴을 한 미오가 협탁으로 기어 올라간 다음 살금살금 침대로 넘어갔다.

‘좋았어.’

지오프리는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허벅지를 밟고 올라가 지오프리의 가슴 위에 앞 발을 올려 제 몸을 지지하면 될 것 같았다. 동굴에서 숱하게 해 봤던 자세라서 대충 각도가 가늠되었다.

‘얼추 그의 입술에 닿을 거야.’

창밖에서 비추는 달빛이 그녀의 그림자를 커다랗게 부풀렸고, 마치 미오가 지오프리를 습격하는 맹수처럼 보이기도 했다.

막 미오가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그녀의 계획은 어그러졌다.

―끼잉끼잉.(자는 거 아니었어?)

갑자기 그의 손이 그녀의 작은 몸을 낚아챈 것이다. 낙담했던 미오는 이내 그의 배 위에 그녀를 올려 둔 지오프리가 다시 잠을 청하는 것을 확인했다.

‘휴! 잠결에 한 행동이구나.’

미오가 두 다리를 그의 탄탄한 가슴에 고정했다. 그녀의 배에 맞닿은 지오프리의 심장이 아주 느릿느릿하게 뛰고 있었다. 미오가 주둥이를 내밀려는데, 그녀의 수염이 지오프리의 목을 스쳤다. 그가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속삭였다.

“뭉치, 내려가서 자라.”

‘깬 거야?’

얼른 그의 숨소리를 확인했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잠버릇이 왜 이렇게 고약해.’

본래의 목적을 떠올린 미오가 주둥이를 쭉 내밀었다. 이상하게 처음도 아닌데 볼이 달아올랐다.

‘왜 이렇게 의식되지.’

이건 연인 사이의 입맞춤도 아니고 그냥 단순히 살을 마찰하는 행위에 불과한데…….

긴장한 나머지 그녀의 발톱이 지오프리의 셔츠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렇게 미오의 주둥이가 지오프리의 입술에 닿는 순간, 작은 여우가 사라졌다.

‘변했다.’

이번에는 절대로 그의 곁에서 잠드는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여러 번 다짐했었다. 미오가 조심스레 그를 벗어나려는데, 지오프리가 눈을 번쩍 떴다.

“……흐읍.”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가 침대 밖으로 몸을 날리려고 했지만, 지오프리가 조금 더 빨랐다. 그녀의 허리를 세차게 붙든 지오프리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또 도망갈 작정이었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공작님.”

입술을 떼는데 음성이 한없이 떨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거니와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들키면 어쩌나 하고 무수히 많은 밤 번민했지만, 고민과 현실은 너무나 달랐다.

미오가 잡힌 허리를 힘주어서 비틀자, 그의 왼손이 그녀의 턱을 치켜들었다. 새까만 눈이 그녀를 태워 버릴 듯 타오르고 있었다.

“하던 것을 계속하는 게 어때?”

“……그것 역시 무슨 말인지.”

“내가 먼저 시작한 일이 아니잖아.”

날카로운 그의 턱이 미오의 얼굴을 향해서 내려오는가 싶더니 이내 두 입술이 포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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