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59)화 (59/123)

59화 황금 사냥꾼 미오

지오프리는 아까부터 여우가 하는 짓을 가만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많았다.

‘당연한 건가.’

인간이 짐승의 몸짓을 전부 이해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지오프리가 헛웃음을 짓는데, 털이 다 마른 여우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물기가 조금 남은 은색 털이 보송보송 부드러워 보여서 자꾸만 쓸어 보고 싶었다. 그가 손을 내밀자 여우는 등을 바짝 세웠다.

―크르르.

그의 손길을 저지하더니 여우가 앞발을 들고는 땅을 파는 시늉을 했다.

“굴에서 쉬고 싶다는 건가?”

―크르르, 크르르.

그의 말에 송곳니를 드러낸 여우가 이번에는 협탁에 올라가더니 화병에서 꽃을 한 송이 물고 왔다. 우르체카 대공이 가져온 노란 들국화였다. 여우는 그것을 물고는 제자리에서 풀쩍풀쩍 뛰었다.

“아무래도 숲에서 마음껏 달리고 싶다는 건가?”

한참 고민하던 그가 답을 내어놓자 여우는 아까보다 더 심하게 화를 냈다. 웃음을 간신히 참은 지오프리가 작게 속삭였다.

“미안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지오프리는 개인적으로 짐승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후원에 있는 앙겔라스는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곁에 두게 되었다.

“은여우라…….”

카스피언 제국에서 자라는 귀한 여우였다. 그 역시 책에서나 읽어 봤지 이렇게 보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침대와 셔츠에 온통 반짝거리는 여우 털이 묻었다.

‘이렇게나 작은데 왜 넌 혼자지?’

지오프리는 그저 작은 몸의 여우가 혼자 떠돌아다니는 게 어린 시절 그의 모습과 겹쳐져서 안쓰러웠다.

‘안쓰럽다니…….’

아무래도 요즘 그가 조금 이상해진 게 분명했다. 전과 달리 감상에 빠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얼른 정신을 차린 그가 눈에 힘을 주었다.

“슬슬 수확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군.”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지오프리가 베개 아래 넣어 둔 단검을 벽으로 날렸다. 단검은 벽에 표시해 둔 지점에 정확하게 꽂혔다. 작은 점은 황제의 목이 될 때도 있었고, 황후의 눈이 될 때도 있었다.

“완벽하군.”

셔츠 아래, 팔뚝에 새겨진 검은 문양이 꿈틀대고 있었다.

* * *

미오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일단 생각보다 지오프리가 너무 멍청했다.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지?’

그녀는 있는 힘, 없는 힘 죄다 모아서 보석과 금덩이를 표현했다. 미오의 반짝이는 호박색 눈이 보석이요, 노란 꽃이 바로 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오프리는 내내 오답만 내어놓았다.

‘아! 답답해.’

게다가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면서 검을 막 휘두르는 게 아닌가. 침대에서 최대한 쉬면서 약을 먹고 잘 치료해도 살까 말까 하는 이때 검술이 웬 말인가.

‘좀 멋있기는 하지만…….’

가운의 가슴을 풀어 헤친 채 검을 든 지오프리는 명화의 한 장면처럼 경건해 보였다. 미남도 매일 보면 평범해 보인다는 말은 전부 거짓이었다. 지오프리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더욱더 아름다웠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머리를 흔든 후 그녀는 털이 수북한 앞발을 꼭 쥐었다.

‘원수가 코앞에 있잖아.’

라비니아에 대한 복수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단숨에 죽이지는 않을 거야.’

그건 영 재미가 없으니까.

그녀의 눈이 음험한 빛을 냈다. 언제 누웠는지 지오프리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가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한 미오가 살금살금 창가로 나갔다.

‘할 일이 많아.’

우선 라비니아에게 환영 선물 정도는 보내야 할 것 같았다.

* * *

“아까 공작님 표정 봤지? 어쩌면 좋아. 이제 내 사랑을 받아 주시려나 봐.”

“아가씨. 정말 잘된 일입니다.”

라비니아가 흥분에 겨워서 방을 빙글빙글 돌자 베스 역시 들떴다.

“왜 내가 너처럼 하찮은 것에게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구나.”

한참 춤을 추던 라비니아가 정색하자 베스가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아가씨가 기뻐하시는 모습에 너무 좋아서 그랬습니다.”

별안간 화를 내던 라비니아는 그녀에게 복종하는 하녀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너는 네 주제를 제법 잘 아는 것 같으니까, 너그러운 내가 넘어가 주마. 목욕물은 다 준비되었겠지? 피부가 벌써 건조해진 기분이야.”

“그럼요. 향유랑 다 준비되었습니다.”

라비니아는 욕실로 들어가기 전에 하늘을 날 것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방을 가로질렀다.

욕실은 크지 않았지만 아늑한 공간이었다. 욕조에는 김이 나는 더운물에 꽃잎이 한 움큼 뿌려져 있었다.

“오늘은 장미가 별로니까, 저기 있는 유칼립투스로 바꿔.”

슈미즈 차림의 라비니아가 지시하자 베스가 허둥지둥 욕조 위의 장미를 걷어 냈다. 그리고 급히 유칼립투스가 든 바구니를 욕조 위로 기울였다.

“아가씨.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래. 정확하게 15분 뒤에 와서 머리를 감겨 주렴. 그 전에는 누구도 방해하지 말도록 해. 아침부터 치장하느라 설쳤더니 몹시 피곤하구나.”

“네. 알겠습니다.”

라비니아는 욕조에 몸을 깊게 담근 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카스피언 공작 부인.”

장래 그녀가 불릴 호칭을 작게 속삭여 봤다. 아주 어릴 때부터 품어 왔던 꿈에 거의 다가왔다. 그녀를 막을 것은 거의 없었고, 설령 있다고 해도 모조리 짓밟을 작정이었다.

“그 재수가 없는 계집처럼 말이야.”

물 위에 뜬 유칼립투스의 향이 오늘따라 진했다. 이것은 아무나 쓸 수 없는 귀한 허브로 베일 백작에게 특별히 부탁한 것이었다.

“피부 관리는 숙녀의 미덕이니까 말이야.”

항상 사내에게 아름답게 보여야 할 의무가 있었다. 홍조 띤 얼굴과 하얀 피부, 잘록한 허리에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 그리고 가느다란 발목을 지니기 위해서 어릴 때부터 노력했다. 지금의 미모는 그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본 것이었다.

“이 고운 손 좀 봐.”

더운물에 붉은 기가 돌기 시작한 손을 들어서 살짝 물장구를 쳤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고용인이 어떤 잘못을 해도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문이 삐걱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찬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라비니아가 인상을 썼다. 욕조 앞에 둔 모래시계가 아직 반절도 내려가지 않았다.

“너는 시계도 볼 줄 몰라? 이제 겨우 5분이 지났을 뿐이야. 이제 막 땀이 나기 시작했는데, 문을 열면 어쩌냐고!”

“…….”

상대는 아무런 답이 없었고, 라비니아는 화가 났지만, 머리를 뒤로 젖혔다.

“향유를 듬뿍 쓰도록 해. 아무리 비싸다고 해도 나한테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눈을 감은 채 그녀가 중얼대는데 아래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 하나 제대로 못 감기는 하녀라니…….’

그녀는 공작에게 환심을 사고자 일부러 베일가의 고용인을 성에 들이지 않았다. 근처에 머물게 하면서 급한 일이 있을 때만 불렀는데, 오늘따라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나마 눈치도 제법 빠르고 손재주가 좋은 것 같아서 데리고 있었는데 안 되겠어.’

아무래도 원래 부리던 계집을 데려와야 할 것 같았다.

이렇게 라비니아가 심하게 짜증을 내는데, 그녀 곁에 어른거리는 것은 사람의 형태가 아니었다. 뒤집힌 양동이를 밟고 올라선 것은 작은 여우, 미오였다. 음산한 눈빛을 한 그녀가 물을 뚝뚝 흘리며 짜증을 내는 라비니아를 보면서 히죽 웃었다.

‘오늘은 그냥 인사만 하고 갈게.’

입에 무언가를 물고 서 있던 미오는 그것을 라비니아의 기다란 금발 위에 내려 두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욕실을 나섰다.

“도대체 뭐 하는 거야? 향유부터 뿌려야지!”

라비니아는 뒤에 가만 서 있기만 하는 하녀 때문에 짜증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게다가 문을 열어 두면 수증기가 전부 밖으로 나가잖아. 내가 감기라도 걸리면 네가 책임질 거야?”

그러다 약간 오싹한 기분을 느낀 라비니아가 입을 다물었다. 이 정도로 대꾸를 하지 않는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무섭게 왜 이래. 그만해!”

그때 열린 문을 밀고 들어온 베스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아가씨. 누구랑 이야기하시는 건가요?”

“여기에 너 말고 누가 있어?”

고개를 갸웃대던 베스가 라비니아의 머리에 붙은 것을 확인하고는 세찬 비명을 질러 댔다.

“으악! 사람 살려!”

하녀의 비명에 더 놀란 라비니아가 욕조에서 일어나서 제자리에서 마구 뛰었다. 그러자 녹색의 길고 징그러운 것이 물 안으로 풍덩 빠졌다. 라비니아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가리키면서 덜덜 떨었다.

“뱀! 뱀이야!”

“아가씨! 얼른 나오셔요!”

베스의 도움으로 욕조에서 벗어난 라비니아는 물을 뚝뚝 흘리면서 욕실을 탈출했다.

* * *

저녁 식사 후 조용한 시간에 우르체카 대공이 이번에는 술병을 들고 지오프리를 찾았다. 하지만 그 방문이 달갑지 않은지 지오프리는 인상만 썼다.

“매일 올 필요가 없네.”

“알다시피 우르체카와 이곳은 거리가 있지 않나? 이번에 돌아가면 또 언제 볼지 모르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 이 마음이 얼마나 시린지 몰라.”

가슴에 손을 얹고서 슬픈 연기를 하는 알렉세이를 지켜보던 지오프리는 혀를 찼다.

“누가 들으면 절친한 사이로 오해하겠군,”

그의 장난에 전혀 반응이 없는 지오프리를 살짝 노려보던 알렉세이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그 이야기 들었나? 베일 영애가 목욕을 하는데 욕조에 독사가 들어와서 하마터면 영애가 물릴 뻔했다고 하던데…….”

홀로 술을 따르던 알렉세이는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그게 왜 욕조에 들어갔을까?”

“사무엘 말로는 유칼립투스와 같은 색이라더군.”

“아하, 우연의 일치라는 거군.”

술을 홀짝이던 알렉세이가 이번에는 지오프리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비취색 눈이 마치 상대의 속내를 모두 알아낼 것처럼 반짝댔다.

“왜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내 시선이 뜨거운 것을 눈치챈 건가?”

“심심한 거라면 사무엘을 붙여 주지. 아마 말 상대를 잘해 줄 거야.”

지오프리의 말에 알렉세이가 세차게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착해 빠진 바보에게 나처럼 위험한 남자는 어울리지 않지. 그나저나 이게 뭔가? 은색 털인데…… 나 몰래 짐승이라도 기르는 건가?”

“짐승은 무슨…….”

알렉세이는 지오프리가 말릴 틈도 없이 곧장 침대 아래를 들여다봤다. 거기에는 인기척에 놀라서 숨은 미오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0